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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구그그긍...!
한쪽 벽면이 밀려나고 시커먼 암동이 눈앞에 드러났다.
남궁백은 손에 철갑조(鐵鉀爪)를 착용하고 손가락 끝부분에 완
성된 풍멸환을 끼워 넣었다. 만우당을 일약 강호 대문파로 성
장시켜 준 철갑조와 풍멸환.
과거 중원에 난립한 독문들은 대개 엇비슷한 독을 지녔다.
문제는 하독 방법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어떻게 하독하느냐에
성쇠를 걸었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육장(肉掌)에 모든 것을 의
존했다. 독을 풀기에 합당한 무공초식과 내공을 개발하기에 여
념이 없었다.
당문은 모든 통념을 일수(一手)에 깨뜨려 버렸다.
조독기, 당문이 급성장했던 이유는 조독기라는 기구를 만들어
냈기 때문. 일전(一戰)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조독기지
만 한 사람이 서너 개를 지닐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개 평범한 무인이 타파(他派)의 장로(長老)들과 평수(平手)
를 이루었다.
수많은 문파들이 이에 편승했고 하독 기구를 만들어 내기에 급
급했다. 설혹 무공이 약하더라도 위력적인 하독기구만 만들어
낸다면 강대문파로 성장하는 혼란스런 시기였다.
독의 개념도 바뀌었다.
독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의가(醫家)의 보조적인 역할로서 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독에 중독 당한 사람들은 제일 먼저 독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하면 즉사시킬 수 있을까? 절대고수조차 항거할 수 없
는 독은 없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가에서 치료할 수
없는 독은?
사람을 치유하는 독을 보유한 독문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
된 독. 사람이 즐겨 찾던 독문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우러러 보
는 독문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탄하며 은거했다. 또 많은 사람들은 강자로
부각됐다.
철갑조, 쇠로 만든 장갑, 하지만 손가락 끝부분에 설치된 독은
무서운 속도로 발사된다. 당문의 조독기를 능가하는 발사기구
였지만 단점이라면 세공품(細工品)인지라 다량으로 만들 수 없
다는 것. 그렇지만 않았다면 벌써 당문을 누르고 제일문파로
성장했으리라.
남궁백은 눈감고도 환히 볼 수 있는 암도를 조심스럽게 내려갔
다. 철갑조는 가슴 부위에 들려져 언제라도 하독할 준비가 갖
춰졌다.
일 장, 이 장....오장.
밀실 끝부분에 이르자 조그만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장원이 평온했을 때는 독공을 연마하든가, 독술을 연구하던
곳. 가장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도 불안했다.
밀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탁자를 옆으로 밀치고 청
석(靑石)을 들어 냈다.
"헉!"
짧은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마땅히 있어야 할 서책이 없어졌다. 만우당 전문도를 소집할수
있는, 전문도의 생명이 걸린 서책인데.
'누군가 이 안에 들어왔다. 누군가...? 혹? 당문이라면? 아니
야 그럴 리가 없어.'
마음으로는 강한 부정을 하고 싶었지만 까닭모를 불안감에 몸
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남궁백은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자신이 거주하던 장원
은 사지(死地)로 변했다. 만우당 전문도 역시 극히 위험하다.
방법은 오직 하나 빨리 모여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밀실을 빠져 나온 남궁백은 몸을 멈칫 세웠다.
'이럴 줄 알았어.'
가슴에 전갈이 새겨진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손님들, 그 중에
서도 가운데 서 있는 염소수염의 사내는 호목(虎目)을 지녀 일
견에도 강자로 보였다.
"당문인가?"
"전위대주 암안독살 당천우라고 하지."
"후후후! 건방지게...감히 전위대주 따위가 나를 죽이러 왔단
말인가?"
남궁백은 철갑조를 들어 공격 태세를 갖추면서 내공을 끌어올
렸다.
