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길 한강
(천호동∼미사리, 2017년2월15일)
瓦也 정유순
입춘이 지난 지 열흘이 훌쩍 지나갔건만 봄소식은 어디 쯤 오시는지 영하의 날씨만 계속된다. 오늘의 트레킹은 천호역에서 하남시 미사리까지다. 천호동이라는 지명은 “풍수지리설에 민가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양 4대문에서는 동남쪽의 외진 곳으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曲橋里)이었으나 1963년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천호동으로 정식명칭이 되었다. 천호재래시장 앞으로 난 구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굽은다리 (곡교리 曲橋里)>라는 지명이 있고, 지하철 5호선 굽은다리역이 있다.
<천호역>
같은 서울이라도 1970년 초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서 천호동으로 전화를 걸려면 시외전화를 해야 했던 곳이다. 그리고 지금은 남한산성 가는 길이 사통팔달이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천호동까지 와서 시외버스를 타고 갔어야 했다. 이렇게 도심에서 떨어져 여러 가지 외진 대접을 받아왔던 천호동이 지금은 서울 동부의 중심지가 되어 별도의 천호동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천호대교>
천호역에서 나와 천호대교 쪽으로 하여 한강공원광나루지구로 내려온다. 머리 위로는 1936년 10월에 개통된 광진교가 지나간다. 광진교는 나룻배 대신 천호동과 서울을 연결해 준 최초의 다리이다. 광진교가 개통되어 번잡한 거리가 되었던 천호동사거리는 천호대교가 1976년 7월에 개통되어 지금의 천호역 쪽으로 옮겨지고 슬그머니 구 천호사거리가 되었다.
<광진교>
옛날에는 여름에 피서를 가지 못하는 서울시민을 위해 3곳의 수영장을 개방하였다.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의 백사장, 뚝섬한강공원 이전의 뚝섬백사장 그리고 한강공원광나루지구 이전의 광나루수영장이다. 빛깔 고운 모래가 어느 해수욕장 보다 넓게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수영장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1980년도 잠실지역에 살 때 가족과 함께 광나루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광나루체육시설-옛 수영장자리로 추정>
며칠 간 영하의 날씨 덕인지 천호대교 밑 한강은 꽁꽁 얼었고, 강 건너 아차산은 망우리 고개 쪽으로 몸을 길게 누웠다. 양쪽 강안(江岸)으로 난 도로에는 일상이 바쁜 차량들이 꼬리를 문다. 옛 광나루백사장 터에는 축구장, 농구장, 테니스장 등 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각종 시설이 갖춰진 수영장도 준비되어 있다.
<한강하류-광나루>
<한강상류-광나루>
암사생태공원도 봄소식을 미리 받았는지 갯버들 가지마다 푸른색이 희미하게 올라온다. 우거진 숲속에는 겨울의 진객 철새들이 진을 치고 여유롭게 놀 것도 같은데, AI(조류인플루엔자)가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출입문을 굳게 닫아 놓아 눈길도 맞추지 못했다. AI도 자연을 무시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암사생태공원>
<암사생태공원>
강변도로 쪽 멀리 암사동선사주거지 푯말이 보인다. 둘러보고 싶은 곳이지만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 암사동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의 범람으로 유물들이 지상으로 드러나면서 많은 석기와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나왔는데, 일제강점기 때라 많은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빼내고 조사내용은 간단하게 “시굴했다”는 내용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암사동선사주거지 간판>
해방 후 지금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유물과 유적들을 여러 번 발굴해 왔지만, 팔당댐에서 한남대교에 이르는 한강변 좌우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던 그 많던 유물과 유적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 사라지고 암사동선사유적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한번 되새겨 볼 일이다.
<선사시대 생활모습-네이버캡쳐>
<빗살무늬토기-네이버캡쳐>
잠깐 딴 생각을 하고 걷다가 2015년 6월에 완공된 구리암사대교와 만난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과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사이를 연결하는 이 다리는 한강에 설치된 31번 째 교량이다. 총 길이 2,740m로 처음에는 암사대교로 다리이름을 정했으나 경기도 구리시에서 구리대교로 해달라고 요구하여 마찰을 빚다가 서울시지명위원회에서 구리암사대교로 조정(2008년 8월)하여 명명했다고 한다.
