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시의 밭 시인회" 공저집에서
축하 드립니다!
바람의 집 外 5편
- 강경순
바람의 집
바람의 집, 한 채 지어
하늘을 이불처럼 덮고 좋아라, 웃는
방 한 칸, 창문 하나가 전부인, 자취방
하나가 모두를 품었다 놓았다 하는
공중에 떠 있는 방으로
영혼이 쉼하러 신발을 벗고 들어선다
지친 퇴근, 등굽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밥 반 공기에 가지나물 조금, 버섯 무침 약간
엄나무, 땅두릅 절임 몇 가닥 넣다 말고
초봄, 겨울 땅속 정기 끌어 올린 것들이
몸에 좋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속 깊이 묻어둔 일들을 소환한다
밥맛 없을 때 묵은 시골 된장 한 숟가락 뚝배기에 넣고
팔팔 끓여 낸 장맛으로 기운 차리고 나면
불쑥 빠져나오고 마는 너를 다시 갈무리해
깊숙이 밀어 넣고 다독다독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부드럽고 진득한 촉감의
살갗을 가진 너를 누르며
공기 들어 벌레 슬지 말라고, 다독다독
곰팡이 끼지 말라고 다독다독,
꼭꼭 눌러가며 찰진 당부를 하고
야무진 돌덩이 하나 턱 올려
한 번 더 눌러 앉힌다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곰삭아 질 때까지 잘 견디고 있으라고 다독다독
가슴 저린 자식 어두운 뒤주에 넣고,
탕탕 못질하던 어떤 아비를 지켜보던 풀피리 소리
그렇게 너의 벌떡거리는 심장 소리가 미세한 실핏줄 소리로
잦아들 때까지 담금질하던 내력으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뜨거운 된장 국물, 한 수저,
기진맥진한 몸이 영양 수액을 빨아들이듯 삼킨다
더는 껴안고 살 수 없을 때 너를 묻어야 했던 항아리를 헐고
너를 끌어당겨 안았던 뜨거운 기억,
뜨겁게 뜨겁게 입속으로 당긴다
한 숟가락 호호 불어 가며 목으로 넘길 때
목젓을 꺅 깨물고 달아나는, 너의 특이한 향기가
몸속 여기저기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찌르며
몸 밖까지 신호를 보내고 있는 짜릿함,
온몸이 풀어져 그만, 너에게 넘어지고 있었다
평생을 만지작 거려도 여전히 처음 본 설렘처럼
싱싱한 너를 만나러 갈 수 없는 길에 있다
어머니가 보내 준
초절임 두릅, 한 접시 담고 묵은 김치 한 보시기
올린 쟁반 밥상 위에 바람을 들이고 있는
하늘이 들어와 쉬어 가는 하늘 층,
한 칸 방에
별들은 먼 하늘에서
한 움큼의 달빛과 내리고
화분에 안긴 멕시코 무궁화가 노란 꽃송이 피우고 기다리는
창 가득 구름 걸린 수락산이
푸르르 웃으며 들어서는 바람의 집,
퍼 올릴수록 맑아지는 물 같은 너를 불러
이윽히 바라봐도 괜찮을 것만 같은
방 한 칸의 바람의 집,
깊숙이 잠자던 것들이 우르르 다
내려도 좋을 것만 같은 방 한 칸의 바람의 집
와인, 실핏줄을 훔친다
몰약을 한 모금 삼킨 저녁
수량이 풍부하게 흐르던 강에서
입맞춤하던 기억의 미로에 들어와 있다
큼큼거리며 코끝으로 감지해 보는 향기
혀끝으로 느껴지는 쌉싸름 달콤한 유혹에 취해
섬의 곳곳을 더듬어 흘러가는 뜨거움
흘러온 온갖 것들이 숙성되고 있는 강하구에
펼쳐진 갯벌의 속살이 궁금하다.
