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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일당(一黨), 만우당(萬雨黨)의 겁(怯)
( 一 )
형산 무애곡이 불타던 날, 단비하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의 침상은 온갖 오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돌봐주는 이 아
무도 없는 가운데 혼자 고독하게 병마와 싸운 결과였다.
눈을 뜬 단비하는 목간으로 가 더러운 오물과 찌든 때를 벗겨
냈다.
독제실에 있을 때부터 늘 반복되던 일과(日課). 다리엔 병마에
쇠약해진 육신을 지탱할 만한 힘도 없었다.
각기 성분이 다른 독들은 증세 또한 천양각색이었다. 어떤 독
은 강력한 면역성(免疫性)을 부여해 같은 독에 두 번 중독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독은 몇 번을 당해도 똑같은 증세가
반복 되었다.
면역성을 부여하는 독과 그렇지 않은 독, 어쨌든 단비하의 몸
은 범인(凡人)보다 내성이 강해졌다. 그러나 혈반사접의 잔독
에 욕지기가 치미는 순간 흑룡강성에만 서식한다는 흑살무사가
떠올랐다.
생애 처음으로 당한 독(毒)이었고 그래서 그만큼 인상이 깊이
박힌...혈반사접은 그때 만큼이나 진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에 돌아왔을 때, 사마전이 놀란 기색으
로 맞이했다.
"생존력이 강한 놈이지만 정말 어처구니 없군."
"아, 아저씨 나 많이 아팠어."
"그래, 고생했다."
"나 집에 가도 돼?"
"아직은 안돼. 네가 좋아하는 한연지를 따라가거라."
"이제는 싫어. 연지가 미워. 나 아플때 돌봐주지도 않았잖아."
정말 싫었다. 당문에 있을 때는 그녀가 이렇게 변한줄 몰랐다.
독제실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했고 혈뇌옥에 삼 개월이나 같힌
덕이다.
착하고 순진하며 가련한 여인, 항시 지켜 줘야 할 여인으로만
생각했다. 후위대 부대주로 온갖 간난(艱難)을 겪는 모습을 보
고 얼마나 안쓰러워했던가.
싸늘한 대접은 당연시했다. 어떤 여인이 백치가 된 남자에게
지순한 사랑을 주겠는가. 이번 여정으로 그녀의 본색을 알았
고, 마음속의 여인을 깊은 땅 속에 묻어 버렸다.
이미 너무 다른 길을 걷는 여인, 싫었다. 귀찮았다.
"후후후! 앞으로는 잘 돌봐 줄게다."
"싫어. 나 집에 갈래."
그때 싸늘한 냉소가 들려 왔다.
"어디로 간다고?"
일순 단비하는 어깨를 움츠리고 한구석으로 급히 피했다. 툭하
면 호된 발길질을 해대는 당철휘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용케 살아났구나."
"...!"
"앞으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래도 단비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고개를 숙이고 결눈질을
하는 모습이 무척 애처로웠다.
한연지가 들어오다 말고 발걸음을 멈춘 채 눈에 이채를 발했
다. 그녀 역시 단비하가 살아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
았다. 어제만 해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단비하, 고생했어."
달콤한 목소리 환한 미소, 그것도 단비하의 움츠려든 어깨를
펴게하지 못했다.
한연지는 그런 단비하를 버려 두고 탁자로 다가가 중원전도(中
原全圖)를 펼쳤다.
"우리는 우선 북동(北東)으로 방향을 잡고 사고현(四古縣)으로
갈거예요. 여기서부터 삼백 리, 빨리 간다면 삼 일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사고현이라...그곳은 일당(一黨) 만우당(萬雨黨)이 있던 곳인
데?"
"맞아요. 오늘까지 닷새 동안 형산에 머물렀지만 첫날 무산파
가 나타난 것을 제외하면 쓸 만한 문파에서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어요. 어쩌면 사대 독문이 연수(聯手)했을지도 모르죠. 만
약 그렇다면 우린 죽을거예요."
"그들이 감히..."
"혈반사접을 만들어 냈다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으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사고현. 거기서부터 탐색해요. 일단
변복(變服)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문 사람임을 알려서 득될
게 없어요."
"알았소."
