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또 다른 저쪽 이야기 2023-9-5
제목이 죽음이라고 하면 좀 딱딱할 것 같애 이렇게 붙여 보았다.
그렇다. 죽음은 요즈음 주변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내 나이가 충분히 그 생각을 해야하는 때가 되어서이지 않을까?
나는 죽는다는 말을 동사로 쓸때와 명사로 쓸때 그 뜻하는 바가 달라진다.
몇달 전 서울에 사는, 그러나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내던 친구가 죽었다.
슬프고 아픈 마음은 이루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했던 말들이 후회되기도 했고,
문득문득 생각나는 그친구와 연계되는 일들이 가슴을 후벼파기도한다.
그러던 중 얼마전 서울에 있는 막내동생이 친한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힘들어 하는 연락이 왔었다. 위로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동생에게 해준 이야기는, "나도 네 나이때 동창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 간 적이 있어
그친구는 의식이 없었고, 친구남편 말씀이 그친구는 뇌사상태라고 하면서,
아들이오면 결정을 해게 될 것이라고 했어.
의식은 없어도 얼굴도 조금씩 찡그리기도 하고, TUBE는 많이 달고 있지만,
숨도 쉬고… 가족이 let go 시키기는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눈발이 가늘게 흩날리는 RT684를 운전하고 오면서 자꾸 눈물이 났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때는 그 애절함이 말로 할 수 없었지만,
친구의 죽음은 가슴만 먹먹한 것이 나의 일로 다가와 차창에 부딪쳐 녹아 내리는
눈발 같이 스러져 갈 나의 삶이 생각 되더라는 이야기를."
그 친구의 죽음은 벌써 십여년이 지났고, 그후로도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 끼리도 이제는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들을 한다.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 Medical proxy는 준비했는가?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afford 할 수 있는가?
자잘하게는 쓸데 없는 살림사리는 어떻게정리할까?
남편과 늘 같이 지내다 한사람이 떠나면 어떻게 할까?......
여기까지는 죽음의 동사형 idea이다.
작년 9월 아주 많이 원하던 Greek & Macedonia 여행을 앞두고, 몸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여행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다 urgent care로 갔더니
바로 ambulance 를 불러 병원 emergency 로 보내져, 처치를 받고 며칠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위험했었다고 했다. 천하에 날벼락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는 것이 무서웠다.
죽음은 어느순간에 찾아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dear god’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신의 존재도 잘 모르겠다 이다.
내가 보는 의사중 한분이 말씀하길 “요즈음은 예전같이 쉽게 죽기도 힘들어요” 하던 말이 생각나고….
그리고 이시점에선 죽음의 정의는? 그러면 죽은후의 존재는?
급하면 하느님을 찾으면서…..
요즈음 공부하고 있는 Wagner의 “방황하는 네델란드인” 이라는 opera 생각이 났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신의 저주로 목적 없이 바다위를 영원히 떠돌게 되어 있고,
단지 7년에 한번씩 육지에 내릴 수 있으며, 그때 참 사랑하는 여인을 얻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저주.
그리고 그유령선의 선장 네델란드 인은 사랑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 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바다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구원은 살아남지 않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우리가 흔히 죽었다는 말을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하늘은 죽은자들이 가는 곳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