무수한 무기질과 유기 물질로 풍부한 진흙뻘의
매끈거리는 살갗에 맨살을 대고
생명을 품을 가능성을 던져 버린 남자가
열심히 폄프질을 하고
물이 넘쳐 유속의 조절이 불가능하던 날
범람하는 장맛비에 다 쓸려 보냈던 검불 더미들이
강 하류에서 웅크리고, 조각별 되어 눈 뜨고
달빛 속에 진주를 키우고 있다
몸속 깊숙이 잠든 감각들이 입술을 벌린다
부끄러운 듯 숨죽여가며 잦아들게 했던 신음이
붉은 포도주를 받아들인 몸에서 일제히 일어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삶의 회전축을 돌리기 위해 궤도에 눕는
밤, 태의 유전자를 품고 끊임없이 자전하는
달의 몸을 훑으며 실핏줄이 흘러 다닌다
기울어진 어깨의 고단한 바람 소리
따뜻해진 체온으로 품으며 노곤하게 발효시키고 있다
길은 안으로 나 있었다
푸르른 빛을 나이테로 감싸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산등성이를 오른다
산들이 계곡으로 내려와 엎드리고
나무마다 몸 가득 빛나게 하던
봄과 여름을 담았던 나뭇잎들
날개를 펼쳐
허공을 비잉 쓸어 담더니
가장 낮은 곳으로 내린다
마지막 내려앉은 자리도 제자리, 제집의 이정표 없어
바람 불면 바람 가는 대로
발 채이면 발 채인 곳으로
부서지고 흩어져 티끌이 되어 가는 길
어쩌다 흙이라도 만나면 따뜻해질까
쉽 없이 걸어 온 길이 몸 안으로 나 있음을
거꾸로 세며 가는 길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에게 손 내밀고
어깨 맞대며 물들어가는 산을
저마다 붉은 마음 한 움큼씩 풀어 놓으며 함께 오르고
산봉우리도 겸손히 산 안으로 들어와 안긴다
외옹치, 바다향기로 길
푸른 바다가 허공을 만지는 소리
흰 말들이 달린다
바다에서 하늘에서 팔 뻗으며
서로 아득한 거리
바다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튀어 오르고
흰 포말로 부서지듯 덮쳐 가는 숨가쁜 입김
한가득 퍼 나르고 있다
흑단 같은 머리채 날리며 밝아 오는 새벽하늘
산허리 휘감은 흰 구름 꽃으로 피어나
망망한 푸른 바다 가득히 내리는 바다 향기
햇살 아래 은빛 치어들을 낳고
외옹치, 바다 기슭 놀이터가 환하다.
높고 외로운 저 파도 소리
아, 내 사랑하는 이가 지어 놓은
휘파람 소리, 목이 잠기네
바다요정 세이렌의 노래에 발 묶여
내가슴으로 달려오는 길 잊어 버린 채
잃어버린 내 푸른 사랑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외옹치, 바다향기로 길
내 사랑하는 이의 휘파람 소리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홍수
물이 넘쳐 제방이 무너지고
물바다가 되어 흘렀다
산더미로 달려들던 물길은 어디로 갔을까
마실 물이 없다는 뉴스,
산 중턱이 무너져 내린 토사에
묻혀 버린 집과 진흙 뻘을 뒤집어쓴 밥그릇들
급류에 휩쓸려 가는 소들의 울음소리
논과 밭을 삼켜버린 모래밭 위에
적막이 굴러 다닌다
경계가 사라진 묻혀버린 생
한 삽, 한 삽, 삽질을 하며 진흙을 퍼내고 있는
아버지의 핏발 선 눈에서,
무너진 아버지를 세우고 있는 사라져 버린 길
꽃무릇
붉은 꽃, 송이로 피지 못하고 몸 에어 내
울음이 실가락 꽃으로 피었다
꽃술 끝에 노란 별 점점이 박아
몸 속 얼음 같은 어둠, 밀어내고도
마음 한 줌 놓지 못한 채
기다랗게 뻗어 올린 팔에 천개의 바람돌기
공중, 떠 도는 물기를 잡아당긴다
꺽어질 듯 말 듯 가느다란 목 받쳐들고
끝내 끊어내지 못한 정념,
붉은 머리카락으로 풀어
절간 언덕 꽃무릇으로 피어나고
산길 돌아 나가는 발길 붙들고
잊어버린 사랑 부르고 있다
첫댓글 '2021 시의밭'
에 실린 시 6편,
시를 읽으며,
올려주신 분의
정성과 수고하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