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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년(1608, 선조41)에 나는 공산(公山)에서 부안(扶安)으로 돌아와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이 있어 북쪽으로 여행하여 서울에 이르러 형님을 찾아 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고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이 되었다. 2월 초하루에 유 태감(劉太監) 원접사(遠接使) 이공 상의(李公商毅)가 나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천거하니 주상께서 서장관을 바꾸어 종사관으로 이공을 따라 가라 명하셨다.
이달 15일 조정을 물러나 동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유숙 연숙(柳潚淵叔 연숙은 자)과 대역(大譯) 표헌(表憲)ㆍ정득(鄭得), 역관(譯官) 김성남(金聖男)ㆍ이언겸(李彦謙), 한리학관(漢吏學官) 이재영(李再榮), 사자관(寫字官) 송효남(宋孝男), 화원(畫員) 이징(李澄)이 동행하였다. 저녁에 벽제(碧蹄)에서 묵었다. 사(使.원접사)는 성묘하느라 오지 않았다.
16일 마산(馬山)에 도착하였다. 저물녘에야 사가 도착하였다.
18일 낮에 오목참(梧木站)에서 쉬고 저물녘에 개성에 도착하였다.
19일 눈을 무릅쓰고 금교(金郊)까지 가서 쉬고 어두워서야 평산부(平山府)에 들어갔다.
20일 안성참(安城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이 총수산(蔥秀山)으로 옮겨졌는데 객사(客舍)를 새로 지어 매우 깨끗하고 널찍하였다. 용천관(龍泉館)에서 묵었다.
21일 눈을 무릎쓰고 앞서 검수역(劍水驛)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사(使)가 뒤쫓아 왔다.
22일 봉산(鳳山)에 가서 묵었다.
23일 황주에 도착하였다.
24일 그대로 머물렀다.
25일 중화에 가서 묵었다.
26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성 위를 보니 단청한 누각이 보였다. 물어 보니 새로 지은 연광정(練光亭)이라 했다. 평양부(平壤府)에 들어가 서상(西廂)에서 묵었다. 나와 동갑인 이 방백(李方伯)이 찾아와 사신의 일행이 지나는 도내(道內)의 연변에서 접대할 계획을 완벽하게 하여 역참에 나오지 않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자 사(使)가 감영의 예방(禮房)을 가두라고 명령하니 방백은 불쾌하여 돌아갔다.
27일 그대로 머물렀다. 연광정에 올라갔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내가 여인(汝仁.이재영)에게, “이제야 비로소 패서객(浿西客)이 되었구나.” 하니, 여인은, “술 권할 여자가 없는 게 흠이구먼.” 하였다. 나는 눈을 흘겨주고 웃은 다음 돌아왔다.
28일 그대로 머물렀다. 방백을 찾아가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밤중에야 돌아왔다.
29일 그대로 머물렀다. 송효남(宋孝男)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나옹(懶翁) 화가의 무덤에 올리게 하니 여인이 시를 지어 애도하므로, 나도 이어 이 시에 화답하였다.
3월 1일 그대로 머물렀다. 사(使)를 모시고 정전(井田)과 기자정(箕子井)에 가 보았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오늘은 방백 어머님의 생신이다. 나는 당(堂)에 올라가 잔을 드리고 시 두 수를 지어 축하하니, 최동고(崔東皐.최립)가 이에 화답하였다.
3일 평양을 떠나 순안(順安)에서 묵었다.
4일 숙천(肅川)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도 전에 부민(府民) 상하 남녀가 길을 막으며 부사(府使) 윤삼빙(尹三聘)의 유임을 호소하였다. 사는 나와 연숙을 불러 백성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의 거류(去留)에 대해 계품(啓稟)할 것을 의논하였다.
5일 안주(安州)에 도착하였다.
6일 그대로 머물렀다.
7일 가산(嘉山)에 당도하였다.
8일 납청정(納淸亭)에서 잠깐 쉬고 저물녘에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9일 머물렀다.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ㆍ윤양(尹暘)과 서장관 최현(崔晛)이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으므로 사(使) 이하는 교외에 나가 마중하였다. 관(館)에 이르러 사는 서장관을 만나 보았다.
10일 동지사 일행과 이별하고 떠나 운흥(雲興)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선천(宣川)에 당도하였다. 홍로(洪老)가 와서 인사하였다.