당철휘는 품속에 들어 있는 폭우빙혼통을 어루만졌다.
혈반사접을 만든 독문의 문주를 격살하기 위해 가져 온 사용금
지의 암기, 그누가 되었든 폭우빙혼통 앞에서 견딜 자가 없다
는 생각이 들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당문의 힘이 필요하겠소?"
"찾게 된다면...그 전에는 아니에요. 문주님은 우리가 능히 그
일을 해내리라 믿고 보내셨으니 꼭 해내야죠."
삼 인이 말을 나누는 동안 단비하는 열려진 봉창을 통해 지는
저녁놀을 감상했다. 천지를 붉게 물들인 잿빛 노을은 좀더 밝
은 불빛을 아늑하게 비줬다.
불타는 무애곡,
관병들이 사방에서 일시에 지른 불길이 무애곡으로 밀려들면서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평야지대인지라 천 장 밖에서도 코 앞처럼 느껴지는 불길이었
다.
죽음의 사지 무애곡도 붉은 불길을 뿜어 내는가. 귀기스럽도록
붉은 눈을 가졌던 혈반나접은 저 속에서 한줌 재로 변하고 마
는가.
-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단비하를 시키면 돼요. 그리고 당 대
가는 좀더 자신감을 가지세요. 자신감을 잃은 사람은 아무 짝
에도 쓸모가 없어요. 제 말뜻 아시죠?
환상처럼 아득히 들려 오는 소리가 붉은 화광과 썩 잘 어울렸
다.
쉬익!
극히 가늘게 옷자락 흘리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고개조차 돌리
지 않았다. 처마밑에 편복처럼 매달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봉창문을 열 때부터 알았으니까. 그 사람이 독사우공이라는사
실도.
형산 무애곡의 붉은 화염은 밤새도록 타오른 것도 모자라 마차
를 탈때까지 지속되었다. 천하의 명산으로 이름 높던 형산 일
각을 뜨겁게 함몰시키는 불길이었다.
* * *
사고현에서 삼십 리 떨어진 전평현(田坪縣).
남궁백(南宮伯)은 부지런히 풍로를 돌렸다. 일정한 화력을 유
지하는 화로의 불길, 오랜 세월 이런 일에 익숙한 손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로 덮인 이마에는 비지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눈길은 오로
지 조그만 도기 그릇에서 끓고 있는 검은 액체를 뚫어지게 바
라보며 튀어 오르는 기포(氣泡)까지 섬세하게 관찰했다.
검은 액체는 기포를 튕겨 내더니 점차 고형질(固形質)로 굳어
졌다. 이윽고 거의 딱딱해질 무렵 남궁백은 작은 그릇에 담긴
희뿌연 물을 쏟아 부었다.
치이익...!
검은 고형질과 희뿌연 물은 상반된 성질을 지녔는지 기음을 쏟
아내며 섞여들었다. 검은 고형질이 묶은 점액질(粘液質)로 변
하면서 색깔이 약간 엷어졌다.
그러기를 얼마간 반복하자 솥 하나 가득 담겨 있던 검은 액체
는 한 주먹 정도로 졸아들었다.
'조금만...조금만 더 하면...'
남궁백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인가, 이 순간을 위해서 그 욕됨을 참으
며 살아 오지 않았던가. 언제 피살당할지 모를 공포에서 헤어
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지난날들.
도기의 액체는 색깔이 점점 엷어지더니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
다. 남궁백은 급히 나무주걱을 들어 진득한 액체를 긁어 냈다.
그리고 옆에 마련해 놓았던 푸른 잎사귀에 조심스럽게 올려놓
았다.
치지직...!
붉은 액은 잎사귀를 녹이며 하얀 연기를 뿜어 냈다. 시야가 완
전히 차단될 정도로 자욱한 연기, 좁디좁은 토굴은 금세 하얀
연기로 가득 찼다. 신기한 것은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화로의
불길이 연기에 닿는 순간 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연기 속
에 습기가 내포된 것도 아닌데...
잠시 후 붉은 액체는 콩알만한 단환으로 생성됐다.
"후후후...와하하핫...!"
남궁백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렇지 않고는 이 기쁨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희열은 심장을 터
뜨리고 입을 찢으며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풍멸환(風滅丸), 드디어 완성했다. 드디어 완성했어. 크흐
흐흑..."