일대종사(一代宗師)다운 기백이 힘차게 풍겨 나왔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심정은 무척 조급했다. 아내, 아내는 어디 있는
가,
"그렇게 자신있는 사람이 왜 꼬리를 말았을까? 만우당에서 가
치있는 것은 철갑조와 풍멸환이지. 그 두가지를 넘겨 준다면
물러가겠다. 아! 물론 여기 있던 예쁜 여자도 죽이지 않고..."
당천우는 느물느물 웃었고 남궁백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네놈도 무인이냐? 나약한 아녀자를 인질삼아 위협하는 인간들
이 정도문파라고?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그런가! 불행하게도 여기는 지나가는 개가 없다네."
당천우의 손은 어느새 폭이 넓은 소매 속으로 감춰졌다. 그 속
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당문 십절은 십독서열 이위 투
골독(透骨毒)부터 어떠한 독이든지 마음껏 사용할수 있는 권한
이 있다. 무슨 독을 준비했을까?
당문 십절의 무공은 당문주와 비견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
다. 그런 사람이 준비한 독이라면 방심할수 없다. 자신과 진신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한수 나을지도 모른다.
"아녀자는 풀어 줘라."
"하나만 묻자. 네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풍멸환을 완성
했다는뜻 같은데...완성했나?"
순간 남궁백의 눈동자에 아픔의 그늘이 스쳐 갔다. 이제 자신
과 아내 반요진은 살수 없다는 생각이 스친 까닭이다. 상대는
풍멸환이 완성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타났다. 그 정도는 자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몸을 뺀단 말인가, 설혹 몸을 뺀다 할지라
도 아내가 저들 손에 있으니...
"그래, 제압할 수만 있다면...'
"타앗!"
남궁백은 시전해 본 지 오래된 금붕개천(金鵬開天)의 신법을
펼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일직선으로 당천우를 향
해 쏘아갔다.
허공에서 각(角)이 꺾이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어리석은 짓!"
슈욱! 슈욱...!
당천우는 조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문인이라면 삼류무인도
익히 아는 진천십삼수(震天十三手)를 전개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펼쳐진 진천십삼수는 어떠한 절공보다도 위력이 강했
다. 더불어 쏟아져 나오는 붉은 운무(雲霧)는 거대한 장벽을
형성했다.
"홍무독(紅霧毒)!"
놀란 외침을 터뜨린 남궁백은 몸을 한 번 비틀어 제자리로 돌
아갔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손에 들린 철갑조 손가락이 뚝 잘라
지며 쏜살같이 쏘아진 후였다.
파앗! 슈욱! 치이익...! 쉬익!
기이한 음향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크윽!"
"허억!"
애꿎은 당문 졸개 몇 명이 목을 움켜쥐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은 몇 번 사지를 바둥거리다 축 늘어지고 말았다.
"홍무독! 당문 십독서열 사위..."
"과연 풍멸환이군."
양쪽에서 동시에 터진 말.
남궁백은 진한 절망감을 맛봤다. 자신이 단절된 풍멸환의 제조
기법을 찾아 이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동안 당문은 한 단계
더 진보했다. 육장으로 펼친 홍무독은 조독기로 펼친 것보다
세기(勢氣)가 탁월했다.
육장에서 기구로, 기구에서 다시 육장으로...
조독기보다 배는 빠르다는 철갑조로 풍멸환을 발사했건만 홍무
독과 상잔(相殘)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분명히 독성을 분석한다면 반시뱀과 홍갈(紅蝎)의 독을 합성한
홍무독보다 삼백여 가지 독초(毒草)의 성분을 모두 살린 풍멸
환이 탁월하다.
독의 강세, 하독 기구의 열세.
육장이 기구보다 뛰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편 당천우 역시 놀라고 있었다. 당문이 사천성 독문을 합병
시키고 부산물로 얻은 독서(毒書), 의서(醫書), 무공(武功)을
종합하여 당절삼해(唐絶三解)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년
전.
얼마나 흥분했던가 모든 하독기구를 무용화시키는 당절삼해 어
떠한 하독수법에도 응용할수 있는 당절삼해는 조독기에서 드러
나던 취약점을 모두 보완하면서 빠르기는 비슷했다. 하지만 익
히기가 너무 난해하다는 단점이 남았다. 현재 모두 익힌 사람
은 문주뿐.