11일 거련(車輦)에 도착하였다. 병사(兵使) 유형(柳珩)이 찾아와 인사하고 조용히 시를 구하였다. 여인(汝仁)이 칠언율(七言律) 30운(韻)을 지어 주었고 나도 이에 차운(次韻)하였다.
12일 양책(良策)에서 묵었다.
13일 그대로 머물렀다.
14일 소곶(所串)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이아(二衙)에서 서경(西坰)을 뵈었다. 사는 향소청(鄕所廳)에 숙소를 정하고 나는 관비(官婢) 돈이(頓伊)의 집에 정하였다. 저녁에 김숙도(金叔度)와 조이숙(趙怡叔)이 찾아왔다. 밤에 양자점(梁子漸)이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15일 부윤(府尹) 한공(韓公)을 상아(上衙)에서 뵈었다. 공은 내 형님의 친구이다. 그의 아들 언(琂)과 섭( )은 모두 나의 친구인지라 종일토록 술 마시고 읊었는데, 판관(判官) 남이흥(南以興)도 함께 있었다.
16일 이사(二使)가 취승정(聚勝亭)에서 만났다. 나와 연숙 그리고 김숙도ㆍ조이숙 두 종사관도 함께 참여하였다.
17일 어사(御史) 윤명익(尹鳴益)이 당도하여 찾아와 밤새도록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18일 대윤(大尹. 부윤 한공을 높여 가리킴)과 명익(鳴益)이 아헌(衙軒)에서 바둑을 두었다. 나도 가서 구경하고 밤중에야 돌아왔다.
19일 명익이 나의 숙소에 왔는데, 대윤이 바둑판을 들고와서 종일토록 바둑을 두었다. 저녁에 이숙과 자점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20일 윤명익이 떠났다.
21일 요동의 백패(白牌)는 웅 대행(熊大行)이 이미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였고, 유 태감(劉太監)도 북경(北京)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왔다.
22일 연위사(延慰使) 신현옹(申玄翁.신흠)이 도착하여 취승정에 숙소를 정하였으므로 가서 뵈었다.
23일 사를 모시고 서경(西坰)의 숙소에서 연위사와 만났다.
24일 도사연위사(道司延慰使) 홍휘세(洪輝世.홍서봉)가 도착하였다.
25일 웅사(熊使) 백패가 지나갔다.
26일 현옹과 학곡(鶴谷.홍서봉)이 나의 숙소에서 만났다. 자점도 함께 하였다.
27일 이숙과 함께 숙도의 병문안을 갔다.
28일 방백(方伯)이 도착하였다.
29일 방백이 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대부(大府.부윤을 가리킴)는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믐날이었으므로 뒷동산에 올라 홀로 앉아 송춘시(送春詩)를 지었다. 붉은 꽃잎은 비오듯이 지고, 그윽한 새소리는 영롱하게 들려오니 고향 생각에 서글펐다.
4월 1일 문례관(問禮官) 이성(李惺)이 도착하였다.
2일 현옹이 여러 번 찾아와 채호영(彩毫詠)과 춘영(春詠)의 시를 보자고 하였다. 아마 여인(汝仁)이 이야기한 것 같다. 마지 못해 내 놓으니 현옹이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가버렸다.
3일 서경이 취승정에서 이의(肄儀.사신을 맞는 의식을 연습함)를 행하므로 사가 참관하러 가므로 우리 두사람도 따라갔다.
4일 휘세ㆍ연숙ㆍ자성ㆍ이숙과 정주 목사(定州牧使) 윤차야(尹次野)와 영유(永柔) 홍효숙(洪孝淑)이 모두 내 숙소에 모여 종일토록 술마시고 시를 읊었다.
5일 차오산(車五山.차천로)의 숙소에서 휘세와 만났다. 자점도 함께 하였다.
6일 다시 이의(肄儀)를 거행하였다.
