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53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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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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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IiLjEZmjVA (이주형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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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그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한 대성전이 어느 날 돌 하나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 가지 않아 이방인들의 침략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자신들 최후의 보루요 목숨 같던 성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유린됨으로 인해 유다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파괴된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아버지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아름다운 성전을 재건축하시려는 큰 의도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만 종종 파괴도 필요합니다. 그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 존재 자체를 통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참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 세상 육화강생,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십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가 거행되는 모든 곳을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아니라 매일 그분의 몸과 피를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또한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성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옛날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가끔씩 배은망덕하고 불충실한 우리를 향해서도 파괴의 망치를 손에 드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 당신 마음에 드는 새 성전을 반드시 재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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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meqW03SI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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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지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오늘 복음은 심판의 ‘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이 일어나도, 또 전염병이 돌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가 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의 표징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왜 죽음의 때를 알려고 하느냐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마지막 때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나 죽음이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은총으로 여기길 바라십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죽음은 정말 잘만 사용하면 진정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은총입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죽음 때문에 지금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응하고 죽습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동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수많은 삶의 태도들을 취합니다. 인간은 죽음의 결과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 죽음은 분명 지금 삶의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올드’(2021)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한 해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혼을 결심한 프리스카는 남편 가이와 어린 자녀 둘과 함께 3일간 외딴섬 휴양지로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프리스카의 가족 말고도 많은 이들이 휴양지로 모여듭니다. 여기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30분이 마치 1년처럼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휴양지 리조트를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족 중 일부는 간질이나 암, 정신병 등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약회사에서 희귀한 광물로 둘러싸인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곳에 그들을 넣어놓고 자신들의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의 임상시험이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입니다. 탈출하고 싶어 절벽을 통과하려고도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 그냥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 더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여기고 정신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려는 프리스카와 가이에 의해 그도 죽습니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는 아이를 뱁니다. 아이가 아기를 배고 뭔가 자신들도 큰일을 이뤄낸 것처럼 당당해 합니다. 하지만 아기는 시간의 빠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프리스카와 남편 가이와 두 성장한 아이들만 남은 상황에서 부부는 해변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지난날을 화해하고 죽어갑니다. 프리스카가 노래합니다. “사랑의 큐피드가 쏜….” 남편 가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지? 다 잊어버렸네. 이유가 뭐였든 나는 당신에게 화 풀렸어. 우리 왜 이 해변을 떠나려고 했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짧은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데 썼습니다. 남은 자녀들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는 그곳을 탈출하여 제약회사를 신고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죽음을 ‘지금, 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차피 끝나는 삶,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죽음을 현재에 두지 않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왜 자꾸 죽음을 미래로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있습니다. 난파된 오래된 배에서 떠내려온 청나라 자기들인데 그것들의 가치는 하나당 수억 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처음 발견한 어부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체는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영혼이 있고 또 그 안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하느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생존만 생각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못한 상류층 유대인 부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 프랭클이 물었습니다. “고생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납니까?” “저는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밥 먹고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고통이 올 때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여러 자세를 보입니다. 탈출하려고 하고 절망하고 미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자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데 더 배고픈 이에게 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음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어차피 죽는데 나의 가치를 생존만이 아닌 더 고귀하게 만들어 보자는 결단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인간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죽음을 기억함’입니다. 이 죽음을 미래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썩히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면, 하느님께서 죽음이란 것으로 인간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그냥 흘려버리지 맙시다. 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면 저절로 자신의 존엄성을 높여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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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고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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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26일(금)까지 전주교구 사제단 피정으로 강론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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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령대회를 다녀온 날입니다. 여느 때처럼 산보를 나섰습니다. 집에 거의 돌아올 무렵입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서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보지 못하고 다가왔습니다. 차를 보고 있으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어보았습니다. 