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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한국사 |
세계사 |
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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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 건국 |
1009 |
강조의 정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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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
귀주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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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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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 제국 건국 |
1076 |
전시과개정, 관제 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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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 |
의천, 교정도감, 속장경 조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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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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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마쿠라 막부 성립 |
1097 |
주전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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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
해동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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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
윤관, 여진 정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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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
이자겸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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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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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
김부식, 삼국 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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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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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건국 |
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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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조 멸망 |
1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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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멸망 |
우선순위 |
중요사실 |
선정이유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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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우수성 |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목판에 글자를 모두 새겨 한판으로 찍어냈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가, 나무였기 때문에 닳기 쉬웠고 보관도 어려웠으며 한 판의 목판으로는 한 종류의 책만 찍어낼 수밖에 없어 불편했습니다. 금속활자 발명 이후에는 (금속)활자를 조합하여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되자, 여러 종류의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되었고 게다가 오래 보관할 수 있으며 목판보다 쉽게 닳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목판보다 적게 들어갔습니다. 고려는 금속활자 연구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로써 현재 남아 있는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인 ‘직지 심체 요절’을 발명했습니다. 이 직지 심체 요절은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보다 78년 앞섰습니다. 그만큼 고려의 인쇄술은 뛰어났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2 |
1135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이자겸의 난이 실패하고 난 후,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가 득세를 하게 된다. 이들은 금나라와의 사대관계 청산 및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기고 잃어버린 만주지역을 회복하자고 주장했고, 처음엔 인종이 이에 편승하여 서경에 궁전을 짓게 하고 사대관계 청산에 나선다. 하지만 곧 이들의 반대파인 개경파가 반격을 실시하고, 또한 서경에 새로 짓던 왕궁에 불이 나면서 인종도 수도이전에 대한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결국 묘청과 서경파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부식을 중심으로한 개경파가 관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됬다. 이 난은 보수 vs 진보, 사대 vs 자주 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자주성 회복 및 진보주의 의식을 가지고 시작된 운동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3 |
958 |
과거제도 |
과거는 관리들을 선발, 등용하던 국가 고시로서 과목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과거제의 역사를 보자면 법적으로는 고려 광종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제의 시초가 되는 신라 시대의 독서삼품과가 있는데, 이는 몇 개월 동안 진행되다가 진골귀족들의 반발에 의해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광종부터가 진정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고 봐야 한다. 이 광종 전까지는 관리를 능력보단 가문 위주로 뽑았지만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가문 중심의 관리 제도에서 능력중심의 관리 제도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4 |
1126 |
이자겸의 난 |
당시 고려는 지배 세력이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리는 문벌 귀족 사회 였다. 이자겸은 왕실과 중첩적인 혼인 관계를 맺어 세도를 부렸다. 이에 인종은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되로 난을 일으킨 것이 이자겸의 난이다. 이 난은 왕권이 많이 약화되었고 귀족층의 분열, 대립이 심화된 귀족문화의 극성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
5 |
993 |
서희의 외교담판 |
서희는 거란의 침략으로 고려가 위태로울 때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소손녕과의 담판은 옛 고구려 땅은 거란 소유라는 적장의 주장에 반박, 국명으로 보아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설득시켰고,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서희의 외교술은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방에게 명분을 주어 회유하는 식으로 적장을 유도했고 결국 거란의 1차 침입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서희가 소손녕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거란-송-거란의 관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소손녕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외교력으로 적을 물리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역사에 길이 빛날 외교력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
발표 주제: 문벌귀족 사회의 변천과정과 고려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주제 소개: 문벌귀족 사회의 변천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것과 고려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탐구하여 공동 삶의 원리를 이끌어 내보려고 한다.
1.고려 귀족 사회의 성립
광종의 개혁으로 호족 출신들의 관리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된 후, 광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인 최승로는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건의하는 등의 귀족 중심의 정치가 운영되어 나가는 사회를 지향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귀족들의 세력을 강화하는 개혁을 펼쳤다. 이리하여 고려는 신라 때 진골 중심의 왕족 정치를 했던 것과는 달리 이성 귀족들에 의한 정치를 해나갔다. 이성 귀족들은 자신 가문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 혼인 정책을 사용 하였다. 그들은 음서제도 영업전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 세습을 보장하였다.
