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깨물다/이운룡
불 먹은 마음, 시퍼런 일손 놓고 나니
남은 날이 시들시들 한가롭다
신문지에 멸치를 수북이 풀어놓고
대가리, 똥을 밝아내는 아내 곁에서
나도 대가리, 똥을 밝아내 준다
바다가 이 쪼깐 놈들을 다 키워냈나 보다
대가리→꼬리지느러미가 일직선이 아니고
늘어져 굳어버린 S자 몸통이 태반이다
끓는 가마솥, 몸 뒤틀어 폴짝 뛰어나오려다
목숨의 한순간이 망가진 놈들
짓이겨진 대가리, 그것도 없고 배가 터진
눈 똥그랗고, 등허리 구부정한
애간장이 녹아 시커멓게 탄
아직도 물렁한 똥이라니!
한 마리 잘근잘근 깨무니
무한 바다가 통째로 바숴진다
목구멍 속을 파고 들어온 밀물의 짜디짠 입질
나의 뱃속이 뜨뜻해진다
헤엄치는 어린 바다를 깨물었으니 나는
한순간 지느러미를 굽이치다
굳어진 몸 S자 멸치가 될까 보다.
―『문학마당』 2008년 가을호
* 일선에서 은퇴한 화자는 지금 “아내 곁에서” 바다가 키워낸 멸치의 대가리와 똥을 밝아내고 있다. “굳어버린” 멸치는 “S자 몸통이 태반이다”. 이들 멸치는 “끓는 가마솥”에서 “몸 뒤틀”며 “뛰어나오려다”가 “목숨의 한순간이 망가진” 놈들이다. 그리하여 “눈 똥그랗고, 등허리 구부정한” 놈들이 멸치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이런 멸치를 “잘근잘근 깨무니/무한 바다가 통째로 바숴진다”고 표현한다. 그가 멸치를 바다로 확장해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때의 멸치는 바다의 제유라고 할 수도 있다.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비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멸치를 깨무는 일은 바다를 깨무는 일이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매조지에 이르러 “어린 바다”, 즉 멸치와 이 시의 화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이은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