약간의 타박상만 있었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으면 될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혈압을 재 보았고, 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동안 복용하지 않았던 혈압 약을 복용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성령대회를 다녀왔기에 천만다행으로 이 정도 사고로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사고의 순간에 저를 위해서 전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대회 때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에게는 거동이 불편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숨과 원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님은 기도 중에 반은 썩어 있는 사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생각하니 그 사과는 썩어가는 자신의 영혼이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교우들이 주었던 여호수아서의 말씀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여호수아 1, 9)” 그리고 20년 전 세례 받았을 때 한 자매님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도 생각났다고 합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는 세례를 받으면서 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니 모든 근심과 걱정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 앞으로도 있을 고통과 근심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돌아보니 그 아들은 한숨과 원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은총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아들이 있어서 가족이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하는 자매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를 꾸밈없이 이야기 합니다. 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 내면의 부르심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 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 암호를 발견 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틀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바다 깊은 곳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은하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철학의 논리 속에, 수학의 규칙 속에, 과학의 심오함 속에만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웃음에도, 작은 들꽃에도,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도 하느님의 암호는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암호를 우리들만 간직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그 암호를 나누어 주어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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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재화 안셀모 신부님]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는 이것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좋은 환경의 아파트, 성능 좋은 자동차,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고 젊음을 유지해 주는 화장품, 맛좋고 건강을 보장해 주는 음식, 각종 가전제품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다양한 금융상품과 보험, 좋은 성적을 보장하는 교육방법 등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이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진정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까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많겠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작품인 아름다운 건물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라고 자처하며 다가오는 각종 우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슬기롭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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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님]
교회의 전례는 이제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면서, 세상의 종말을 계속 이야기하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기도하고, 그리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번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반성하게 하고, 참회하도록 해서,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도 우리의 좋지못한 행실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옷을 입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 21장 이하의 내용을 통해서, 다가올 세상 종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에 감탄해 하니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전이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기원 후 70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포위공격으로 110만 명이 죽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예루살렘은 철저히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흔히 예루살렘하면은, 성도(聖都) 즉 거룩한 도시,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등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고, 그래서 이곳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는, 하느님의 궤를 성전 안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듯한 표현을 쓰셨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지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지 않다 보니, 당시 예루살렘이 온갖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하느님의 도시라 하더라도, 참회하지 않는 삶,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시라면 다른데 보다도 오히려 더욱더 모범을 보여서 봉사하며 하느님다운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이 기득권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 죄는 오히려 더 크다는 것,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을 때,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을 꾸짖으신다는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자는 하느님을 믿는 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다워야 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다워야 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워야’ 한다는 말은, 권리도 당연히 주장해야겠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책임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럴 때 ‘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요즈음,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간직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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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카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黙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 (BC 721년 북왕조 멸망, BC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BC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BC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카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카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마태 24장; 마르 13장; 루카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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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사실,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파괴에 대해서는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이미 예고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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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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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21,9)
'종말과 종말의 지연!'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종말에 관한 말씀'인데,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는 말씀'과 '재난의 시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2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21,8)
그리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고,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끝, 곧 종말'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 올 종말과 종말의 지연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종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는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성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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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 너머를 희망하는 이에게>
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끝 너머를 희망하는 이에게>
끝 너머를
희망하는 이에게
끝은 끝이 아니지요
끝 너머를
희망하는 이에게
끝을 강요할 수 없지요
끝 너머를
희망하는 이에게