7일 웅사(熊使)가 진강(鎭江)에 도착하였다. 양행(兩行.유 태감 원접사와 웅 대행 원접사 일행)은 모든 관원을 대동하고 교외(郊外)에서 칙서를 맞는 예를 행하였다. 성으로 돌아오는데, 구경하는 남녀로 성곽이 꽉찰 지경이었다. 여인(汝仁)은 내 곁에 있다가 길가의 여자들 중에 부(府)의 창기(娼妓)들이 모두 나와 줄지어 꿇어앉아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여인이 헤어보니 내 방에 들어온 일이 있던 자가 12명이었다. 나는 시를 지어 자조(自嘲)하였다. 시의 끝 구절에,
남쪽 길가 열두 여인 / 十二金釵南陌上
일시에 고개 돌려 봄바람에 웃는다 / 一時回首笑春風
하였는데, 여인은 풍류(風流)는 끊어지지 않고 바로 이 사람에게 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8일 웅 대행이 강을 건넜다. 교외로 나가 마중하여 관(館)에 들어와 예를 행하고는 물러났다.
9일 웅사가 떠나고 서경 일행이 따라갔다. 나는 휘세와 오산의 숙소에 가서 그가 정인(情人)과 이별하는 것을 보았다. 자점도 몹시 슬퍼하면서 떠나갔다. 현옹이 상아(上衙)에 있어 휘세와 함께 가 뵈었다. 조금 뒤에 대윤(大尹)이 소곶(所串)에서 돌아와 간단히 한잔하고 헤어졌다.
10일 사는 이아(二衙)로 숙소를 옮겼고, 나도 향청(鄕廳)으로 옮겼다.
11일 인백(仁伯)이 창성(昌城)에서 찾아와 함께 머물렀다.
12일 인백을 데리고 연숙에게 가서 밤중까지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13일 요동 백패는 유사(劉使)가 지난 6일에 산해관을 통과하였다고 통보하였다.
14일 현옹이 찾아오셨다. 당신이 지은 내 문집의 서(序)를 내보였다. 그런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15일 휘세와 함께 현옹을 방문하였다. 조금 뒤 사가 찾아와 마침내 연숙과 대윤을 불러 술자리를 벌이고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16일 표당(表堂)을 요동으로 보내 유사(劉使)를 만나 원역(員役.수행원)의 수효를 줄이고 사정을 탐지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7일 밤중에 갑자기 여인의 숙소에 가 오랜 시간 이야기하다 돌아왔다.
18일 요동의 백패는 유사가 16일 요동에 도착하였다고 통보하였다. 백패는 진강(鎭江)에 도착하는 것을 맞이한 뒤에 다시 출발한다고 한다.
19일 문례관(問禮官) 오익(吳翊)이 도착하였다.
20일 방백이 돌아왔다.
21일 표헌이 돌아와, “중국의 사신은 밤낮없이 여정을 재촉하여 이미 요양(遼陽)에 도착하였고 18일 아침 아문(衙門)에 가서 만나려 하였으나 아문이 매우 깊고 은밀하여 바로 만날 수 없었고, 겨우 이름을 통하니 사(使)가 대청에 앉아 불러 들였는데, 재배(再拜)하고 말하려 하니, ‘오늘 진강으로 출발하여 24일에는 강을 건널 것이니 너는 물러가라’하고는 좌우에서 붙들어 내어 한마디도 못하였다.”
하고 또, 문하관(門下官) 전강(田康)과 소당(小璫.내시) 왕진(王進)이 제일 입김이 세어 헌이 찾아가 절하고, “결호(結好.좋은 의의를 맺자는 뜻)하자.” 하였더니, 전강이,
“원역(員役)에 대해서는 어른께서 이미 다 알고 스스로 줄였으니 네 말을 다시 들어볼 것이 없으며, 이번 길의 은폐(銀幣.은화)의 수효는 엄만(嚴萬) 때보다 한 등 더해야 하니 설득하려 애쓰지 말라.” 고 하였다 한다.
22일 이의(肄儀)를 행하였다.
23일 교외에 나가 예의를 행하였다. 오정 때쯤 유사(劉使)는 진강에 도착하고, 저물녘에 왕진과 전강이 먼저 관(館)에 도착하였다. 사(使)가 대문에서 맞아 술을 따르며 정성껏 접대하였다. 백패가 비로소 왔다. 원역은 소당(小璫) 3명, 상공(相公) 16명, 근수(跟隨) 12명, 조례(皁隷), 취수(吹手), 주역(廚役) 등 모두 1백 20여 명이었다.
