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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몇 주 동안 마드리드에서 정치적 살인이 봇물 터지듯 자행되었는데도 2년 6개월 후 프랑코의 군대가 마드리드에 입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국민군을 환영하러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여전히 국민 진영 사람들이 마드리드에 많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상류계급과 중간계급 사람들은 대개 은신처에 몸을 숨기거나 노동자로 위장하고 마드리드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고, 아니면 외국 대사관에 몰려들어 피난처를 구했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1937년 국민 진영을 지지하는 국가의 대사관들은 라디오와 외교 행랑을 이용해 다른 쪽에 정보를 전해주는 등 스파이 활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몇 달 후 체카 한 곳은 가짜 대사관을 열어 피난처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하기도 했다. 무차별적 처형은 교도소에서 풀려난 범죄자들을 통제하고 마드리드 전역에서 군사 활동이 시작되고 나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마드리드에서 8월 22일과 23일 밤, 적군이 한 차례 공습을 퍼붓고, 바다호스 투우장에서 1,200명의 공화 진영 사람들이 국민 진영 사람들에게 학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최악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게다가 팔랑헤 소속 재소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총격을 퍼붓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자 이에 격분한 의용군과 시민들이 교도소로 달려갔다. 2천 명의 재소자 가운데 전직 장관 다수를 비롯하여 두드러진 우파 분자 30명 정도가 끌려 나와 총살당했다. 이때 죽은 사람중에는 팔랑헤주의자인 훌리오 루이스 데 알다, 페르난도 프리모 데 리베라, 국민당 창설자 호세 마리아 알비냐나, 전임 장관들인 라몬 알바레스 발데스, 마누엘 리코 아베요트, 호세 마르티네스 데 벨라스코, 멜키아데스 알바레스 등이 있었다. 이에 경악한 아사냐는 공화국 대통령직 사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살해된 페르난도 프리모 데 리베라. 팔랑헤당 창시자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형이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복수 대상 제1순위에 오른 사람들이 1920년대 노동조합 간부를 살해하려고 총잡이를 고용했던 사업가들과 총잡이들이었다. 이곳에서 탄압의 물결을 이끈 사람들은 반(反)파시즘 의용군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of Anti-Fascist Militias)가 결성한 조사위원회와 순찰대들이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파렴치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혼란을 틈타 사적인 이유로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反)파시즘 의용군중앙위원회의 핵심 인물인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불가피하게 과거 배신자들에게 폭넓은 원한 갚기를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살해 사건의 발단이 심지어 과거에 있었던 노동조합 간 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노동자총동맹 소속 항만 노동자들의 우두머리 데시데리오 트리야스(Desiderio Trillas)는 과거에 전국노동연합 소속 노동자들의 일거리 수주를 방해했던 일 때문에 아나키스트 조직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 피살 사건은 즉각 전국노동연합-아나키스트 연합 지도부에서 성토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산하 회원들에게 앞으로 개인적 원한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자는 즉각 처형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도부는 그 선언을 실행에 옮겼다. 7월 19일에 출옥한 건축 노동조합 지도자 호세프 가르데녜스(Josep Gardenyes), 음식 배달부 노조 우두머리 마누엘 페르난데스(Manuel Fernandez)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시절 스파이 활동을 해온 경찰에게 사적으로 복수했다는 이유로 아나키스트연합 동지들에게 처형되었다.
마누엘 페르난데즈
반란을 지지한 군 장교들은 체포되자마자 처형되었다. 한 의용군 부대는 감옥선(監獄船)으로 사용하던 우루과이호를 습격하여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그곳에 붙잡혀 있던 반란 지지자 대부분을 쏘아 죽였다.
감옥선 우르과이 호와 아르헨티나 호
폭력과 약탈의 많은 부분은 출옥한 기결수들의 책임으로 보인다. 진정한 아나키스트들은 지폐를 사회적 탐욕의 상징이라며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감옥에서 내보낸 사람들은 사회 혁명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몸에 밴 습관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런 변함 없는 범죄자들의 과도한 행위를 보고 전국노동연합-아나키스트연합은 “지하세계가 혁명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면서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조직의 문을 두드린 자는 거의 모두 받아들인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팔랑헤당원까지도 절대자유주의에 관심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국노동연합-아나키스트연합 무리에 섞이는 것으로 피난처를 찾았다. 좌파 쪽의 많은 사람들은 또한 치안대원들이 우파에 동조할 것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려고 자주 가장 극악무도한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지역적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공화 진영을 통틀어 최악의 폭력이 자행된 것은 개전 초기 처음 며칠 동안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빈곤 지역에서 더 많은 잔혹 행위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新)카스티야(Castilla la Nueva) 지역에서는 전쟁 기간 동안 2천 명 이상이 좌파에게 살해되었다. 톨레도에서는 7월 20일부터 31일 사이에만 400명이 살해되었으며, 시우다드레알에서는 8월과 9월에만 600여 명이 피살되었다.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도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져 론다에서는 희생자들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 죽이기도 했다(헤밍웨이는 이 사건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론다에서는 다른 도시나 마을과 마찬가지로 타 지역에서 온 자들이나 집단이 학살을 저질렀는데, 이것은 19세기 농민들이 자기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 교회를 방화한 방식과 유사한 현상이었다.