당천우는 당절이해까지 완전히 습득했기에 구파일방 장문과도
손속을 겨룰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멸문한 문파, 그것도
구파일방과는 거리가 먼 이류 문파의 당주(黨主)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가까이 있다가 벼락을 맞은 여섯 명의 수하들은 안중에도 없었
다.
"후후후! 좋아. 풍멸환...어느 정도인지 끝까지 견식하겠다.
한마디 해준다면 네 안사람...이미 자진했다."
"뭣이!"
"우리가 나타나는 순간 혀를 물었다. 원한다면 시신을 보여 주
겠다."
"훗훗훗...!"
남궁백은 툴툴 웃었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다.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에
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하여 얼마나 발버둥쳤는데...장애가 되
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을 여자인 것을...
남궁백은 철갑조를 다시 들어 올렸다.
"시신을 보지 않을텐가?"
"볼 필요없다. 준비해라."
"그래?"
당천우는 두손을 소매 사이로 집어넣었다. 이번 일장의 격돌로
승부를 가늠하리라 작정했다. 오지(五指)에서 튕겨 내는 철갑
조, 모두 다섯 번을 사용할 수 있다. 남궁백은 이번 격돌에 나
머지 사지(四指)를 전부 튕겨 내리라.
"타앗!"
남궁백은 금붕개천을 다시 시전했다. 속도를 느끼는 감각은 위
치에 따라 다르다. 밑에서 위로 또는 수평으로...하지만 위에
서 밑으로 쏘아내는 속도가 가장 빠르다. 그런 점에서 금붕개
천은 만우당 문도들이 제일 먼저 익혀야하는 신법이었다.
파앗! 파앗...!
손가락 네 개가 발사되었다. 철갑조에 설치된 풍멸환이 발사된
것이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끊어진 손가락이 튕겨져 나오는 듯
했다.
쉬리릭...!
당천우의 양손에서도 홍무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번 것은
먼저와 조금 달랐다. 파도가 밀려오듯 한겹, 두겹으로 싸인 붉
은 운무는 해일처럼 몰려왔다.
치직! 치지직...!
손가락 네 개는 순식간에 다섯 겹의 붉은 운무를 뚫었다. 하지
만 홍무(紅霧)에 닿는 순간 풍멸환의 독기는 거의 소멸된 상태
였다.
파앗!
남궁백은 호흡을 멈추고 눈을 부릅뜬 채 철갑조를 병기삼아 흩
어진 운무 사이를 파고들었다.
툭! 투둑...!
손가락 네 개가 떨어져 내렸다. 풍멸환이 홍무독의 독기를 이
겨 내지 못한 것이다. 아니 당절이해의 무수한 막(幕)을 뚫지
못했다.
당천우는 연신 소매를 떨쳐 홍무독을 살포하는 가운데 남궁백
이 짓쳐 들어음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오른손으로는 계속 홍무독을 살포하면서 왼손으로는 추혼전 다
섯개를 발사했다.
타앙! 타앙...!
남궁백은 철갑조로 추혼전을 쳐내며 빠르게 다가섰다. 그러나,
"크윽!"
남궁백은 짧은 비명을 토해 내더니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무릎을 끓고 말았다.
"이, 이게..."
뒤로 세 걸음 물러서 홍무독의 영향권을 벗어난 당천우는 가늘
게 웃으며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남궁백, 당신은 너무 홍무독에만 신경 썼어. 나는 홍무독과
함께 무시독(無視毒)을 썼지."
"무, 무시독! 시, 십독 서열 칠위...어, 어떻게 두 가지 독을
한꺼번에..."
"그동안 당문이 이룩한 쾌거라고 생각하게."
"두, 두 개의 독을 한번에...허허허! 크윽!"