24일 아침에 유사가 강을 건넜다. 일행은 교외에서 마중하였다. 관(館)에 들어가 의식 절차를 마치고 유사가 방에 들어가니 아문은 엄숙하고 조용하여 밖에 나와 번거롭게 구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청에 나와 앉아 원접사 이하의 예(禮)를 받고는 바로 들어가 버렸다. 연위사가 잔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25일 그대로 머물렀다. 전강이 표헌과 정득 두 대역(大譯)을 불러 은폐의 수를 의논하였는데, 너무나 많아 사(使)는 종일 힘껏 싸웠으나 겨우 그들이 말한 액수의 반을 감했다. 그러나 엄만이 왔을 때에 비하면 두 배나 되었다.
26일 비로소 잔치를 받았다. 유사는 우리들을 매우 공손하게 대하였고 하인들을 엄히 다스려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은폐의 일만 아니면야 허ㆍ위ㆍ황ㆍ왕(許魏黃王. 일찍이 왔다간 청백한 사신 네 사람을 가리킴)과 별로 차가 없을 것이다. 저물녘에 현옹은 먼저 떠났다.
27일 그대로 머물렀다. 유사가 용만관(龍灣館)과 영조(迎詔)의 시 두 수를 내주어 바로 판에 새겨 걸었다.
28일 그대로 머물렀다. 방백(方伯)은 먼저 떠났다.
29일 유사가 비로소 출발하였다. 소곶에서 점심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5월 1일 거련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林畔)에서 묵었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3일 운흥(雲興)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정주에 닿았다. 승지(承旨) 홍준(洪遵)이 현관례(見官禮)를 행하였다.
4일 그대로 머물렀다.
5일 연회를 받았다.
6일 그대로 머물렀다.
7일 납청정(納淸亭)에서 점심을 먹고 가산에서 묵었다. 유사가 지은 시에 대해 화답이 없다고 표헌에게 물어오기에, 황공하여 감히 화답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8일 공강정(拱江亭)에서 점심을 들고 저물녘에 안주에 도착하였다.
9일 연위사 오덕령(吳德齡)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사(使)가 이번 길에 화답하는 시 12편을 유사에게 드렸다. 유사는 이 시를 보고 나서 바로 데리고 온 감생(監生) 서명(徐明)을 불러 사에게 사례하게 하였다. 서명은 거인(擧人.향시에 합격한 사람)출신으로 소흥부(紹興府) 산음현(山陰縣) 사람인데, 뽑혀서 북경에 와 있는 것을 유사가 주청해서 데리고 왔다. 문서와 예의에 관한 일은 모두 그가 주관하였다. 저녁에 연회를 받았다.
10일 아침에 유사(劉使)는 사(使)와 우리 두 사람(허균과 유연숙)에게 예물을 보냈다. 저사(紵絲), 향선(香扇), 서책 등 물건이 매우 푸짐하였다. 저물녘에 숙녕에 당도하였다. 서명이 찾아와 말하기를, “북경에 있을 때 서자(庶子) 도망령(陶望齡)을 만났다. 그는 궁유(宮諭) 주지번(朱之蕃)을 만난 일이 있는데, 주(朱)는 ‘조선에 허모(許某.허균을 말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의 시는 천하에 으뜸간다.’고 하더라며, ‘네가 그 나라에 가면 꼭 그 시집을 구해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바로 그 사람이구료. 시집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바로 보따리에서 한 부를 꺼내주었다.
11일 순안에서 묵었다. 전강과 양유토(楊有土)는 나와 동갑이라고 찾아왔다. 서 상공(徐相公)도 뒤따라 와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양유토는 집이 북경 순성문(順成門) 안에 있으며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금의서창자사(錦衣西廠刺事)가 되었고 관은 공봉내정직(供奉內庭職)인데, 이것은 부천호(副千戶)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내가(內家.황제)를 뵌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황제께서 나오시지 않은 지 16년이나 되었으니 유사도 자주 뵙지는 못한다.” 고 하였다. 서 상공은, “《난설시집(蘭雪詩集)》을 유공(劉公)도 원하고 있고, 나도 한 부 청합니다.” 고 하였다. 나는 남은 한 권을 꺼내 유사에게 전하도록 하고 서 상공에게는 서울에 가서 주기로 하였다. 전강과 양유토도 청하므로 모두 서울 가서 주기로 하였다.