이번에는 울음이었다.
그 동안 겪어야 했던 모든 설움이 일시에 몰려 들었다. 풍멸환
의 제조기법을 분실해 당해야 했던 설움, 동네 강아지보다 못
한 대접을 받던 지난날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열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장부(丈夫)..."
남궁백은 등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얼른 소매 깃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고생하셨어요, 장부."
"다 봤소?"
"네."
"숙원이었던지라 그만 눈물이 솟는구려."
"오늘 같은 날은 실컷 우세요, 저도 울고 싶은걸요."
남궁백은 조용히 다가가 현숙한 아내의 두손을 마주잡았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오."
"아니에요. 소첩은 다만..."
반요진(潘嶢眞)은 얼굴을 숙여 흐르는 눈물을 감줬다. 그러나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두고 보시오. 이제 풍멸환이 완성된 이상 만우당의 옛날 성쇠
를 되찾고 말겠소. 꼭 되찾겠소."
"그러셔야지요. 가가는 하실 거예요."
남궁백은 문득 아내의 두손이 너무 거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아이 손처럼 부드러웠는데...바느질 품샀으로 목구멍에 풀
칠하기도 바쁜판에 귀한 약재를 사댔으니 어련하랴.
그뿐이랴 귀한 독충이 있다면 천 리를 마다 않고 달려가 채집
해 오곤하지 않았는가. 그런 정성인데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으리 오늘의 성과는 모두 현숙한 아내가 있기에 가능했다.
"고맙...소, 반(潘) 매(妹)."
남궁백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칠고, 투박하고 손
마디가 검게 변한 손을 들어 아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명가(名家)의 여식으로 태어나 이런 고생을 하다니..."
"후회 안해요."
"만우령(萬雨令)을 발동하겠소. 천하 각지로 숨어든 당원들이
모여들 게요. 이제 다시는 당신에게 모진 일을 시키지 않겠
소."
"호호호! 옛날 호기가 되살아나시는 것 같아 기뻐요."
"당신이 보기에도 그렇소?"
"그럼요."
"하하하...!"
남궁백의 마음은 벌써 사고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비바람에 퇴색되어 버린 글씨 찢어지고 이지러진 편액, 그리고
오십 장에 달한 거대한 장원(莊院)을 뒤덮은 잡초들이 한때는
무림 일각을 지배했던 만우당의 현 모습이었다.
"믿어지지 않는군. 만우당의 물방울 문양은 죽음의 그림자였는
데..."
당철휘는 무너진 흙담벽 사이로 빠르게 도망치는 들쥐를 보면
서 가볍게 중얼거렸다. 비록 당문 위세에 눌려 잠적해 버렸다
고는 하지만 장원을 돌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이것이 세상 인심이에요. 귀속칠가 역시 마찬가지죠. 만약 당
문이 귀속되었다면 지금쯤 당문도 폐허로 변했을 거예요."
"한매의 말속에는 늘 가시가 박혀 있군."
"듣기 거북한가요?"
"좋을 리는 없지."
"호호호! 오늘부터 당신을 고쳐 보죠."
당철휘는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쳐들었다.
"한매, 그 말뜻은..."
"별다르게 생각하진 마세요. 요 며칠간 당신 꼴이 어땠는지 아
세요?"
"꼭 비 맞은 생쥐 꼴이었어요."
"한매 말을 삼갔으면 좋겠어."
"정말이에요. 만약 그 상태가 조금만 더 오래갔다면 저는 당신
을 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무섭게 변하더군요. 마음을
숨기고, 좀 더 음흉해지고...아무튼 성숙했어요."
"좋은 소리인지 나쁜 소리인지 분간이 안가."
"좋은 소리예요."
한연지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은 폐허와
어울리면서 묘하게도 충동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당철휘는 버들잎처럼 가는 허리에 한팔을 두르고 힘껏 끌어안
았다.
동물적인 본능이 서서히 고개를 치밀었다. 하지만 꾹 눌러 참
을 수밖에 없었다. 끌어안는 것을 용납해 준 것만도 기분 좋았
다.