끝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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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 커다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 지지도 또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를 건네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속으로는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약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이 무뎌지고 힘차게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시간이 약일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단해진 상태의 나로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하니 슬픔을 너머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기억나게 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기억하면서 단단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고통과 시련으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었을까요? 수많은 아픔을 기억하면서 단단해졌기에 성공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을 동반하는 순간, 나의 단단해짐을 떠올려 보십시오.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단단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출신이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성전의 위상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서울에 가서 높은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이 다르긴 다르구나.’라면서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만 연연하면 할수록 고통과 시련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에서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삶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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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콜>
새벽 다섯 시.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받으면,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축일 날, 가장 이른 축하의 인사를 늘 부모님께 이렇게 받았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님 걱정에 매일 부모님과 통화할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새벽에 잘 못 일어나요. 5시에 모닝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모닝콜을 해주셨고, 이를 무척이나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들 신부 도와주고 또 새벽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4시 전에 일어나기에 5시에 굳이 모닝콜을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계속하실 수 있도록 부탁을 했었습니다. 작년 4월 15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올해 8월 21일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새벽의 모닝콜 전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축일 때 괜히 서글퍼졌습니다.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부족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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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여기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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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定住의 영성>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다-
어제는 얼음이 얼고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이었고, 오늘은 완연한 초겨울 날씨입니다. 지금은 연중 ‘끝’주간이고 다음 주는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주간답게 다니엘서나 루카 복음의 말씀 배치도 종말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종말의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희망이요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마침 오랜만에 거름을 주고자 판, 배밭의 구덩이와 배나무 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비료부대를 보는 순간 오래 전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수록 힘들다/하루하루 산다
다시 시작된 배농사/가지런히 파진 흙구덩이/든든하다
끝은 시작이다/삶은 엄숙하다
묵묵히 생명의 품되어/흙으로 산다/마지막이 고와야 한다
소나무를 줄기차게 타고 오르던
하늘 향한 담쟁이/장엄한 단풍 사랑으로/소나무를 장식하며
은혜 갚고 있다/이래야 끝은 아름다운 시작일 수 있다”-1998.11.
끝은 희망의 시작입니다. 다니엘서나 묵시사상의 주제는 단 하나 ‘희망’입니다. 위협이나 공포가 아닌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하고 민심이 흉흉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의 영성입니다. 정주의 중심, 정주의 평화, 정주의 기쁨, 정주의 희망, 정주의 지혜 등 정주 영성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으뜸 서원이 바로 정주 서원입니다.
정주의 빛나는 표상이 수천년 전통의 수도원이나 성전들이고 여기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원 성전, 그리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이 모든 정주의 현실이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바 하느님 안에, 교회 안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삼종 기도후 세계 젊은이의 날에 젊은이들에게 하신 교황님 강론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서 집처럼 편히 머물며 주인공들이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고향의 가정집 같은 교회 안에서 정주하며 활력을 회복하라는 말씀은 비단 젊은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가정 상실의 시대, 교회가 만인의 치유와 위로, 환대의 가정집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들이 편안한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 수도자들이 수도가정을 이뤄 사는 정주의 요셉 수도원을 찾습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느님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 손 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 정주할 때, 온갖 불안과 두려움, 환상은 말끔히 걷힙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세상 우상들이나 사탄에 속지 않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아무것도 너를’ 이란 기도시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엇이뇨/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무얼 더 원하리오
사랑하고 사랑하여/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대로 정주 영성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한,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정주의 영성가입니다. 알고 보니 아빌라의 데레사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이란 성가를 제 장례미사 퇴장성가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 역시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꿈과 환시의 해몽을 청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바빌론 대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빌론에 유배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주의 예언자, 다니엘은 희망과 구원의 표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꿈의 해몽에 앞서 다니엘의 하느님 찬미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하느님 안에 깊이 정주한 정주 영성의 대가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지혜와 힘이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이름은/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시간과 절기를 바꾸시는 분
임금들을 내치기도 하시고/임금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현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예지를 아는 이들에게 지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심오한 것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시고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빛이 함께 머무르시는 분이시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며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다니2,20-23)
정주 영성에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힘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정주 영성이요 그 빛나는 모범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꿈 해몽은 세상 제국들이 덧없이 무너져 내림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해몽의 결정적 풀이입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하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통쾌, 상쾌, 유쾌한 삼쾌의 꿈해몽입니다. 바로 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나라는 자랑스럽게도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제국들이 수없이 명멸明滅했지잔 가톨릭 교회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제1대 베드로 사도 교황으로 시작되어 현재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정주영성의 대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의 깊고 풍부한 지혜와 지식, 해몽과 예언을 통해 정주 영성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지 깨닫습니다. 다니엘을 능가하는 정주영성의 대가, 바로 우리 구원자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어제 월요일 9시경 찬미가 1절의 고백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성인들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구원의 주님이신/성자 그리스도님
당신은 정의 평화 베푸시오니/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나이다.”
