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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느강변의 고서적 노점상 풍경, 재작년 여름 파리에서 혼자 빈둥거릴 때 스케치했던것을
나중에 수채화로 입혀본 것입니다
연재를 마치며...
오늘로서 그동안 연재하던 <프랑스 역사문화 기행>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애초에 연재를 시작할 때에는 좀 더 길게 연재하려고 했으나 추가 자료보완이 필요한 데다가 다음 연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미흡하지만 여기서 끝내기로 했습니다.
잔다르크 얘기를 포함한 백년전쟁, 세계사를 바꾼 프랑스 혁명의 진원지와 역사적인 인물들에 관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는 자료 보완이 되는대로 다시 독자 여러분들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연재할 제목은 <영화 속의 미국, 미국 속의 영화>입니다. 미국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면서 그곳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들 중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하는 방식의 글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다시 한번 애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리며 다음 연재시에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 프랑스 지성의 산실, 생 제르맹 데 프레 ]
파리 6구의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은 20세기를 이끌어 가던 프랑스 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초현실주의,입체파,실존주의,누벨바그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문예사조들이 이곳에서 태어나서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이 전후의 폐허 더미 속에서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발전합니다. 실존주의 작가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등은 <레 되 마고>, <드 플로르> 등의 카페를 사색하고 토론을 벌이는 ‘철학의 공간’으로 삼았으며 진보적인 여성운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또한 프랑스와 트뤼포 등 젊은 프랑스 영화인들도 새로운 영화를 꿈꾸는 누벨바그 운동을 벌인 곳도 이곳 담배연기 냄새로 찌든 이곳 카페의 테이블이었던 것이죠. 이와같이 생 제르맹 프레 지역은 기라성같은 철학자와 문학가,화가,영화인들이 모여 전 세계의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적지않게 영향을 미쳤던 곳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그들이 젊은 시절에 우상처럼 떠받들던 예술가들과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서 향수에 젖기 위함일 겁니다.
< 카페 드 플로르 >
프랑스 파리 생 제르망 거리에 위치한 카페 ‘드 플로르’는 건너편의 '카페 레 되 마고'와 함께 20세기 초 문학과 예술, 사상을 풍요롭게 꽃피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실존주의 문학과 입체파 회화를 태동시킨 이곳은 사르트르와 그의 여인 보부아르, 피카소, 드랭, 카뮈, 알랭 들롱, 에디트 피아프, 롤랑 바르트, 미테랑 등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명사들이 즐겨 찾았습니다.
19세기 중엽 파리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붐빈 곳은 파리 북쪽 언덕 위, 작은 마을 몽마르트르언덕이었습니다. 그곳은 오늘날에도 화가와 보헤미안들의 천국으로 널리 알려진 명소입니다. 그러면서도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루이 14세 시대 소르본 학생들의 놀이터였던 몽파르나스 지역이 작가와 예술가들의 거리가 됩니다.
* 카페 드 플로르에서...꽉 채운 맥주잔을 앞에두고 몽매에도 그리던 카페에 앉아 있는
표정이 지금 봐도 무쟈게 행복해 보입니다. 샤르트르,보부아르,아폴리네르,헤밍웨이,피
카소,알랭 드롱 등 당대의 예술가,작가,철학가,영화인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바로 이 카페에서...
몽파르나스 중에서도 특히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은 일찍부터 고티에, 조르주 상드, 발자크, 졸라 등 19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작가들이 자주 출몰하여, 기존의 몽마르트르와 더불어 파리 문화를 상징하는 지적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81년에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는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 플로르의 이름 그대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사상의 꽃을 풍요롭게 피워 가까이에 있는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와 좋은 라이벌 관계를 이루며 파리 카페 문화의 황금시대를 연출합니다.