남궁백은 몇 번 볼을 씰룩이더니 눈이 돌아가 흰자위를 드러냈
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급속하게 부패하기 시작
했다. 남궁백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여섯 명의 당문도 시신들
도.
무시독. 부시독의 대표적인 독, 대부분의 독이 호흡기(呼吸器)
와혈액을 통해 침투하는 반면 부시독은 피부를 통해 중독된다.
살갗에 닿는 즉시 발진(發疹)하며 급속히 썩어 들어가기 시작
한다.
유일한 해독 방법은 중독된 부분을 절단하는 것, 유일한 단점
이라면 사정 거리가 짧다는 것인데 지금처럼 붉은 운무 사이에
서 발포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으리라.
당천우는 품속에서 투골망을 꺼내 윗단추를 눌렀다. 목표는 철
갑조.
독에는 일시독(一時毒), 지속독(持續毒), 영구독(永久毒)이 있
다.
대다수의 독문은 일시독을 사용한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접전
에서 독을 발포한 후 효력이 오래 지속된다면 시전자도 위험하
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는 살포되는 독을 피하기만 하면 안전하다는 결론
이 되기도 한다.
무시독은 영구독이었다.
살포되면 그 현장(現場)은 영구히 독의 세력권에 놓이게 된다.
현장에 발을 들이민 미물은 물론 중독사한 시신을 먹은 벌레들
까지 죽고 만다.
철갑조를 취하는 방법은 투골망 뿐이었다.
당천우는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남궁백의 시신에 일별을
던지고 신형을 띄웠다.
* * *
어정금(於情金)은 등창난 환자의 고름을 짜내고 고약(膏藥)을
붙여 주었다.
"한동안 고생해야 될 게야. 쯧쯧! 한여름도 아닌데 어쩌다 등
창이났누."
환자가 뭐라고 말했지만 듣지 못한 채 일어섰다. 근래 들어 눈
만뜨면 마음이 불안했던 탓이다.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하고 뒤
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불면증(不眠症)의 시초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모든 불면증에는 원인이 있는 법인데 그원인을 찾을수
가 없었다.
모여드는 환자들, 아프다고 내지르는 비명 소리, 한약 달이는
냄새, 반복되는 일상 생활속에서 특이 할만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너무 과민했어."
스스로 위안을 해보지만 딱히 신경 쓴 부분도 없었다. 괜히 불
안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약재고(藥材庫) 뒤로 향하던 어정금은 문득
불안한 마음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혹시...?"
너무 긴 세월이라 포기했던 일, 그럭저럭 한평생 살아 왔기에
이제는 숨이 끊어질 날만 기다리며 살아 가는 인생, 못다 한
미련은 분명히 있었다.
어정금은 부리나케 약재고로 들어가 가장 안쪽에 놓아 두었던
항아리를 열었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검은 진액이 보였다.
'풍멸환을 완성해야 하는가!'
한참동안 검은 진액을 들여다보던 어정금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수십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독초의 가짓수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분량이 적합치 않은 것도 아닌데 화로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성분이 변하고 만다. 어떤 때는 독초가 졸
면서 뿜어 내는 연기에 증독된 적도 있었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성분이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알수 없었
다.
'휴우! 다 부질 없는 짓...'
어정금은 항아리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포기했으면서도 독초
즙액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 언젠가는 반느시 만들고야 말겠다
는 집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이걸 버려야 해.'
십년지약(十年之約)이 두번 지나갔다.
중원은 광대하다. 그런 만큼 각 지역마다 독특한 자연 환경이
있다.
남방 사람은 북방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고, 북방 사람은 남방
생활에 곤란을 겪는다. 문주 남궁백은 그 점에 착안했다.
문도들은 십장로를 따라 각지로 흩어졌다. 독특한 자연 환경과
동식물군(動植物群)에서 잃어버린 한가지 독초를 찾자는 의도
였다.
생각은 좋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더욱이 흩어진 문도들은 당장
생계 걱정부터 해야 했다. 혼자만의 몸이라면 모르되 식솔들까
지 주렁주렁 달렸으니...처음에는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지
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색해 버렸다.
