수난주간의 삼총사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다. 하지만 성금요일과 부활의 일요일 사이에 끼어있는 토요일은 별반 조명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지루하고 긴 토요일이라 부른다. 어제(성금요일)와 내일(부활의 아침) 사이에 낀 날, 그저 일상적인 일들로 가득한 재미없는 날이다. 이것이 최초의 수난주간에 외롭게 서 있던 토요일의 모습이다.
학습을 위해 반복하자면, 사순절(四旬節, Lent)의 절정은 종려주일(Palm Sunday)로부터 시작되는 수난주간(受難, Passion Week)이다. 그리고 수난주간의 절정은 성금요일(Good Friday)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
브루그만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이 법정에서서 야웨 하나님에 대해 반대 증언 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어둠과 야만성과 소외감으로 뒤덮인 날이기 때문이다. 이 반대 증언은 시편 22편에 대한 예수님의 낭송에 중심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또한 십자가 주위에 있었던 자들에 의해서 예수에게 행해진 조롱들을 담고 있다(마태 27:39-44). 이처럼 성금요일은 엄청난 일이 발생한 날이다. 불의가 절정에 이르던 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던 날, 상실과 유실로 가득한 날, 종국에 관한 몰이성적 무지로 어두워진 날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려 죽이는 날이기도 했다! 이것은 구속역사의 위대한 반전을 암시한다. 태고로부터,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집요한 노력은 마침내 하나님이 인간이 됨으로써 반전(反轉)되었고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 됨은 궁극적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쨌건 예루살렘이 소동하고, 온 땅이 진동한 성금요일도 황혼이 찾아오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분주한 병정들의 발걸음도 자취를 감추고, “그를 죽여라!” 하며 독기로 가득 차 외쳐댔던 군중들의 소리도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다. 긴 어둠 자락이 영문 밖 골고다 언덕에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저녁 준비에 분주하였다. 그들은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망각의 늪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성금요일의 저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적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밤이 찾아들었다.
밤이 끝나고 토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하지만 어제 일어났던 사건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듯,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의 분주함으로 돌아왔다. 밀렸던 집안일을 하고,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었다. 애들은 토요일 오락 TV 프로그램을 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창 너머로 봄맞이 가족 나들이를 위해 채비를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어제 있었던 엄청난 일,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일은 나사렛 촌 출신의 한 젊은이의 광기의 측은한 결말 정도로 치부되었다. 어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아무도 없었다. 일상이 그랬던 것처럼 토요일은 그렇게 돌아간 하루였다.
오늘은 토요일이라면 내일은 일요일이다. 그러나 그날이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날이 될 것이라고 꿈에라도 그려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려볼 수 없겠지!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선물이 아니면 가능치도 않은 부활의 날을 어찌 죽을 수밖에 없는 흙덩어리 인생(mortal being)이 알리요! 그날이 어떤 날인가?
․ 사람에게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복음의 날,
․ 죽음 너머에 새로운 삶과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는 날,
․ 날카로운 칼날처럼 인간의 역사 속으로 파 헤집고 들어온 저 생(生)의 날,
․ 인간의 두 눈과 귀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피안의 세계가 이생(生) 안으로 돌입하던 날,
․ 그 부활의 날이 최초의 일요일이 아니던가?
다시 브루그만은 부활의 일요일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핵심적 증언이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이날이 어떤 날인가? 위대한 선언과 공표를 의미하는 날이다. 죽음을 정복한 바 있는 부활, 불의를 극복한 정의, 그리고 불굴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요 공표의 날이다. 비인간성과 굴욕으로부터 해방된 날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부활의 일요일이 지닌 모든 요소는 ‘희망’이란 이름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토요일이라는 긴 하루의 여정이 있을 뿐이다. “이날은 한편으로는 고통, 고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과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과 새로운 탄생에 대한 꿈 사이에 놓여있다.” 원리상,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함께 어우러져 “화해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며, 특별히 이 관계의 양쪽 측면들은 여전히 긴박성과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토요일의 사람들은 그저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 속에 갇혀 어제(성금요일)와 내일(부활절)의 경이를 기억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한다. 아니 죽음의 성금요일과 부활의 일요일 사이에 갇혀 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리라. 길고도 지루한 토요일에 사람들은 경이와 경탄의 의미를 망각한 채 정말로 재미없게 살아간다.
그러나 ‘기억’과 ‘기대’ 사이를 오가며 조용한 흥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만찬 공동체”(sacramental community)야 말로 진정한 토요일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부활절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신실한 주권과 주권적 성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핵심적 증언이 반대 증언이 증거 하는 은닉성과 모호성과 부조리성과 부정성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기다린다. 기다림과 희망이야말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오늘 토요일을 의미로 충만하게 사는 종말론적 그리스도인과 그들의 교회들이 갖는 존재론적 덕성이다.
첫댓글 그러네요...
토요일~~별 생각없이 지냈던...
기억과 기대사이~~~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