언제부터인가 당철휘에게 한연지라는 여자는 어려운 상대가 되
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자신이 자초한 일, 그녀를 나무
랄 일도 자신을 질책할 일도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 뭐든지 주
고 싶은 사랑 그런 것을 깨달았다.
한연지가 관찰한 바는 정확했다.
독에 대한 자신감 부재는 한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음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싸움은 고독했다. 누가 도
와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이겨 내는 순간 되찾
은 자신감은 분명 숙성한 것이었다.
"한매를 언제 가질 수 있나?"
"정말 많이 변했군요. 다른때 같으면 최소한 입술이라도 훔쳤
을 텐데."
"당신에게만은 그럴 수 없지."
"다른 여자는요?"
"질투하나?"
"여자니까요."
"약속하지. 한매 이외에 그어떤 여자한테도 눈길을 돌리지 않
겠다고...한매를 진정으로 사랑하니까."
"믿어요. 그 약속을 배반할때는...저도 약속드리죠. 차기 문주
로 내정되는 날 저를 드리겠어요.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할
일이 많아요."
"후후후!"
당철휘는 자물쇠처럼 꽉 닫은 팔에 힘을 풀었다.
"대가는 독단 제조실을 돌아보세요. 비록 멸문했지만 그래도
배울점이 있을거예요."
"그러지."
한연지는 뒤켠으로 돌아가는 당철휘를 보면서 하얀 미소를 머
금었다.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무림에 출도하면서 들떴던
마음, 경망된 행동들이 빠르게 교정되고 야심 만만한 당철휘로
돌아갔다.
그는 앞으로 지지 않을 것이다. 질 싸움이라면 아예 하지 않겠
지. 당문 문주는 물론 천하 대문파의 문주로 손색없는 걸물.
'아직은 문주감으로 부족해. 조금 더 시련을 겪어야해.'
한연지에게는 당철휘가 거미줄에 걸린 파리로 밖에 보이지 않
았다.
눈을 들어 피폐해진 장원을 쓸어보았다.
'어떤 문파든지 반드시 밀실(密室)이 있기 마련이지. 숨바꼭
질...엉클어진 실타래는 숨은 보물을 찾는 순간 풀리게 되어
있어'
그녀는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비하는 무성한 잡초더미에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 봤다.
'만우당의 제일독은 풍멸환 능히 당문 제일독 무형지독과 자웅
(雌雄)을 겨룰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잠적했을까? 약간의 승산
이라도 있다면 매달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승산이 없다?
풍멸환, 풍멸환에 문제가 생겼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생각은 하늘을 따라 더 깊
은 곳으로 침잠해 들었다.
'어떤 문제인가? 두가지다. 제조에 필요한 독물이 떨어졌거나
제조기법을 잃어버린 것. 독문은 휘귀한 독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제조하기가 어렵다면 있으나마나니까, 흔하게 굴러다
녀는 독물 중 여러개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제조 기법을 잃어버렸을 공산이 크다.'
그때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발.
"일어나, 건방지게 어디서 누워 있는거야."
"씨이! 그러니까 내가 안 온다고 했잖아, 억지로 끌고와..."
퍼억!
"우욱!"
단비하는 느닷없이 어깨를 짓이기는 발길에 짙은 비명을 토해
냈다.
다행히도 발길질은 단 한번에 그쳤다.
"따라와."
"어, 어디 가는데...아,알았어."
당철휘는 뒤켠에서 발견된 묘한 응고액(凝固液)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시, 싫어. 다시는 안 먹을 거야."
퍼억!
"으웩! 아이쿠 배야. 아이고 나 죽네."
"정말 죽여 줄까?"
"아, 아니...먹으면 되잖아."
독가마니가 열 개. 현재 당문 독제실에서 사용하는 가마니가
열두개이니 만우당의 성세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쪽
에는 독을 연단할때 쓰는 참나무 숯들이 아직도 그득했다.
독가마니 아흡 개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러나 가장 안쪽
에 있는 한개에는 시커먼 응고액이 두사발쯤 담겨져 기분 나쁜
냄새를 풍겨 냈다.
"이, 이걸 어떻게 먹어 딱딱한데..."
"혀로 햝아봐."
단비하는 시키는 대로 가마니에 얼굴을 묻고 혀로 응고액을 햝
았다.
