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 답은 명확한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나를 구원하실 구원자이신데, 실제 우리의 주인과 구원자는 따로 있는 듯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의 전부이시고 그분 때문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하곤 하지만 사실은 상당 부분이 현실과 다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내 삶의 기초를 바꾸는 것이고,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기초 위에서 삶을 살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곧 흔들리고 무너지더라도 그 기초만은 변함이 없음을, 다시 거기서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할 수 있겠다는 응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아직도 미지근하거나 허약하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 거는 희망과 의탁과 비례한 것이라 봅니다. 실망과 아쉬움이 복잡하게 얽히고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마지막 결론과 목적이 자신의 사익(私益)과 감정이 아닌 예수님일 때 신앙의 반석을 올바로 가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의 재물과 권력, 가치와 관계에 더 희망을 두고 의탁하는 삶으로는 믿음생활의 기간과 열심함과는 무관하게 뜨거운 신앙과 굳건한 신앙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분명 간극(間隙)이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따라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타성에 젖은 응답과 마음을 다하는 응답에는 체험의 심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하고 물으시는 주님께 우리의 응답과 고백은 분명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응답과 고백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 곧 ‘예수님이면 아쉬울 것이 없는,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저입니다. 당신이 저의 삶의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은총으로 꼭 그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만은 꺾지 않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