12일 순안을 출발하였다. 웅사(熊使)와 유사가 길에서 만나 인사하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서(徐)ㆍ전(田)ㆍ양(楊)이 예물을 보내왔는데, 모두 푸짐하였다. 나는 방백(方伯)에게 청하여 인삼과 종이와 활과 칼을 주어 답하였다.
13일 연위사 최관(崔瓘)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저녁에 전강과 양유토가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14일 사가 연회할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는 기자묘(箕子墓.태조문성왕묘)에 참배하고는 은(銀) 20냥을 내어 서윤(庶尹) 이홍주(李弘冑)에게 주면서 사우(祀宇)를 중수하라고 하였다.
15일 부자묘(夫子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고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또 은 20냥을 내어 중수에 보태게 하였다.
16일 비로소 연회를 받았다. 서ㆍ전ㆍ양이 나의 숙소로 와서 간단하게 한잔하고 갔다. 천추사(千秋使) 조공 존세(趙公存世)와 서장관 유혁(柳湙)이 와서 만났다.
17일 서경(西京.평양)을 떠나 중화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황주에 당도하였다. 전 상공(田相公)이 찾아왔었다.
18일 연위사 박이장(朴而章)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경함(李慶涵)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성절사(聖節使) 유공 몽인(柳公夢寅)과 서장관 김효경(金孝敬)이 도착하여 서로 만났다.
19일 연회를 받았다. 서울 집에서 종[奴]이 왔다. 내가 관과(館課)에 세 번 일등하여 품계가 올랐다 한다. 사는 문서를 올려 계속 대동하기를 청했다. 저녁에 서ㆍ전ㆍ양 삼공은 내가 승진하였다고 찾아와 축하하고 괘홍(掛紅)하였다. 나는 국상중이라고 괘홍은 사양하였다.
20일 봉산에서 묵었다.
21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용청에 도착하여 묵었다. 저녁에 유사가 옥권자(玉圈子) 1매(枚)와 옥잠(玉簪) 한 벌을 보내왔다. 저녁에 전 상공이 찾아 왔다.
22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평산에서 묵었다.
23일 낮에 오조천(吾助川)에서 쉬고 점심은 금교에서 먹고 저물녘에 송경(松京.개성)에 도착하였다.
24일 저녁에 양 상공(楊相公)이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조서개독례(詔書開讀禮)에 대해 은근히 물어 오기에 나는 예전에는 폐백(幣帛)이 없었다고 대답하니, 양 상공은, “중국왕부(中國王府)의 예(例)로는 개독례가 있는데 은 수천 냥에 해당한다.”
고 하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25일 연위사 민몽룡(閔夢龍), 유수(留守) 한효순(韓孝純), 감사(監司) 김신원(金信元)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유사(劉使)는 개독례에 대해 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사(使)는 관리 여러 명을 모아 놓고 연구해 보았으나 하는 수 없이 유연숙을 서울로 먼저 보내 임금의 뜻을 받아 오게 하였다.
26일 유사의 생일이라고 임금께서는 문안사(問安使) 여유길(呂裕吉)을 보내고 명삼(明蔘) 백 근과 은 천 냥,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을 이에 어울릴 만큼 보내셨다. 유사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에 서 상공이 내 숙소로 와서 《백락천집(白樂天集)》을 주었다.
28일 유사는 임금께 답례를 푸짐하게 하였다. 망단(蟒緞), 서금(瑞錦), 소옥대(素玉帶), 옥배(玉盃), 아각선인(牙刻仙人) 등 이었다. 전 상공의 말로는 3백 금(金)에 해당하는 값어치라 한다.
27일 연숙이 돌아왔다. 저녁에 전(田)과 양(楊)이 내 숙소에 와서 즐겁게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29일 유사가 연회를 받기로 하였다. 개독례(開讀禮)에 3천 금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믐날 새벽에 출발하여 오목(梧木)에서 잠깐 쉬고 점심은 마산에서 먹고 저물녘에 벽제에 도착하였다.
6월 1일 좌의정 오성(鰲城.이항복)과 연위사 조정(趙挺) 및 도승지 김상용(金尙容)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낮에 연회를 받았다.