혀끝을 톡 쐈지만 약간 단맛도 났다. 냄새는 한 여름에 생선
썩는 냄새처럼 악취가 심했다.
"혀 내밀어 봐."
당철휘는 단비하의 혀가 까맣게 물든 것을 보고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눈감고 가만히 있어."
"앉아도 돼?"
"앉아."
까만 응고액은 독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전신이 짜릿해지면서
손발이 중풍들린 사람처럼 떨렸다.
'마음을 비우고 삶의 의지를 일깨워야 한다.'
눈을 감고 심상(心象)을 일으켰다. 그런 모습이 당철휘의 눈에
는 고통을 참는 모습으로만 비쳤다.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
고 안색이 검게 변하면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으니 말이다.
단비하는 독을 밥처럼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떻게 하면 고통
이 적어지는지 깨달아야 했다. 몸을 움직여도 보고 가문의 독
문심공인 가람신공(伽藍神功)을 운용해 보기도 했다. 당철휘가
무공 연마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비폭십팔수를 전개했다가
초주검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깨달은 사실은 어떤 독이든 전신 모든 부분에 걸쳐
적게든 크게든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은 어떤 몸짓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육체로 안 된다면 정신
으로 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몽상(夢想), 눈을 뜬 맑은 이성 상태에서 가상 현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부유하는 것을 몽상이라 한다.
고통이 일 적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아름다운 집을 짓고 오순도손 사는 꿈도 꿨다. 그러다보면 어
느새 고통이 가라앉고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심상이 그려졌다.
독을 먹고도 극히 태연한 모습. 독충이고, 독사고 무엇이고 닥
치는대로 먹지만 전혀 고통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 소도를 들
고 살점을 베어 낸다. 그래도 아프지 않다. 이 심상은 어린 시
절 혹독하게 받았던 골기도찰법의 영향이리라.
"크윽!"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정작 단비하 본인
은 신음을 흘리는지 조차 몰랐다. 상상속의 자신은 극히 의연
하니까. 사지 근육이 뒤틀리고 땅바닥을 마구 기었다. 이런 행
동도 알턱이 없다. 확고한 심상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심상
은 말한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조금만 있다가 깨어나면 멀쩡할거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조금만
있다가 깨어나면 멀쩡할거야.'
단비하는 심상이 시키는대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
무도 지극한 고통에 억눌려 가슴속 외침으로 스러졌다.
이 각이 지났을까? 단비하는 육체적 고통과 심상을 깨고 현실
로 돌아왔다. 전신에는 땀이 흥건했다. 시커먼 바닥을 마구 뒹
굴어 흙과 먼지로 뒤범벅되었다. 그러나 안색만은 평온했다.
"풍멸환!"
단비하는 당철휘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당철휘는 나뭇가지로 응고된 액을 떼어 내 햇빛에 비춰 보는
중이었다. 단비하의 몸에 난 증세를 보고 풍멸환임을 알아본
것이다.
현재 중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 이십여 종의 독은 너무
도 유명했다.
당철휘가 못 알아 본다면 당문십절 다음으로 독몰을 안다고 자
부하지 못 했으리라.
그의 얼굴에는 놀람과 환희가 교차되었다. 당문의 무형지독과
어깨를 나란히 한 풍멸환 그것이 손에 들어온 까닭이다. 폐허
가 된 고택에 수십 년간 버려졌던 절정독.
아무래도 문주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이 필요했는데 이런 절정
지독을 얻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단비하가 풍멸환을 복용하고도 멀쩡
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단비하의 내성이 워낙 강하니까 하는
생각과 절정독을 손에 넣은 기쁨 탓이었다.
과연 풍멸환의 진독을 복용하고도 무사할수 있었을까? 남궁백
이 천고지독을 가마니째 내버려두고 갈 리가 있을까? 여러 가
지 문제가 훤히 보였지만 모든 점이 묻혀 버렸다. 한연지에게
라도 상의를 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텐데...
당철휘는 두 사발쯤 되는 풍멸환을 조각내어 소매 속에 갈무리
했다.
"뭐 좀 찾았어요?"
한연지가 독단 제조실로 들어오는 순간과 당철휘가 풍멸환을
갈무리 한 시점은 간발의 차였다.
