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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이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앉는 것은 항상 행하는 것을 수반한다. 일단 우리가 잘 앉아서 쉬고 힘을 얻은 후에는 걷기 시작한다. '앉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있는 우리의 지위를 말해 준다. 또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하늘의 지위를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도 하늘의 표적을 지니고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에서는 행함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3:1-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엡4:17,23)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8,10)
에베소서에서는 '행하다'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쓰였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돌아다니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바울은 비유적으로 '처신하다','자신의 행동을 주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행위'라는 주제를 제시하며, 이 서신의 두 번째 부분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에베소서의 또 하나의 큰 주제임을 보았다. 지금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러한 교제의 관점에서 이 거룩한 행함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의 거룩한 소명에 비추어 우리의 모든 관계에 대해 도전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과의 관계,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 등을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동떨어져 있고 비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두기를 바란다. 그것은 매우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참되게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이 진실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단지 멀리 떨어진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게 되었다고 말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매우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무척 두렵고 놀랍다. 남편들과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행하여....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4:2)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4:2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4:26)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엡4:28)
"모든 악독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4:31)
"서로 친절하게 하며....서로 용서하기를"(엡4:32)
"피차 복종하라"(엡6:4)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6:5)
"위협을 그치라"(엡6:9)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날부터 사람은 선악을 결정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보통 사람들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대한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세워서 그 기준에 따라 살려고 애쓴다. 물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다른가? 회심한 이후로 새로운 의의 관념이 생겼고, 그 결과 우리도 매우 정당하게 선악의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시다. 우리는 윤리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무가 아니라 바로 생명나무이신 그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의를 요구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없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문제에 먼저 몰두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내 뺨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물론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이 옳게 되기만을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활표준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십자가여야 한다. 십자가의 원리가 곧 우리 행위의 원리이다.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고루 비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께 그것은 은혜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옳으냐 그르냐'하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들의 원리다. 우리는 십자가의 원리와 아버지의 완전성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우리는 한 도전에 직면한다. 마태복음 5장은 그 수준이 너무나 높아서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는 하나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에베소서의 이 부분에서 바울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서 그 표준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도에게 마땅한 바"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울의 말 속에 그 비결이 있다. 그것은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다.(엡3:20)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그분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걸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앉는 것 다음에는 자연히 걷는 것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걷기 위하여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러한 우리의 지위가 이 세상에서 그에게 합당하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 준다. 그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그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물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완전히 묘사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행동과 행위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 안식을 취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만들어진 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하나님이 안에서 행하시며 이루신다! 그것이 곧 비결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엡3:16, 18) 우리가 외부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 앞서 우리 안에 넣어두신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전부 죽은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며 이것이 우리에게 새 생명의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의 거룩이 이후로는 주님의 거룩으로 쓰이게 되고,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사항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이다. 즉 우리의 노력 없이 이루어진다. 가장 중요한 법칙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분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물이 넘쳐나는 것은 생명샘에서 말미암는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에 집작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허위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그들은 소위 '영적인' 삶을 살고, '영적인' 말을 하며, '영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모든 일들을 자기 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모국어는 그냥 흘러나온다. 모국어는 완전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 자발성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나타내준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 생명의 법은 자발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스스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만큼 해로운 것도 없거니와, 우리의 외적인 노력을 멈추고 우리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될 때만큼 복된 것도 없다.
이때 우리의 말, 기도, 생활은 모두 내적 생명의 자발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그의 생명은 능력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한 생명은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는 주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앞에서 예수님이 모세 율법의 요구와 자기 자신의 준엄한 요구를 대조하시면서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반복하신 것을 보았다.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은 처음에 언급한 표준에 도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실패만 했왔는데, 어떻게 주님은 더 높은 표준을 제시하실 수 있는가? 그분은 오직 자신의 생명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요구를 부과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실로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타난 천국의 법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 이는 주님이 그의 자녀들에게도 유용하게 하신 그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믿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세 장은 거룩한 생명에 따르는 거룩한 임무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요구사항이 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자원이 그것들을 이행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수행하지 않으실 일을 명령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단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가? 그것이 의와 불의의 문제인가?혹은 선과 악의 문제인가? 우리는 따로 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지식의 나무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그리스도의 표준과 그 표준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준다. 우리의 표준은 이제 옛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교리를 다 가지고 있지만 실제 생활은 교리와 모순되게 살고 있다.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교리가 없는 게 낫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빌1:6)
"처음 익은 열매들"과 "추수 때 거두는 것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질의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확한 것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차이점은 단지 그들이 무르익은 시기에 있다. 어떤 열매는 다른 열매보다 먼저 익어서 '첫 열매'가 된다.
어떻든 간에 모든 것이 익기는 다 익는다 그러나 어린 양은 첫 열매를 찾고 계신다. 비유에서 말한 '슬기로운 자들'이란, 일을 더 잘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른 시간에 일을 다 해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순결을 지킨 처녀였으며, 어리석었을 뿐이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미래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으나 성령으로 충만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위급한 때가 되면 기름을 더 사러 나가야만 한다. 그것은 순전히 시간의 문제다. 또한 이 비유의 끝에 이르러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깨어 있는 제자가 되라'고 권하실 때 말씀하시고자 하신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것은 그릇 안에 남아 있는 기름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지속적이고 기적적인 공급으로 불이 꺼지지 않고 유지되는 문제다(이 비유에서는 등과 그릇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등이요 그릇이다) 이와 같은 내적 충만을 모르고서야 어느 그리스도인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여기서 성령과 관련해서 쓰인 보기 드문 표현이다. 계속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오순절 때와 같은 위기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유지해야 할 상태다. 또 그것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다. 즉 영적인 은사나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성령의 인격적인 임재와 활동의 문제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한밤중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릇 안에서 불이 환하게 타오르도록 보증해 준다.
더욱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그것은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피차 의존하는 가운데 함께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그 구절에서 보면 다만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이 메시지는 에베소서 제2부의 중심을 이루고 잇다. 우리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함께 부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음이나 지혜로움이 오직 이 한가지 요점에만 달려 있음을 거듭 말해 둔다. 당신이 지혜롭다면 이런 충만을 더 일찍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어리석다면 그것을 늦게까지 연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라. 하나님은 변함없는 뜻을 가지신 변함없는 하나님이시니 당신은 현명하라. 세월을 아끼라. 무엇보다도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라. 지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슬기로운 자는 시간을 아낀다. 슬기로운 자들은 주님과 협력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곧 하나님께 즉시 사용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를 제공한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때가 찬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오는 여러 세대'에 완전히 나타날 그 구원을 의지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 무엇을 가지셔야 하느냐가 문제다. 오늘날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준비된 도구다.하나님은 짧은 시간 내에 신속하게 우리 안에 어떤 일을 행하셔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또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사람처럼 행하기를 바란다. 주께서는 항상 상한 영혼들을 사랑하셨다.
-'좌행참'(워치만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