2일 새벽에 교외에 이르자 나는 복명(復命)하고 조서를 받들고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가서 조서를 선포하였다. 새로 지은 궁궐은 넓었는데, 건물과 섬돌[階陛]이 숙연하여 절도가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법가(法駕.임금이 거둥 때 쓰는 수레)가 늘어서고 헌악(軒樂)이 차례로 연주되며 백관의 환패(環珮)는 쟁그렁거리는 것이 태평스럽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먼저 임금[先朝]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승진을 하였지만 아문(衙門)에 문안하지 못했는데, 유사는 양 상공을 보내 축하하고 홍저사(紅紵絲), 녹화주(綠花紬), 홍리(紅履), 소화은대(素花銀帶), 향옥배(香玉盃)와 사반불(砂磻佛) 1개, 《금강경(金剛經)》 1부, 전지(牋紙) 백 장을 보내왔다. 나는 상께 아뢰고 찾아가 사례할 것을 청하였더니 상께서 허락하셨다. 곧 관(館)으로 가서 보내준 것에 대하여 사례하고 돌아왔다. 유사(劉使)는 문서를 상께 올려 일행에게 상관(賞官.상으로 관직을 올려줌)할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는 사(使)를 한 자급(資級)을 올려 정헌(正憲)에 제수하고 나는 실직(實職)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하고, 연숙은 부응교(副應敎)에 승진 제수하고 표당(表堂.표헌)은 실직에 붙이고, 정당(鄭堂)과 이언겸은 각각 한 급이 더해졌다. 사는 이조 정랑(吏曹正郞) 정광성(鄭廣成)을 내 후임으로 하고 정원(政院)에서는 나를 도사전위사(都司餞慰使)로 임명하였다. 사는 즉시 계(啓)를 올려 일로(一路)가 번거롭고 시끄러우니 종사관 한 명을 줄이고 허모(허균)와 동행할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정 이조(鄭吏曹.정광성을 가리킴)는 가지 않았다.
22일 유사가 출발하여 귀국 길에 올랐다. 나도 뒤따라 갔다. 저녁에 벽제에서 묵었다.
23일 연회를 받고, 마산에서 묵었다.
24일 개성에 도착하여 연회를 받았다. 여기서부터 일행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자신이 데리고 온 관원은 모두 검정옷에 각대(角帶)를 하고 연회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게 하였다.
25일 금교와 오조천을 지나 평산에서 묵었다.
26일 안성을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7일 검수를 지나 봉산에 도착하였다.
28일 황주에 이르러 연회를 받았다. 서(徐)ㆍ전(田)ㆍ양(楊) 삼공(三公)이 내 숙소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이야기 끝에 나는 중국 만력(萬曆.명나라 신종의 연호)의 재상 중에 누가 좋고 나쁜지를 물었다. 양은, “장강릉(張江陵)은 권리를 좋아하긴 하나 그 재능이 아주 크다. 그가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백관들은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법을 준수하였고, 이웃 오랑캐[四夷]들이 복종하여 천하가 번영하였다. 그 뒤 장나(張羅)와 신시행(申時行)은 총애를 받고 권력을 잡았다고는 하나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마자강(馬自剛)은 강직하고 허국(許國)은 청렴하고 신중한 사람이고 왕석작(王錫爵)은 엄하고 의연한 사람이고 왕가병(王家屛)과 장위(張位)는 모두 괜찮은 사람인데, 조지고(趙志皐)는 탐욕스럽다는 평이 있으며 심일관(沈一貫)은 녹(祿)을 지키느라 위에 아첨하니 쓸 만하지 못하다. 현재의 주갱(朱賡)도 올바른 사람이다. 이정기(李廷機)는 꼼꼼하기만 했지 대절(大節)이 없고 섭상고(葉向高)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 밖에는 모두 평범하다.” 고 하였다. 내가 또 부원대신(部院大臣)에 대해 물으니 서(徐)와 양(楊)이,
“양박(楊博)ㆍ장학안(張學顔)ㆍ오태(吳兌) 세 사람은 초기에 명망이 있었고, 근년에는 이세달(李世達)과 손비양(孫丕揚), 박(博.양박을 가리킴)의 아들 준민(俊民) 등이 좀 말할 만하다. 증성오(曾省吾)란 사람은 재략(才略)이 좀 있긴 하나 그가 장강릉(張江陵)에게 붙었기 때문에 남들이 멸시한다. 양외(楊巍)는 젊어서는 명망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고 말하고는, 다시,