2. 문벌 귀족들의 기반이 된 정치 제도
고려 시대 정치기구 중에 도당은 국정에 관한 회의 기관으로서 고려 귀족들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낭사와 어사대는 서경에 권한이 있어 왕권에 전제적 행사에 상당한 제약을 가했다. 또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를 설정하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했다. 과거제도와 음서제도는 문벌귀족의 가장 큰 기반이 되었다. 특히 음서제도 문음과 공음을 통해 그들을 특권을 유지하며 관리를 등용 했다. 그 외에도 귀족들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과전도 점점 공음전과 마찬가지로 세습되고 귀족들이 직접 수취하는 토지로 변하여 갔다.
3. 귀족 사회의 동요
귀족 사회가 더욱 발달 하면서 귀족 간의 세력 다툼은 점점 심해져 갔고 그러한 다툼은 몇 차례 걸친 반란의 형태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들 수 있다. 이자겸은 왕실의 외척 가문으로 세력을 확고히 한 후에 인종을 시해 하려고 까지 했으나 도리어 척준경에 쫓겨 귀양을 당하고 말았다. 묘청은 이자겸의 반란으로 인해 궁성이 불탄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주장했지만 반대파에 의해 진압 되었다.
4. 고려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는 염원과 불교의 교리를 정리하려는 의도로 제작 되었다. 대장경은 전란의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의 정확함과 글씨의 아름다움과 목판 제작의 정교함 등이 동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천태종의 성립은 교종과 선종이 양립하는 문화통합적인 불교계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청자는 아름다운 색깔과 그 형태 그리고 문양의 아름다움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5.공동 삶의 원리
이자겸의 난은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와의 자리까지 노렸던 과욕으로 인한 참사롯 이자겸의 난이 실패했다는 점으로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위치에서만 머물려 하지 않고 나아가려는 도전 정신은 아름답다고 판단 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도 좋지만 그것이 과욕이 된다면 해가 됨다는 점을 뽑아 낼 수 있다.이는 바로 더도 덜도 말고인 중용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댓글 * 이혜원 : 1) [발표자료] 6장 문벌귀족의 사회 ->> [발표자료] 문벌귀족 사회의 변천과정과 고려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제6장 문벌귀족의 사회>
수정하였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다루다 보니 주제와 소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발표가 된 듯합니다. 발표 초반부에 목표가 무엇이고 공동 삶의 원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정확히 짚어주고 발표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발표의 공동 삶의 원리를 이자겸의 난에서 찾았다면 이자겸의 난의 사회적 배경, 일어난 이유, 그 경과와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 등으로 6장을 설명할 수 있었으나,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룸으로써 무엇이 소제이고 주제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6장에 일어난 일들을 시간 순으로 알아본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 발표가 혜원 학우에게 발전이 될 수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문벌 귀족 사회의 변천 과정을 전반적으로 자세히 다루어준 점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하다 보니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습니다. 다루고 싶은 주제를 명확히 잡고 그 주제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뼈에도 계급이 있다는 골품에 따라 차별을 두었던 신라시대에 비하여 과거제도가 등장하면서 고려 시대에는 비교적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졌습니다. 이 같은 기회가 주어지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귀족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고려는 발전했습니다. 완벽히 신분제도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신라시대와 비교하면 고려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고려의 번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혜원 학우의 발표는 여러 내용들을 다루워서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루는 내용이 많다고 해서, 빈약하거나 질이 떨어지는 내용도 아니었던 점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민족과 역사 수업은 하나의 목표 혹은 목적을 가지고 학우들과 같이 토론하여 사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려시대는 우리 민족의 황금시대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수 많은 문화 유산들과 예술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혜원 학우가 언급했듯이 팔만대장경과 고려 청자가 대표적인 문화 유산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로 두 문화재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 사람들
은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기술과 의지 혹은 정신이 고려시대 선조들 보다 못하고, 우리의 뛰어난 문화재들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혜원 학우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다 보니 무엇을 주제로 전달하려고 하는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혜원 학우가 6장에서 찾은 공동 삶의 원리는 중용의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혜원 학우의 발표에서 중용의 자세를 찾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들을 거리를 제공해준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귀족 중심의 사회는 문벌과 혼인을 중시하고 음서제도와 같은 제도들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을 보면 환경이 어떠하냐에 따라 변화하는 방향이 달라짐을 느끼며 환경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묘청의 난 등을 살펴보면 시대를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히는 세력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며 고려가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웠기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혜원 학우의 발표 덕분에 고려 시대에 대해 넓은 지식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주제가 명확하지 않았던 점이 약간 아쉬웠지만, 함께 토론하며 요점을 찾아가는 과정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벌 귀족 사회가 정착되어 가는 시기인 고려 초기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신분 체제의 재편성, 정치체제의 정비 등이 그 예입니다. 