지난날 ‘문학 카페’, ‘철학 카페’라고 불린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는 대체로 지식인들의 정치적 담론의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계절이 지나고 19세기 중엽 부르주아지의 사치한 평화와 그에 이어 찾아온 세기말적 탐미주의는 많은 남녀 카페맨을 낳으면서 새로운 카페 풍속도를 그리게 됩니다.
드 플로르 창시자의 손자인 작가 두랑-부발은 그의 저서 <카페 드 플로르>(1993)에서 “신성하다고 할 감동 없이는 드 플로르의 이 ‘무거운’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화적인 인물들뿐 아니라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세기를 만든, 지금은 실체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실재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이 많은 장인(匠人)들은, 마치 그것이 대사건, 자기들의 존재의 양식, 더욱이 에고이즘의 파도치는 큰 바다로 나아가기 몇 시간 전에 매일 정박한 항구였던 것처럼 드 플로르 이야기를 한다. 성당에 속하였듯이 사람들은 드 플로르의 단골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1920, 1930년대의 파리는 문학과 사상, 미술과 연극이 ‘창조에 술렁이는 숲’이라고 비유되었듯, 황금의 나날을 구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생 제르망 데 프레가, 특히 카페 드 플로르가 자리하였습니다.
*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
카페 드 플로르와 카페 레 되 마고와 인접해 있습니다
전위예술의 기수, 생 제르망 마을의 장로인 시인 아폴리네르는 피카소를 비롯한 여러 화가 및 시인들과 손잡고 드 플로르에서 문예지 <파리의 저녁>을 창간하였으며, 앙드레 지드 중심의 <신프랑스 평론>지 및 그와 같은 해인 1908년에 나온 우파의 <악숑 프랑세즈>의 산실도 플로르였습니다. 당시 작가, 예술가들은 문예적,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제각각 유대를 다졌으나 드 플로르는 분파를 초월한 모두의 문예살롱이며 카페였습니다.
현대 화가의 거장인 드랭은 언제나 미녀들을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그중 한 여인이 밤이 늦었다하고 말하면 “무슨 소리! 즐거운 시간은 이제부터일세”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특히 밤부터 새벽에 걸친 파리를 노래하여 ‘파리의 소요객(逍遙客)’으로 불린 시인 파르구는 친구들과 마주치면 태연히 “드 플로르에서 오전 영시에 만나세”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카페 드플로르는 낮과 아침, 밤과 야밤도 가리지 않고 단골들로 붐볐습니다.
<야간비행>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언제나 부인을 동반하였습니다. 조각가 자코메티, 그리고 드 플로르의 ‘신비적인 참가자’ 반열에는 피카소, 헤밍웨이, 카뮈, 앙드레 말로, 롤랑 바르트 등 그야말로 당대의 인물들이 끼어 있었으며 이들 모두에 끌린 이란의 소라야 왕비, 베트남의 옛 황제 바오 다이 1세, 대통령이 되기 전의 미테랑도 단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프랑스 영화의 스타들, 장 폴 벨몽드, 알랭 들롱, 감독 로만 폴란스키 등과 함께 카르뎅, 라가펠드, 아르마니 등 패션 관계 인사들도 파리에서 커피 맛이 가장 좋다는 드 플로르의 단골이었습니다. 훗날의 샹송 여왕이 된 에디트 피아프가 어린 시절에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꽃을 팔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드 플로르의 단골이던 여우(女優) 시몬 시뇨레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습니다. “내가 삶을 받은 곳은, 아니 그보다 오히려 오늘의 나는 1941년 3월의 어느 날 밤 파리 6구(區) 생 제르망 거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정말로 많은 파리지엔들에게 드 플로르를 비롯한 카페는, 중세 사람들의 성당과 같은 것, 그들은 바로 카페 신도였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파리 시민들에게는 ‘전혀 예상 밖의 미치광이짓’이었죠. 독일 제3제국의 파리 점령은 카페의 황금기에 종말을 고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드 플로르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카페맨들은 ‘굴하지 않는 정신’으로 드 플로르를 지켰습니다. 장화를 신은 나치스 장교들이 멋모르고 들어오면 사람들은 일제히 이야기를 중단하고 침묵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총총히 물러나가면 모두가 파안대소하며 다시 이야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불쌍한 것은 드 플로르의 명성을 익히 듣고 설렘으로 플로르에 찾아온 지식인 출신의 독일 신참 장교들이었죠. 그들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그 암흑의 세월 드 플로르는 누군가가 적절히 표현하였듯이 ‘폭풍우 속에 굳게 닫힌 노아의 배’였던 겁니다.