신(新)카스티야의 위치
말라가에서는 7월 27일 이전만 해도 폭력 행위가 그리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국민군 비행기가 시장에 폭탄을 떨어뜨려 여자들과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케이포 데 야노가 세비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은 스파이를 통해서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랑하자마자 일어난 이 공습은 크나큰 효과를 발휘했다. 스파이 혐의자들이 감옥에서 끌려나와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부자들이 사는 구역에서도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말라가에서는 7월 말부터 9월 말 사이에 팍스토트 장군 등 1,100여 명이 피살되었다. 같은 시기에 발렌시아와 알리칸테에서도 가공할 폭력이 분출되어 4,715명이 살해되었다.
공화 진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의 주요 특징은 반란 초기 며칠 동안 폭력 행위에 거의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는 점, 살인 행위가 집중적이고 신속했다는 점, 좌파나 공화 정부 지도부가 폭력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마드리드에서는 후에 한두 차례 더 학살 행위가 나타난다. 10월 말에 <스페인 기질의 옹호(Defensa de la Hispanidad)>를 쓴 라미로 데 마에스투와 전국 생디칼리스트 공격위원회의 창설자 라미로 레데스마 라모스(Ramiro Ledesma Ramos) 등 31명의 죄수가 라스벤타스 감옥에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11월에는 그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프랑코의 군대가 마드리드 문 앞까지 이르자 국민군이 죄수들을 석방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후방으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2천 명의 죄수가 총살되었다.
라미로 데 마에스투
라미로 레데스마 라모스. 원래는 아나키스트였지만 나중에 전향하여 팔랑헤당의 주요 인사가 된다.
라미로 레데스마 라모스가 총살당하는 순간
9월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라르고 카바예로의 ‘통합 정부’가 법과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인민 법정을 설치했는데 그것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개선책이었다. 그리고 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순찰대를 대체하고 순찰대원들은 전선으로 보냈다. 이런 조치로 약탈과 살인 건수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최악의 폭력이 자행되는 동안에도 모든 조직과 정당 지도자들은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아사냐 대통령이 과거 자신이 다녔던 에스코리알 내 대학의 수도승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애를 썼다. 내무장관 갈라르사는 호아킨 루이스 히메네즈(Joaquin Ruiz Jimenez)를 살려냈다. 라 파시오나리아도 수녀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 후안 네그린과 여러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카탈루냐에서는 콤파니스, 벤투라 카솔(Ventura Cassol), 프레데릭 에스코페트(Frederic Escofet) 등을 비롯하여 헤네랄리트의 여러 지도자들, 대학 학장 페레 보슈 힘페라(Pere Bosch Gimpera), 아나르코 생디칼리스 지도자 호안 페이로 등이 범죄 행위를 강도 높게 비난하고 위험에 빠진 수백 명의 사람들을 구해내거나 그들이 국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일이 비단 대도시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소도시와 마을에서도 시장, 교사,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국민군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조차 죄수들이 사형(私刑) 대상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호아킨 루이스 히메네즈. 스페인의 정치가이자 법학자. 그는 프랑코 (1951-1955)하에 교육부 장관을 지냈지만 1956 년부터 프랑코주의 국가에서 벗어나 꾸준히 민주주의로의 조용한 전환을 촉진하기 시작했으며 그는 온건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프레데릭 에스코페트.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감독관이었다.
페레 보휘 힘페라. 스페인 태생의 멕시코 고고학자이자 인류 학자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지역에서 적색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3만 8천여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마드리드와 카탈루냐에서 1936년 여름과 가을에 살해되었다. 공화 정부 지역에서는 최악의 후방 살상 사태가 휩쓸고 간 뒤에 대단히 복잡한 감정 상태가 나타났다. 공화 진영 내 다수는 그런 폭력 사태로 마음이 매우 불편해졌다. 아나키스트 지식인 페데리카 몬체니(Federica Montseny)는 ‘과거 정직한 사람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살인욕’을 비판했다. 라 파시오나리아는 인민들을 살리기 위해 여러 차례 나섰지만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폭력에 숙명론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이 파견한 대사는 그런 현상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런 시기에는 거리의 깡패들이 설치고 다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1937년 공화 진영이 선전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한 뒤로는 상대편인 국민 진영이 훨씬 더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근거가 미심쩍은 해명을 동원했다. 그러나 아마도 희생자 숫자보다 더 중용한 것은 서로 다른 폭력 양상일 것 같다.
페데리카 몬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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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혼란스러웠군요 살인에. 테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