우리의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이신 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시는 바 역시 정주영성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영적 사기꾼에 속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하느님 안에 정주하라는 것입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삽니다. 경거망동, 부화뇌동 흔들리지 말고, 뿌리 없이 표류하며 방황하지말고, 하느님 중심에 깊이 정주의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요지부동 내 삶의 제자리에서 깨어 맑은 제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어둡고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빛을 발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부단히 내 삶의 자리 초월적 거점에서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고 넓고 깊게 살게 하는 정주 영성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깊은 정주 영성을 살게 해 주십니다. 다시 늘 고백해도 새롭고 좋은, 정주의 중심인 파스카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 예수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은 생명과 빛, 진리와 사랑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의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희망, 저희 평화,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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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다니 2,31)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 불려나와 꿈을 풀이합니다. 임금의 꿈 속에 등장한 순금, 은, 청동, 쇠, 진흙으로 된 거대한 상은 앞으로 올 나라들을 상징하지요. 바빌론에 이어 세상의 패권은 페르시아, 그리스를 비롯한 헬레니즘 세계,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에 극심한 도전을 받으며 식민지의 현실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이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다니 2,34-35)
그런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서 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거듭 출현한 악의 세력들이 잠시 세상을 뒤흔들며 한분이신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대적하더라도 결국 그들에게 남김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다니 2,44)
인간적 감각으로는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모든 악의 세력을 부수고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웁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세운 권력은 힘없이 무너져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침략자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불타고 허물어졌지요.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을 모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습니다. 아무리 외형을 아름답게 꾸민들 성전을 지탱하는 백성의 신앙의 뿌리가 부실해지면 언제든 하느님 현존을 잃기 마련이지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반란은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무너뜨리고 빼앗고 짓밟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간담을 더 서늘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한 무엇이 온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지진이나 기근,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일들, 큰 표징 등은 인간이 벌일 수 있는 비극의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일단 벌어지만 강자든 약자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통제 영역 밖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영원히 서 있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고에서처럼 한치 앞도 모르고 오만하게 구는 각종 악의 각축장이었던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어떤 힘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날이지요.
그날이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다려온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날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두려워 피하고픈 세상 종말의 날이 될 겁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선물로 주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모습이 쌓여 그 날을 맞이하는 준비가 될 겁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복음 환호송)
이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종종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장 눈앞에 악이 득세하고 어둠이 장악한 듯 보여도, 우리는 그 모두를 부수시고 당신 나라를 건설하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충실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며 영원을 희망합시다. 그때가 언제 어떻게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니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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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YOVN2f6l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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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 9)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시작도 끝도
사랑의
신비안에
있음을 아신다.
이제 산(山)은
겨울 숲으로
바뀌고 있다.
비워내고
떠나보내는
겨울 숲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비워내야
사랑할 사람이
보인다.
삶이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는
모든 은총이다.
삶과 죽음
이 모두를
다시
생각한다.
거스를 수 없는
구원의 여정이
우리들 삶의
모든 여정이다.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우리들
시간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허물어지고
사라져야
잃어버린 방향을
다시 찾게 된다.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방향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실상 하느님께서
없는 방향이란
없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 있는
우리들이
다시 소중한
사랑을 만난다.
참된 사랑이
참된 방향이며
참된 구원이다.
사랑은 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이 끝과 저 끝또한
내 것이 아니다.
시작도 하느님의
것이며 끝도
하느님의 것이다.
종말은 하느님을
알게되는 구원의
가장 분명한
사랑의
선물이다.
사랑하기 위해
허물어짐도
부서짐도
필요한
은총이 되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이
있다.
끝은
하느님이시며
끝은 사랑이다.
그래서 끝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다.
사랑,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구원의 힘찬
새로운 시작의
이름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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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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