“드 플로르의 길은 4년간 나에게 있어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라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하였듯이 드 플로르는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파리 사람의 안식처였으며 그것은 특히 전쟁 중 모두에게 프랑스와 프랑스 문화의 동의어로 비쳤습니다. 이제 전쟁 중과 전후 플로르에서 하나의 ‘신화’를 일군 사르트르로 화제를 옮깁니다.
사르트르는 원래 레 되 마고의 단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 전에 그는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함께 난방시설이 좋은 드 플로르로 옮겼습니다. 무명시대의 가난하였던 그들은 시장기와 특히 추위를 못견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구토>와 <벽>을 발표하여 주목받은 사르트르는 전쟁이 일어나자 동원되었다가 종전되면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친구들, 왼쪽 사르트르 오른쪽 보부와르
1941년의 어느 날 30대 남녀 한 쌍이 드 플로르에 들어섰습니다. 그 안식처를 발견한 것은 그들 중 미모의 여인, 즉 시몬느 드 보부아르 였습니다.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보부아르와 나는 드 플로르를 주거지로 만들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원고를 쓰고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갔다가 2시에 돌아와서 4시까지 거기서 만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원고를 썼다… 우리에게는 드 플로르가 집이었다. 당시 실로 기묘한 분위기가 거기에 감돌고 있었다. 드 플로르는 우리만이 살고 있는 닫힌 세계였다. ‘우리’란 글쓰는 사람들, 화가, 예술가, 보부아르, 나. 대단한 미남 미녀가 각각 약 20인씩…. 그러한 사람들이 닫힌 세계를 쌓아올리고 있었다. 당시 드 플로르는 정말로 우리의 클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소일하는 이들에게는 드 플로르 이외의 파리는 미지의 숲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듯 모두가 생 제르망 데 프레의 진정한 시대였다. 참으로 대단한 시대였다.”
한편 드 플로르 주인은 다음과 같이 사르트르와의 만남을 회상합니다.
“1942년경 문을 열면 정오까지 그리고 오후부터 폐점 때까지 플로르에 찾아오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여성과 자주 왔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오랫동안 나는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오후에는 2층으로 자리를 옮겨 언제나 방대한 자료를 펼치고 쉴새없이 글을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그들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사르트르 씨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그 뒤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자주 함께 온 여성’이란 물론 사르트르와 생애의 동반자가 되는 <제2의 성>의 저자 보부아르입니다. 이들은 서로 자유로운 주체로서 어디까지나 상대에 대해 타자(他者)로서의 여자와 남자의 관계, 자유와 자유의 우애(友愛)의 관계여야 한다는 <제2의 성>의 주장을 바로 그대로 실천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이 계약부부는 플로르 근처에 있는 각기 다른 자신의 아파트를 대체로 같은 시간에 나와 따로따로 드 플로르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사르트르는 드 플로르에서 소설, 희곡뿐 아니라 철학서까지 집필하는 한편, 보부아르의 눈치를 살피며 틈틈이 몇몇 여성들에게 하루 10통을 넘는 편지를 몰래 썼다고 합니다. 1942년부터 다음해 겨울에 걸쳐 저술되어 ‘반(反)신학대전’이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저작 <존재와 무>의 산실도 카페 드 플로르였습니다.