“치사(致仕)한 예부 상서(禮部尙書) 육수성(陸樹聲)은 금년에 백 살인데 성명(性命)을 다스리는 학문을 하여 외모가 아직도 노쇠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문장은 누가 제일이냐고 물었더니 서는,
“태창(太倉.왕세정)과 신안(新安.이반룡)이 가버린 뒤에 나라 안에 문장 맡을 사람이 없다. 적수(赤水) 도융(屠隆)과 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이 동남쪽에서 이름을 날리고 이 밖에 낭중(郞中) 사조제(謝肇淛)와 세마(洗馬) 구대상(區大相) 및 편수(編修) 고기원(顧起元)이 그 뒤로 우수한 자이다.” 하고서는, 또
“전에 태사(太史) 황휘(黃輝)를 따라 안남(安南.인도지나 방면)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 나라에도 글을 아는 사람이 매우 많으나 대개가 천박하여 귀국(貴國)의 시처럼 돈후하고 전려(典麗)한 데는 미치지를 못한다. 또한 인심이 사나워 도처에서 불화가 생기므로 사신들은 번번이 병사를 포진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 나라 빈상(儐相.빈객을 안내하는 벼슬아치)도 모두 엄하게 경계하며 대하였다. 풍토(風土)가 매우 나빠 장독(瘴毒.산천의 독기)에 걸리면 번번이 구토와 설사를 하였다. 뱀과 벌레가 많아 중국과 비슷한 귀국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준 선물은 모두 금주(金珠), 서향(犀香), 취우(翠羽), 명박(明珀) 등이었다. 귀국은 보배는 없으나 인재가 바로 보배이다.” 고 하니, 전 상공(田相公)이 웃으면서,
“명삼(明蔘)이 남쪽 나라에 가면, 한쪽으로도 큰 구슬 하나를 바꿀 터인데 어떻게 보배가 전연 없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은 또, “젊었을 때 도독(都督) 뇌여림(雷汝霖)을 따라 서천국(西天國.인도)에 갔는데, 가락관(嘉峈關)에서 출발하여 서번(西番)관 토로번(土魯番)을 지나 곤륜산(崑崙山) 밑으로 해서 갔다. 그 산을 바라보니 높고 크기가 마치 하늘의 반은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천국에 도착하니 장안(長安)에서 1만 8천 리였다. 5개월이 걸려서야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의 서울은 사위성(舍衛城)이었다. 그 나라 왕은 백반(白飯.석가모니의 숙부)의 자손이며 고관들은 모두 승복(僧服)을 입고 있었다. 한문자(漢文字)를 쓰지 않으며 기후는 중국과 비슷하나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금이나 옥, 구슬 등이 많으며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는 참으로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곳 사람들도 인삼을 귀하게 여겨 삼 한 냥 값이 금 한 냥이었다. 주는 선물이 매우 풍성하였는데, 그곳 왕을 세우고 2개월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나는 이로 인해 집안을 일으켰는데 뇌 도독은 금과 구슬들을 많이 받았다고 탄핵을 받아 선물받는 것을 몰수하라는 왕명이 있어 황금 3천 냥과 명주(明珠) 열 말, 화완포(火浣布) 백 필을 관(官)에 납부 하였으나 뇌 도독의 집에서 미리 딴 곳에 숨겨 놓은 것이 또한 금 3천 냥과 명주 스무 말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을 빼았겼다 해도 북경의 부자가 되었다.” 고 하였고, 양은,
“이러하기 때문에 내관(內官)도 서천(西天)의 봉사(奉使)로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계묘년에 그 나라 세자(世子)를 책봉하는데 초리태감(初鯉太監)은 3만 금을 바치고 가서 몇 십만 금을 얻어 가지고 왔다.” 고 말하였다. 서는, “이번에 유사가 귀국에서 얻은 것도 7만 금이니 귀국 백성의 고혈(膏血)이 말랐을 것이다.” 고 하였다.
29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7월 1일 비가 내려 머물렀다. 나는 순안으로 먼저 떠났다.