"별로...멸문한 세가(勢家)에 남아 있을 것이 있나? 배운 점은
있어. 이들이 사용하는 가마니는 우리 것보다 배는 크군. 많은
양의 약초를 넣고 진하게 우려 냈다는 이야기가 되지."
당철휘는 한연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일순 한연지의 눈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단비하를 훑고 지나갔
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한눈에 짐작했다. 독이 없는 한 단비
하가 이 자리에 있을 턱이 없고 거지도 도망갈 정도로 처참할
리는 만무하니까.
"하나라도 배우면 좋죠."
붉은 입술, 하얀 이 사이로 실바람이 새어나왔다. 암거미의 꼬
리에서 삐져 나오는 거미줄 같이 하얀 바람이...
* * *
남궁백은 이십 년 만에 그립던 땅을 밟았다.
무너져 버린 기와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풀들이 간난의 세월
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좋았다. 폐허가 되었다는 점만
제하면 떠날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시 시작합시다. 여기, 이 자리에서..."
"푸훗! 장부에게 시집 올 때가 생각나요. 그날 장부는 만취해
서 저기 대청에 누워 계셨죠."
"당신은 별걸 다 기억하는구려."
"첫날인 걸요."
남궁백은 장원 곳곳을 돌아보았다. 대청 곳간...독단 제조실에
들어섰을때 그의 눈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바닥을 마구 뒹군 흔적.
다른 곳은 먼지가 수북한데 제조실만은 깨끗했다.
'이런...'
열려진 가마니에 담겨 있던 미완성의 풍멸환이 깨끗하게 비워
졌다.
그것도 얼마 전에 긁어 간 듯했다. 풍멸환이 묻어 있는 나뭇가
지를 집어 들자 따뜻한 온기(溫氣)가 전해졌다.
'늦어도 일 각...'
순간 남궁백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반 매!"
소리쳐 불렀건만 대답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반 매!"
남궁백은 황급히 뛰쳐 나갔다. 그리고 대청을 바라보는 순간
적이 마음이 놓였다. 아내 반요진은 대청에서 깨진 옥불상(玉
佛像)의 잔재를 주워 담고 있었다.
"반매, 여기 있었구려."
"옥불상이 깨졌어요."
"으....음"
결혼후 일 주년이 되는날 함께 장만했던 옥불상이다. 그때 삶
과 죽음을 같이하자고 맹세했었지. 그런데 깨지다니 이 무슨
불길한 징조란 말인가.
옥불상이 놓여 있던 곳은 사람 손을 탄 듯 말끔했다. 그 뒤...
밀실!
"반매 뒤켠으로 가서 우물속에 숨어 있어요."
"네에?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손님이 온 것 같소. 우리 집에 온 손님이라면 주인
이 맞이해야지."
"장부!"
남궁백은 불안한 신색을 지우지 못하는 아내에게 밝은 웃음을
보냈다.
"나에게는 풍멸환이 있소. 그리고 방문한 손님조차 맞이하지
못한다면 어찌 옛날 성세를 되찾을 수 있겠소?"
"저도 무인의 아내예요. 제 걱정은 마시고 돌아보세요."
잠시 뜨거운 눈길을 주던 남궁백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밀실에 좀 다녀오겠소."
만우당이 보유했던 독물들 대부분은 밀실에 두고 사용했으나
장원을 버릴 때 소각(燒却)했기 때문에 염려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밀실에 있었다.
중원 각지로 흩어진 만우당 문도들의 연락처와 연락 방법이 기
재된 서책, 잃어버린 풍멸환의 제조 방법을 찾아서 중원 각지
로 흩어진 문도들, 그들의 생명이 담긴 책이었다. 제조 방법을
먼저 찾는 사람이 자신이나 만우당 십장로에게 연락하고 그러
면 전부 모이기로 했는데...
물론 자신과 만우당 십장로만이 아는 곳에 보관해 두었지만 손
때가 묻었다는 것만으로도 울컥 불안한 심정이 되어 버렸다.
'십장로와 흩어지는 것이 아니었어.'
남궁백은 제발 십장로 중 한 명이 먼저 와 있기를 바라는 심정
으로 벽면에 튀어나온 돌사자상의 오른쪽 눈을 깊숙이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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