또한 카페 드 플로르는 많은 문인과 철학자들의 집필과 토론의 장소였습니다. 오렌지색의 인조 모피 코트에 몸을 감싸고 밀크 티를 훌쩍 마시고는 4시간 동안 원고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오직 쓰는 데만 몰두하는 사르트르의 모습을 보부아르는 ‘모피와 잉크의 작은 폴’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그 문명(文名)이 세상을 풍미하면서 ‘사색의 왕’으로 불리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마지막 지식인’으로도 일컬어지지만 한편으론 그는 카페의 신화를 연출한 마지막 카페맨일는지도 모릅니다.
1947년 7월 파리의 한 신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의 오너’로서 플로르의 제2대 주인인 부발을 대서특필한 바 있지만 우리는 명 가르송(garcon,급사) 파스칼을 그냥 스치고 지날 수 없습니다.
유럽의 유서 깊은 카페에는 유명 가르송의 이야기가 붙어다니기 마련입니다. 1930년경에 플로르의 급사가 된 파스칼은 예의바르고 교양이 있고, 모든 것을 보고 기억하고 통찰하면서도 좀처럼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으며, 그와 동명인 <팡세>의 저자가 높이 칭송한 ‘섬세한’ 인품을 지녔습니다.
파스칼은 특히 재치와 유머로 손님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가 언젠가 범람하는 이른바 ‘실존주의자들’을, “그들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 비상식주의자들이다”라고 하였을 때 사르트르와 그와 동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래, 그렇지”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문학에 대한 파스칼의 박식과 안목은 카뮈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대낮의 암흑>의 저자 케스트러는 파스칼에게 그의 모든 저작을 선사하였습니다. 파스칼과 자주 토론한 어느 철학자는 그를 데카르트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카페의 가르송이다”라고 자부한 그가 1970년 은퇴할 때 플로르의 단골들은 그를 전형적인 플로르맨, 카페계의 모차르트, 금세기 최고의 가르송이라고 칭송하며 아쉬워하였다고 합니다.
* 카페에 들어가면 처음 인연맺은 가르송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합니다. 이 친구에게 파스칼을 아느냐고 물으니까 잘 안다고 하면서 지금은 고인이 됐다고 하네요. 훌륭한 제2의 파스칼이 되라고 하면서 카페를 나왔어요. 팁은 다른데보다 조금 더 줬습니다.
1947년 어느 날 부발의 부인은 미국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프랑스 귀족과 결혼한 미국 여인이었습니다.
“친애하는 내 친구에게, 우리의 소중한 카페 드 플로르에 관한, 특히 친절하고 충실한 우리의 파스칼에 관한 물건을 동봉합니다…… 내 마음의 고향 프랑스는 가혹한 시련 뒤에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만세! 세계문명의 위대한 중심이며 예술가들, 그리고 창조하는 존재들의 사랑채에 만세를 보냅니다. 1940년 6월에 거기를 떠난 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마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프랑스만이 내 집입니다.”
동봉한 물건이란 미국 신문에 실린, 플로르의 테이블에서 파스칼로부터 커피를 서브받고 있는 피카소의 사진을 오려낸 것이었습니다.
파리를 참으로 좋아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생 제르망 데 프레가 사라지는 날, 프랑스는 달랠 길 없는 미망인이 되고 그 뒤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카페가 없는 파리, 그리고 프랑스 문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다행히 오늘도 플로르 2층에서는 오후가 되면 원고를 쓰거나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여전히 드 플로르는 레 되 마고와 더불어 파리의 상징임을 자랑하며 세계에서 모여든 많은 손님으로 붐비고 있습니다.