2일 순안에서 묵었다. 나는 먼저 숙천으로 떠났다
3일 숙천에서 묵었다. 저녁에 연숙과 함께 세 상공[三相公]의 숙소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전과 양은 한 처소에 있어 술자리를 마련해 주고 물러났다. 서의 숙소는 별관이므로 가서 술 한잔 나누기를 청하였더니 기일(忌日)이라고 사양하였다.
4일 안주에서 묵었다.
5일 가산에서 묵었다.
6일 정주에 도착하였다. 나는 먼저 운흥에 가서 묵었다.
7일 먼저 임반에 도착하였다. 저물녘에 유사(劉使)가 도착하였다.
8일 거련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 이르렀다. 나는 먼저 소곶에 가서 묵었다.
9일 유사가 의주에 도착하였다. 전위사(餞慰使) 이필영(李必榮)ㆍ정사신(鄭思愼)과 만나고 돈사(頓舍)에 숙소를 정하였다. 평사(評事) 한겸(韓謙)이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10일 연회를 받았다.
11일 유사는 사(使), 방백(方伯), 부윤(府尹)과 우리 두 사람(허균과 유연숙)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매우 풍성하고 정성스러웠다. 저단(紵段), 향라(香羅) 등을 차등 있게 선물하였다. 연회가 파한 뒤에 사 이하는 그 자리에 남아 16상공들을 위해 송별연 할 것을 청하였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서 상공이 나와 이별하러 찾아와 즐겁게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12일 새벽녘에 전과 양이 나의 숙소로 찾아와 악수를 한 다음 이별하고 돌아갔다. 일찍 강을 건너 역관 장사원(張士元)과 의주 역학(義州譯學) 박인희(朴燐禧)를 시켜 도사(都司) 왕급(王汲)에게 연회를 마련하고 기다리게 하였더니 유사는 시간이 없어 참석할 수 없다고 연회를 중지할 것을 청하므로 곧 의주 판관 남이흥(南以興)을 시켜 은(銀)으로 환산하여 2냥을 보내었다.
중강(中江)으로 돌아오니 전(田)과 양(楊)은 먼저 배에 올라 있었다.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좀 있다 서(徐)도 왔다. 이별할 때에 서는 눈물을 닦으며 괴롭게 하직하고 전과 양도 섭섭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오정 때쯤 연청(宴廳)에 도착하였더니 유사도 도착하였다. 술을 세 순배 돌리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을 불러들여 각각 술 한 순배씩 돌리고는 일어나 수레에 타고서 악수를 하고 이별하는데 매우 정중하고 다정하게 하고 떠났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13일 보고서를 올렸다.
14일 비가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15일 연숙과 함께 먼저 출발하였다. 사는 유사가 어전에 드리는 예물첩(禮物帖)을 나에게 주며 궐 안에 갖다드리게 하였다. 소곶을 경유하여 양책에서 묵었다.
16일 거련과 임반을 지나 운흥에서 묵었다.
17일 정주를 지나 가산에서 묵었다.
18일 안주에 도착하였다. 연숙은 취하여 그대로 머물렀고 나는 먼저 숙녕에 도착하여 주수(主倅) 윤신수(尹莘叟)와 금향정(錦香亭)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어도 연숙은 오지 않았다.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여 연광정(練光亭)에서 묵었다. 한밤중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결은 금빛으로 출렁거리는데, 난간에 기대어 서니 허전하여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20일 배 위에서 방백과 작별하고 중화를 경유하여 황주에서 묵었다.
21일 봉산과 검수를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2일 안성과 평산을 경유하여 금교에서 묵었다.
23일 개성을 지나서 마산에서 묵었다.
24일 벽제를 지나 서울에 다다라서 서쪽 성문 밖 민간 집에서 묵었다.
25일 아침 일찍 복명하고 유사가 어전에 드리는 예물을 정원(政院)에 전달하였다. 예방(禮房) 유공량(柳公亮)이 일일이 수효를 점검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물러나와 형님을 뵈었다.
이번 길은 마침 국상(國喪) 중이어서 풍악을 금하는 때라 연도(沿道)의 주군(州郡)마다 환영하고 전송하며 오래 지체하는 일이 없었고 풍악과 여색[聲色]으로 귀를 어지럽히거나 정을 나누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관(旅館)은 한가하고 조용하여 한묵(翰墨)만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지은 시가 4백여 수나 되었으니 참으로 많다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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