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일본의 노벨 문학상 후보 무라까미 하루끼가 12번을 읽었다는 책입니다
"기나긴 이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쓸쓸한 삶을 살면서도 묘한 웃음이 담긴 독백을 담담하게 읊어대는 주인공 탐정 필립 말로우가 나옵니다. 이야기는 도입부에서 필립 말로우가 우연히 우울증 기미가 있는 어느 돈많은 젊은이를 도와주면서 시작합니다. 이 젊은이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리기 때문에, 필립 말로우도 같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자신도 스스로 사건을 조사합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습니다만, 이 사건은 뾰족한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곧 더 중요한 사건이 나옵니다. 필립 말로우에게 출판업자가 사건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싸구려 소설로 성공한 알콜 중독자 인기작가의 주변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좀 더 치명적인 이 작가 주변 사람들의 사연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혼자 도시 한구석의 좀 빈한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필립 말로우가 이 두가지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사건과 관련한 각종 명단을 뒤지고, 명단에 나온 주소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사건에 대해서 묻고, 사람들을 쫓고 그 사람들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옛날 느와르 영화에 자주나오는 악당들,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사람들, 위험해보이지만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흘러넘치는 필립 말로우 고유의 현란한 독백입니다. 이 책에는 "진부한 비유법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라는 각오라도 한 것인지, 기이한 비유, 독특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계속 계속 한 페이지에도 수십개씩 나오는듯 합니다. 이런류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봐도 확실히 풍부한 편입니다. 지금 책 아무페이지나 펼쳐 보겠습니다. "문은 녹색이 감도는 잿빛으로 칠해져 있었고, 새 칼날처럼 선명한 금속제 글자가 붙어 있었다. '칸 협회 회장 제랄드 C. 칸'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입구'."
그리고, 그런 것들에는 대부분 쓸쓸한 유머 감각이 서려 있습니다.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는 사건들 사이에서 이런 묘사들은 웃음을 짓게하고, 계속 책을 읽어가는 재미를 줍니다. 그런가하면, 그런 특이한 비유법 속에서 주인공 필립 말로우의 독특한 시각과 취향,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 이를 통해서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회군상 여러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잘 포착되고 있습니다.
"기나긴 이별"에는 이렇게 현란한 수사법이 난무하면서도, 대부분의 묘사는 이야기 속에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간혹 소설에는 오직 작가가 "아무도 안해본 특이한 비유를 해보겠다"라는 의욕에만 불타서, 그저 특이할 뿐인 묘사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작가가 신기한 것 한 마디 썼네" 하는 생각은 들게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소설을 쓴 작가의 정신상태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하게 할지 몰라도, 정작 소설 속 이야기에는 별로 안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억지로 특이한 척 해보려는 작가 자기 자랑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기나긴 이별" 속에는 온갖 비유법이 태평양 밤바다 파도 물결처럼 넘실넘실합니다만, 거의 전부가 이런 부작용 없이 매끈하게 이야기속에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묘사와 설명의 재미가 효과적인 것은, 아마도 이야기 분위기와 필립 말로우의 성격이 튼튼하게 일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다루고 있는 사회상황과 잘 어울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립 말로우는 도시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되어 있으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폼잡기와 과묵하며 무뚝뚝한 냉소의 극치를 이루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멋있는 것을 흉내내는 장면만 나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구한 생활의 사소한 문제나 조잡한 사무실의 누추한 모습 같은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면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필립 말로우가 술 덜깬 채 아침에 일어나서, 맛 없어 하면서 아침 만들어 먹는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장면 따위가 이야기 중심과는 아무 상관없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장면이 필립 말로우 성격을 묘사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다.
이 책에는 중간에 필립 말로우가 사소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보내는 지루한 일상적인 하루를 묘사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 부분의 그럴듯한 느낌은 전체 줄거리 못지 않은 재미를 줍니다. "기나긴 이별"이 이렇게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폼을 잡으면서도, 도시 생활의 실제적인 면을 놓치지 않는 것은 특히 훌륭해 보입니다. "얼굴없는 미녀" 같은 한국 영화가 도전하려다가 못미친 그 목표를 보여줍니다. "기나긴 이별" 속 필립 말로우가 초라한 생활과 가라앉은 일상을 살면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의리와 자제를 잃지 않는 모습은 현실적인 인간의 인간미에 대한 분위기를 깔아주게 됩니다.
묘사와 설명에 들어있는 그 표현 자체의 기묘한 유머 감각 자체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앞뒤 묘사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예전에 언급했던 이야기를 끌어오는가하면, 자조적인 것도 있고, 단정적으로 누군가를 비아냥거리며 욕하는 것도 있습니다.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어울리고 있어서, 중요한 순간 직전에 잠시간의 긴장감을 주는 용도로 배치된 것도 있고, 큰 사건을 맞이한 충격을 묘사하는데 십분 위력을 다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풍자적인 언급이 많아서, 나름대로 어떤 비판적인 시각이 살아있는 것도 상당합니다.
그런가하면, 가끔 어디 한 번 막가보자 하면서 폭주하면서 한참 묘사 자체를 화려하게 과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에 항상 나오기 마련인 "위험해 보이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책은 무려 2페이지에 걸쳐 "금발" 하나에 대해서만 끝도 없이 사설을 읊어 댑니다. 이부분은 살짝 웃기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온갖 인생살이 경험담을 들려주는 듯한 맛도 있어서 이 책의 백미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생전의 모습
첫댓글
아름다운 女
위험해 보이지만 女
사실 위험해요 아름다운 여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