< 카페 레 되 마고 >
레 되 마고에는 헤밍웨이는 물론 베를렌과 랭보, 앙드레 지드, 장 지로드, 피카소, 사르트르 등. 자유를 꿈꾸는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카페였습니다. 이전의 휴식처 몽마르트 언덕에서 내려와 이곳에 진을 치고 창작과 담론과 휴식을 취하던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죠. 그들은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정신을 불태우며 '예술을 위한 예술'을 따르는 이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를 썼고 색을 탐구했습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만나 입체파 사조를 탄생시킨 곳도 이곳입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책 <파리는 축제 중>에서 레 되 마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만큼 편안한 시간이 있을까?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어서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산책의 즐거움을 빼앗기도 한다. 볼 일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왼쪽으로 돌아 렌느 가를 지났다. '레 되 마고'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 유혹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느새 되 마고로 향하는 지름길인 보나파르트 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 카페안에 있는 두개의 중국 인형
이 카페는 원래 중국인 비단 가게였던 것을 1884년 사들여 와인 가게로 바꾸며 가게 기둥에 달려있는 두 개의 중국 인형 장식에서 이름을 따와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라는 이름의 와인가게가 됩니다(magot는 도자기 인형을 말합니다). 이후 이 와인가게는 다시 그 당시 유행에 따라 카페로 재탄생한 것이죠.
카페 레 되 마고는 옆에 고(古)서점 <윈>을 사이에 두고 카페 드 플로르가 있습니다. 또 길 맞은편에는 브라쓰리 리프가 있는데 이들 모두 생 제르맹 데 프레 거리의 카페문화를 주도하며 카페의 역사를 그려 왔습니다.
레 되 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춘향전을 ‘봄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기도 했던 홍종우가 이곳에서 열리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토론클럽에 초대되어 연설을 한 곳 이기도합니다. 홍종우는 이 보다 개혁파 김옥균을 살해한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이 사랑해 그들의 사랑방이던 레 되 마고는 그들의 예술 정신을 장려키 위해 1933년 문학상을 제정하고 첫 해의 수상자로는 <개밀>의 작가인 레이몽 크노를 뽑았습니다. 1903년 공쿠르형제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오늘날 까지도 프랑스의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문학상 30주년에 맞춰 제정된 것이죠.
레 되 마고 문학상이 제정된 1933년 그 해에 공쿠르상 수상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이 뽑혔습니다. 카페 레 되 마고는 문학상으로 매년 상패와 상금을 수여하는데 당시에 100프랑이던 상금이 오늘날에는 7700유로(약1,000만원)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상금은 오늘 날 단 10유로(약1,4000원)에 불과합니다. 1903년 제정 당시에는 상금 5000프랑과 보조금 6000프랑으로 대단히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 후 재단의 재정력이 고갈되자 상금액을 상징적인 50프랑으로 책정하였습니다. 유럽이 유로화로 통일 된 후에도 최소의 상징적인 액수인 10유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쿠르상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프랑스 문학의 최고의 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프랑스 브랜드 가치를 평가 산정하는 노망 경제 연구소의 평가에 따르면 이 상의 가치는 작가의 명예와 확실히 보장되는 출판권 등으로 1500만 유로(약200억원)로 평가했으니 말이죠.
1980년 3월엔 애석한 일로 되 마고가 언론에 그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과 당대 문학평론가이자 언어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가 이곳에서 점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성의 상징이었던 그와 대통령은 프랑스 언어를 더 아름답게 발전시킬 방법을 토론하고 헤어졌습니다.
헤어진 직후 카페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달려오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많은 프랑스인들은 슬픔으로 지성의 별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애석해했습니다.
< 파리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 >
파리 최초의 카페 르 프로코프는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서 멀지 않은 오데옹 지하철 역 근처에 있습니다. 루이 14세 때인 168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태생인 프란시스코 프로코피오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가게를 이 근처에 열면서 파리 카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후 이 카페에는 루소와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 유명 작가와 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는데, 이 카페이 전설적인 단골은 <캉디드>의 저자인 철학자 볼테르였습니다. 그는 거의 매일 이 카페를 찾아와 커피와 초콜렛을 섞어 만든 모가 커피를 하루에 40잔씩 들이 마셨다고 합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된 저서 <백과사전>의 발간 기획을 한 장소도 바로 이 카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도 이곳에서 자주 만나 회동을 가졌으며, 나폴레옹도 장교시절 자주 들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르 프로코프는 지난 300여 년 동안 프랑스 역사를 쥐었다 폈다했던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곳이죠. 프랑스 역사의 증인인 셈입니다.
