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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露柱)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 잡고 있다.
금산사 일주문
금산사 금강문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2체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셨다.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 현판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년(명조 11)에 인언(仁彦) 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의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금강문 좌측에 모셔진 인왕상
코끼에 등에 올라탄 보현동자
금강문 우측에 모셔진 인왕상
사자 등에 올라탄 문수동자
금산사 천왕문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금산사 보제루 앞면 7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수조옆에 모셔진 불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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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목어
금산사 범종
감로수
금산사 대적광전
금산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기와집. 우리나라 법당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하나 1986년 불에 타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장대석기단(長臺石基壇) 위에 세워진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의 7칸에는 모두 빗살 무늬로 장식된 두 짝 열개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만 출입문이고 나머지는 밑부분에 머름(미닫이 문지방이나 벽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설치한 광창(光窓)이다. 옆면은 4칸으로 제일 앞쪽 툇간에 한 짝 출입문을 달아 사용했고 나머지는 회벽으로 위쪽에 인방(引枋)을 가로질렀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이며 다포계 공포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공간포(空間包)도 넓은 주간(柱間)에 1개씩만 두어 특수한 구조로 보이는데 중앙칸만은 공간포를 2개 두었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高柱]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그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입상 6구를 안치했는데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위에는 닫집을 설치했다. 대들보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졌는데 좌우측면 평주(平柱)에서 충량(衝樑)이 3개씩 올라가 대들보에 걸리게 하였다. 충량의 형태가 곡선으로 된 점이 특이하며 건물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맛을 갖게 한다. 천장은 불단 바로 위를 1단 더 높이고 가장자리는 대들보 위 충량 위쪽에 붙여 반자를 꾸며 전체적으로 층급천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건물내부는 낮고 가득찬 느낌을 주고, 건물외부의 정면관도 낮고 옆으로 길게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건물은 170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18세기경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금산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점판암제(粘板岩製) 석탑. 보물 제27호. 높이 218cm. 현재 대적광전 앞 왼쪽에 있으나 원래는 금산사에 속했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탑은 탑신과 상륜부 일부가 없어져서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평면이 6각형인 이 탑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다각형 석탑의 한 예로서 중요하며 부분적인 장식조각이 섬세하여 공예적 성격이 강한 특수한 탑이다. 기단부는 6각형의 화강석을 3단으로 쌓고 측면에 각각 사자를 양각했다. 그 윗부분부터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맨 밑에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을 각각 조각한 석재가 2매 놓여 있어 탑신부를 받치는 연화대석으로 보이며 그 사이에는 중석(中石)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부는 옥신(屋身)이 거의 없어지고 맨 위의 2개 층만 남아 있으며 옥개석이 겹겹이 쌓여 있다. 상층부의 옥신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모각하고 각 면에는 둥근 테두리[圓圈] 안에 좌불(坐佛)을 선각했다. 옥개석은 추녀 밑이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轉角)에서의 반전이 뚜렷하다. 옥개석 밑면에는 초화(草花)와 용 등이 선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둥근 보주형(寶珠形)의 화강석재가 놓여 있다. 탑 전체를 볼 때 옥개석이 이루는 점진적인 체감비례가 온화하고, 검은색 돌에 섬세한 조각장식이 어울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 탑의 층수는 경주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 국보 제40호)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13층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으며 대체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 석련대
보물 제23호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적광전 내부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高柱]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
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그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입상 6구를 안치했는데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위에는 닫집을 설치했다.
금산사 조사전
금산사 조사전 내부
금산사 나한전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 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원래 금산사의 나한전은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하였기 때문에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불렀다.
나한전 내의 나한들
안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다. 또한 석가여래의 여러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을 모셨고, 16나한상과 2인의 시자상도 목조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전각이름에 걸맞게 소형의 오백나한상을 계단식의 단을 마련하여 가득히 봉안하였다.
금산사 삼성각
사리탑과 석탑주위로 서있는 석수들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오층석탑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금산사 오층석탑, 방등계단 , 사리탑
금산사 경내 전경
금산사 노주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사 명부전
명부전내의 지장보살상
금산사 나무아비타불 입석
금산사 석등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경내에 있는 3층 규모의 불전.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봉안한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金堂)이다. 초창(初創)된 시기나 당시의 건물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표율사가 중창시에 미륵장육불상(彌勒丈六佛像)을 조성해 3층전인 금당에 봉안했음이 〈삼국유사〉와 〈5층석탑중수기〉(1971년 발견)를 비롯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1705년)·〈금산사지 金山寺誌〉(1921년) 등에 기재되어 있다. 또 현재도 소조불상(塑造佛像)의 대좌 아래에 커다란 철제 수미좌(須彌座)가 남아 있어 과거의 장육상대좌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27년(인조 5) 소조삼존상을 조성하였다. 현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79평,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50평,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된다. 건물은 총높이가 20m 가량 되는 3층인데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당초부터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 원통전
원통전내의 관세음보살상
금산사 대장전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금산사 찾아가는 길
1)전주 - 712번 지방도로 - 귀신사 입구 - (2.9km) - 삼거리(좌회전) - 200m 지점에 금산사 주차장
2)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또는 김제시) - 712번 지방도로 - 원평 - 금산파출소 앞에서 좌회전 - (4.6km) - 금산사 입구
첫댓글 법우님의 사찰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군요. 나는 대충 보고 다녀서 그런지 못 본데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