<구리암사대교>
이 다리를 지나 도로변으로 나오면 암사수원지 깔딱고개가 나온다.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에는 별로 힘이 들지 않는 곳이나,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무척 힘이 들어 자전거라이더들이 붙인 이름 같다. 그 언덕 마루에는 구암정(龜巖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곳은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된 구암서원이 있던 자리를 1998년 암사취수장을 건설하면서 바위절터 주변을 공원화하고 역사적 유지(遺址)로 보존코자 지었다고 한다.
<구암정>
그리고 이곳은 신라시대의 아홉 개의 사찰이 있어 구암사(九岩寺)라 하였고, 그중 속칭 바위절 또는 암사로 불리는 백중사가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와 암사동(岩寺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암사수원지 옆에는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는 바위절터”라는 표지석만 외롭게 서있다.
<바위절 터>
하루에 132만 톤을 취수하는 암사취수장 앞에는 아리수수돗물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암사정수센터도 봄을 기다린다. 깔딱고개를 넘어오면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올림픽도로와 만나는 강동대교가 무척 바쁘게 자동차들이 움직인다. 1991년 12월에 준공된 강동대교는 서울 강동구 강일동과 구리시 토평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길이는 1,126m이다. 그리고 강 건너 강동대교 가까운 곳에는 왕숙천(王宿川)이 합류하는 지점 위로 수석교가 보이고 멀리 구리시전망대가 아른거린다.
<암사아리수정수센터>
<강동대교>
<왕숙천 합류지점과 수석교>
다시 한강 둔치로 내려와 상류로 올라가면 가래여울마을이 나온다. 가래여울마을은 가래나무가 많고 마을 앞으로 한강의 여울이 있다고 하여 가래나무 추(楸)자와 여울 탄(灘)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추탄(楸灘)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곳은 서울 강동의 맨 끝에 있는 마을로 남평 문 씨의 집성촌으로 서울에서 몇 안 되는 자연마을이다. 그러나 재개발의 물결에 휩쓸려 언제 집성촌마을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가래여울전통마을>
가래여울마을에서 하남시 미사리구간은 수초가 발달되어 봄이면 물고기들의 산란장으로는 최적의 장소이다. 갯버들을 위시하여 각종 수생식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많은 동물들에게 쉼터와 보금자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시박이 들어와 다른 생명들의 숨구멍을 막아버린다. 가시박은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식물로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생태계의 폭군이 되었다.
<가시박 넝쿨>
하남시로 접어들자 미사대교가 보인다. 미사대교는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과 남양주시 삼패동을 잇는 1,530m의 다리로 2009년 7월에 개통된 한강의 28번 째 다리이며, 서울∼양양고속도로의 첫 구간이다. 교량 이름을 놓고 남양주시(구리대교 또는 덕소대교)와 하남시(미사대교)가 뜨거운 줄다리기를 하다가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시설물명선정위원회에서 3차에 걸친 회의 끝에 투표로 최종확정하였다.
<미사대교>
강 건너 남양주시 덕소에는 아파트가 강변을 따라 숲을 이루는데, 이곳 미사리는 강변을 따라 각종 체육시설이 들어섰고, 일부는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역사적 유물을 밝혀내느라 바쁜 것 같다. 미사리는 모래가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강 건너 덕소에서 배를 타고 왔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88올림픽이 개최되고 조정경기장이 생기면서 유명세를 탔으며, 강변에 제방을 쌓고 갑자기 급한 개발로 그 곱던 모래도 사라지고 역사적 유물들도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덕소의 아파트 숲>
<산책로로 정비된 한강-미사리>
그리고 하남시로 들어서자 길 이름도 <하남위례길>로 바뀐다. 아마도 하남위례성에서 따온 이름 같다. 백제의 초기 왕성(王城)으로 위례(慰禮)는 우리말 울타리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 한다. 하여튼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과 지금의 하남시 일대와 남한산성을 묶어서 한성백제의 터전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미사리유물 유적지 표지석>
<하남위례길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