< 브라스리 리프 >
‘브라스리(술집) 리프(Lipp)’는 파리에서 가장 파리다운 브라스리라는 정평을 듣고 있는 술집입니다. 생 제르맹 대로를 사이에 두고 레 되 마고, 드 플로르와 마주보고 있는데, 파리 브라스리의 역사를 이끌어온 명성높은 술집입니다.
처음 이 술집을 시작한 사람은 프랑스 동부 산악지역인 알자스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알자스 지역의 맥주와 포도주, 절인 양배추, 소시지 등 독일 풍의 요리가 유명했으며 요즘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브라스리 특유의 활기차고 열띤 분위기를 잃지않고 있는 이 브라스리 리프는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를 탈고한 곳이기도 합니다. 1921년 신문사 특파원으로 온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편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 그 때부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헤밍웨이 외에도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 생텍쥐베리, 카뮈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습니다. 조르주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텡, 자크 시라크와 같은 프랑스 대통령들도 자주 찾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고 합니다.
< 샤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머물렀던 호텔, 미스트랄 >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바로 옆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장기 투숙을 했던 호텔 ‘미스트랄’이 있습니다. 이들은 묘지가 내려다 보이는 방에 여러 번에 걸쳐 장기 투숙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서 각각 다른 방을 썼다고 하네요.
* 미스트랄 호텔, 문 옆에 현판이 보입니다.
호텔 입구의 외벽에는 이 두사람과 관련하여 돌로 만든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 현판에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는 두 개의 인용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먼저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보낸 편지 중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바뀔 수도 없는 것이 하나 있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리고 내가 무엇이 되더라도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그렇게 될 것이오.
같은 현판에 보부아르의 <세월의 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개별적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면 그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예요. 조화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죠. 그건 계속해서 쟁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텔에서 각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따로 방을 썼던 두 사람은 죽어서는 한 무덤 안에 합장되어 영원히 함께 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묘소에는 나지막한 석판 위에 두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만 함께 씌어져 있을 뿐입니다.
* 샤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합장묘앞에서...
Jean Paul Sartre
1905~1980
Simone de Beauvoir
1908~1986
[ 아폴리네르와 시 <미라보 다리>의 탄생지 ]
* 미라보 다리 밑에서...
파리의 세느 강에는 36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파리 한복판의 시테 섬을 가로지르는 퐁뇌프(지금은 가장 오래된 다리이지만 이름은 새로운 다리라는 뜻입니다)로 4백년 전인 1578년에 기공된 것이고,가장 긴 것도 250m 길이의 이 다리입니다. 가장 아름답기로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세워진 알렉산드르 3세 교(橋)를 치죠.
* 밤의 알렉산드르3세 다리
그러나 파리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는 다리는 이 다리들 보다는 파리 시내에서도 서쪽 끝의 좀 외진 곳에 있는 미라보 다리입니다. 1895년에 세워진 미라보 다리의 길이는 190m, 폭이 20m.
레잘이라는 사람이 설계한 궁상(弓狀)의 철제교로 두 개의 교각 사이의 가운데 다리 마디는 길이가 1백m가 넘어 돌다리로는 할 수 없는 공사를 해냈다고 건설 당시는 평판이 대단했던 다리이기도 합니다.
그뿐, 달리 자랑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닌 이 미라보 다리가 전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은 바로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 때문입니다.
세느 강이 유독 미라보 다리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닌데도 아폴리네르가 이 다리를 노래한 것은 우연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시를 쓸 때 그 부근에 살았고,거의 매일 이 다리를 지나 다녔습니다.