저는 이때의 개혁들이 ‘우리 것을 더욱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국가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맞게 고쳐 사용한 것이 고려 시대의 주체성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는 진정한 우리 문화가 꽃 핀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중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팔만대장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동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면 단순히 몽고가 침입을 막고자 하는 기원을 담아 만들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발표와 토론을 통해서 나의 진짜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혜원 학우의 발표를 보면서 고려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려에서는 다른 시대 보다 유난히 독특한 문화재들이 많이 나왔는데, 대부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팔만대장경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글은 종이에 남겨 책으로 남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이하게 나무를 골라 그 위에 글을 새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훨씬 고생스러웠을 텐데도 고려인들은 고생을 감수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문화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려인들의 '독창성', '주체성'을 보았습니다. 또 미래가 불투명하더라도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줏대를 지켜서 하고자 하는 일을 꿋꿋이 이루어 나간다면 그 결과는 분명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일하는 과정에서 뜻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받아서 1학년인 지금, 주체성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바를 차근히 완성 시켜 나가야겠습니다.
6장에서 제가 중점적으로 봤던 것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문벌귀족 중심 사회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자겸과 묘청은 나름대로 좋은 의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욕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문벌귀족이 자신의 욕심을 챙기려다가 고려가 쇠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보고 연비어약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제 토론에서 다뤘던 것과 같이 중용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6장 수업을 통해 연비어약과 중용의 자세를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혜원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요? 혜원 학우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했으나 아쉽게도 내용 전달이 잘 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발표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혜원 학우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내용 전달을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주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든 발표였습니다. 주제가 확실히 전달되었다면 훨씬 기억에 남는 발표가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혜원 학우의 발표가 흥미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 시대 문벌 귀족 문화를 설명할 때는 발표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혜원 학우가 발표에 자신감만 붙는다면 그 어떤 학우들보다 발표를 잘
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발표 할 내용을 정리하는 능력으로 볼 때 많은 잠재력이 보이는 학우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정보화시대에는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혼란은 무엇을 찾으려는지를 확실히 정하는 것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요령이 혜원 학우에게 필요하였습니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그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될지 고려했더라면, 교재에 나오는 많은 사실 가운데서 혜원 학우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조리있게 전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박종철 : 글쓰기에서 퇴고는 기본입니다. 1) 너무많은 정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정보화시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이런 혼란을 방지하려면 무엇을 찾으려는지를 확실시 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혼란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혜원학우에게 필요했던 발표였습니다. 무엇을 전달하고싶은지, 전달하고싶은 정보를 어떻게하면 잘 전달될지를 고려했더라면 좀 더 나은 발표가 됬을거라고 생각합니다 ->>
수정하였습니다.
* 박종철 : 2) 너무많은 정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 너무 많은 정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3) 현재 정보화시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 합니다. ->> 현재 정보화시대에는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4) 이런 혼란을 방지하려면 무엇을 찾으려는지를 확실시 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혼란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 * 비문입니다. 5) 이런 행동이 혜원학우에게 필요한 자세였던 것 같습니다. ->> 이 요령이 혜원 학우에게 필요하였습니다.
6) 이러한 자세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싶은지, 전달하고싶은 정보를 어떻게하면 잘 전달될지를 고려했더라면 교제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사이에서 혜원학우가 전하고 싶은 정보를 조리있게 전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그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어떻게 하면 잘 전달될지 고려했더라면, 교재에 나오는 많은 사실 가운데서 혜원 학우가 전하고 싶은 내용을 조리있게 전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 과제 불이행 : 권혁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