시(詩) <미라보 다리>는 시인의 실연(失戀)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마리 로랑생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마리 로랑생이라면 서양 미술사에 과히 흔치 않은 여류화가 중 대표적 존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1907년 27세의 아폴리네르는 당시 아직 무명이던 22세의 마리 로랑생을 피카소의 소개로 어느 화상(畵商)의 가게에서 만났습니다. 피갈(파리의 몽마르트 지역에 있습니다)에 가까운 에네르 가(街)에 살던 그는 매주 수요일 문인과 화가들을 초대하는 모임을 열었고 마리 로랑생은 여기에 반드시 끼었습니다.
앙리 루소의 유명한 그림 <시인과 뮤즈>(바젤 미술관 소장)는 이 두 연인의 상(像)입니다.
* 루소의 그림
라 샤펠 지역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마리 로랑생이 얼마 후 오퇴이유 지역의 라 퐁텐 가(街)로 이사를 하자 아폴리네르도 미라보 다리에 가까운 이 동네의 그로 가(街) 15번지로 옮겼습니다. 1912년 마리 로랑생과의 사랑이 끝나고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를 이 집에서 씁니다.
이 시는 연인과의 파국을 세느 강의 흐름에 의탁한 것이죠. 아폴리네르는 이 연인을 그리워한 다른 시(마리)에서도 “강물은 내 괴로움 같아서 항상 흘러 마르지 않는다”고 읊었습니다.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지치지 않는다”던 세느 강은 그에게 장한(長恨)의 강이었고 몽파르나스에 살던 샤갈의 집에 갔다 돌아오거나 하면서 걷던 미라보 다리는 발 무거운 다리였습니다.
* 다리 건너편이 오퇴이유 지역인데 지금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마리 로랑생은 피카소,브라크 등 입체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은 뒤 아폴리네르와 헤어지던 1912년 첫 개인전을 열어 인정을 받았고 2년 뒤 어떤 독일인과 결혼합니다.
다리에서 상류 쪽을 바라보면 오른편 강변에 현대식 고층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고 그 너머로 아폴리네르 때 이미 있었던 에펠 탑이 하늘을 찌릅니다. 다리 아래로는 페니슈라 부르는 기다란 하천 수송선들이 하루살이들처럼 지나 다닙니다. 세월은 가고 사랑도 가고 시인만 남던 다리에 이제 그 시인마저 가고 시(詩)만 남았습니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 1월 실연의 땅 오퇴이유를 떠나 생 제르맹 데 프레로 집을 옮겼습니다.
“사람은 아쉬움없이 아무 것과도 헤어질 수 없다. 자기에게 불행을 안겨다 준 장소나 물건이나 사람이라도 그렇다. 그리운 오퇴이유여, 내 커다란 슬픔이 고인 고장이여, 나는 쓰라림없이 너를 떠나지 못했다”고 그는 뒷날 <양안(兩岸)의 산보자>에서 미라보 다리 부근 시절을 회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 양안(兩岸) : 세느 강은 좌안(강 남쪽),우완(강 북쪽)으로 나뉘어 불리웁니다.
* 파리 지도, 지역별로 1,2, 3...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왼편 조그맣게 보이는 에펠탑 바로 왼쪽에 있는 다리가 미라보 다리입니다. 그리고 왼쪽 16번이 오퇴이유 지역입니다.파리는 왼편이 주로 부유층이 살고 오른편 19,20,12,13구에 서민층이 살고 있습니다. 중국인,아랍인,아프리카인등 주로 이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리는 총 20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중앙에서부터 1,2,3으로 시작하여 달팽이 모양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둥그렇게 구역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생 제르맹 대로 202번지. 이 집 6층 꼭대기에서 아폴리네르가 마지막 6년을 산 후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 자클린이 1967년 죽을 때까지 이 집을 지켰고 아폴리네르에게는 직계 후손이 없어 지금은 처조카뻘 되는 부다르 아폴리네르 씨가 주인입니다.
* 아폴리네르가 살았던 아파트
대시인의 거소로는 뜻밖의 누거(陋居)입니다. 나무바닥의 침침한 방들은 손바닥만씩하며, 침실 벽에는 마리 로랑생의 명작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들>이 걸렸던 자국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 대신 복사판을 걸어 놓았습니다.
1909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원화는 현재 파리의 상트르 퐁피두 센터(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배경에 미라보 다리가 보입니다. 아폴리네르는 평생 이 다리를 곁에 더불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폴리네르의 방에 남은 유물은 장롱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서재에는 4천여 권의 장서가 그대로 고스란히 꽂혀 있습니다. 부다르 아폴리네르 씨는 이 집에 있던 마리 로랑생의 그림 6점을 물려 받았습니다. 팔면 엄청난 값이 나가는 재산가입니다. 수년 전에는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탐내어 도둑이 들었었다고 합니다.
서재 옆의 좁다란 계단을 비집고 오르면 지붕 위의 별실이 나옵니다. 아폴리네르는 파리의 우울한 회색 지붕들이 창 밖으로 내다뵈는 이 1평짜리 옥탑 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전위(前衛)란 한 평의 운동장으로도 족한 운동이던가요. 아폴리네르는 20세기 초 전위예술의 기수였습니다.
아폴리네르의 집 부근의 생 제르맹 대로 변에는 소위 <문학 카페>로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오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드 플로르>는 아폴리네르가 앙드레 살몽 등과 <스와레 드 라 플륌>이란 모임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새로운 시의 개혁을 논하던 곳입니다.
그 바로 옆에 나란한 <오 되 마고>는 2차대전 직후 샤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진을 치고 앉았던 실존주의의 탄생지로서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을 파리의 명물로 만든 카페입니다.
<오 되 마고> 건너편의 생 제르맹 데 프레 광장 한쪽 가에는 교회 옆의 소록지(小綠地)에 동제(銅製) 소녀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1952년 피카소가 옛 친구 아폴리네르를 추념하여 그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아폴리네르가 이 지역에 심은 예술적 분위기의 기념상이기도 합니다.
* 피카소가 친구 아폴리네르를 위해 빚은 소녀상
아폴리네르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긴 자연석 석주가 선 묘비에는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 보았는가. 나는 이제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 기욤 아폴리네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묘 찾느라고 무진장 고생했습니다
[ 아폴리네르와 시 <미라보 다리> ]
* 아폴리네르
널리 애송되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는 로마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19세 때 파리에 온 후 새로운 예술운동을 주창하여 쉬르레알리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미라보 다리>는 1912년 <스와레 드 파리> 지(지)에 처음 발표되었다가 이듬해에 나온 그의 대표시집 <알콜>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 미라보 다리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기억해야 하랴
기쁨은 항상 슬픔 뒤에 오던 것을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자
팔을 낀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을 한 물결은
지쳐 흐르는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세월은 간다,
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은 간다
인생은 이리도 더디고 희망은 이리도 벅찬데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지나간 세월도 가버린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 강만 흐른다
해는 저물어 종이 울린다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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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선생님,
지난 동안 정말로 잘 보았습니다.
저는 지난해 생전 처음으로 Paris 를 갔었고 글을 볼 때마다 그리 낯설지 않다는 마음으로 혼자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Thanks for your posting.
LA 거사님! 잘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글쓰는 이들이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인 것 같아요. 얘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함께 공감한다는 것 말
이지요.파리는 저의 영원한 도시구요. 언제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도시입니다.
앞으로 연재할 <영화 속의 미국, 미국 속의 영화>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LA 거사님을 비롯해 미국 거주 동창생 여러분들에게도 유익하고 재밋는 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즐겁고 건강한 연말 연시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