이제는 만우당이라는 집단도 풍멸환이라는 독환도 의미가 없었
다.
대부분의 문도들은 현재 생활에 자족했다. 젊었을때의 혈기가
감소한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풍멸환의 재현이 불ㄱ능하게 보인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두 번째 십년지약에는 단지 스물네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도 풍멸환의 완성은 요원하기만 했으니 서로의 연
락처와 연락 방법을 적어 주기는 했으되 다음 번 십년지약에는
몇 사람이나 모일지...
어정금은 제법 무거워 보이는 항아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좀처럼 내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아무도 없는 약재고에서는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과연 만우당 일장로 어정금이군."
등에 소름이 쏴악끼치는 싸늘한 일성이 들려 왔다.
'침착하자. 침착해야한다.'
"누구냐?"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두 손은 여전히 항아리를
든 채로...
"당문 전위대 제구력 역주 당중문(唐重文)."
"당문? 전위대?"
"미안하지만 당신이 들고 있는 항아리, 우리가 가져 가야겠
어."
"도둑이.군"
"후후후! 기부했다고 생각해."
어정금은 천천히 돌아서 자신에게 하대를 하는 젊은이를 쳐다
보았다.
'애송이다. 이곳은 이미 포위되었을 터, 일장에 끝내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어른에게 막말을 하다니 버릇이 없구
나."
"어른도 어른 나름 아닌가?"
당중문은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조독기 세 개를 꺼내 들었
다. 극히 완만한 동작이되 두눈은 맹렬히 타 올랐다. 전위대주
와 동배분의 사람, 그에게는 벅찬 상대였다.
"그까짓 장난감으로..."
"장난감에 죽어 보지."
"우선 이 항아리부터 내려놓는 것이 어떠냐? 네놈도 이것이 필
요하다고 했으니까."
"좋아."
어정금은 당중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항아리를
내려 놓았다. 순간,
쉬익!
머리 위에서 빠르게 내리꽂히는 검날.
"하하하! 당문도 많이 변했구나. 겨우 암습이나 일삼다니."
대성을 토해 내며 몸을 슬쩍 돌려 일검을 피한다음 빠르게 성
명절기 구음장법(九陰掌法)을 전개했다.
후...우! 슈...욱...!
구음장은 음유롭다. 때문에 장법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격타음도 크지 않다. 눈에 띄는 상처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장을 격중당하면 연속되는 나머지 팔장을 맞지 않을
방도가 없고, 결국 내장이 토막나는 고통과 함께 절명한다.
천장을 뚫고 공격한 인물은 구음장을 잘 아는 듯 가벼운 일장
조차 맞받지 않았다. 다가오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공격했다.
타악! 타악 시
당중문의 손에 든 조독기에서 흰 덩어리가 쏘아졌다.
"건방진 놈!"
버럭 일갈을 토해 낸 어정금은 옆구리를 찍는 일검을 피하며
양손을 활짝 펼쳐 구음장의 최후절초 한월광휘(寒月光輝)를 떨
쳐 냈다. 차가운 달빛이 온 누리를 비추듯 쌍장을 펼치며 마치
전신이 노출된 듯하다 하여 붙여진 한월광휘,
퍼억!
"으아악!"
천장에서 암습한 당문도는 가슴과 복부에 각기 일장을 얻어맞
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일장은 일장이되 연속적으로 가격한
구장(九掌).
열여덟 번의 가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조독기에서 발사한 흰 덩어리는 어깨 부위를 강타했다.
"크윽!"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선 어정금은 안색이 파래졌다. 발가벗
고 북풍한설에 서 있는 듯 심하게 떨려 왔다. 이빨이 덜덜 떨
리는 데 반해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후후후! 과연 어정금이오. 전위대원 한 명을 격살하다니. 당
신의 무공이 높음을 인정하겠소. 하지만 승리는 내가 가지겠
소."
당중문은 또 하나의 조독기를 들어올렸다.
"비록 십대절독에는 끼지 못하지만 당신의 명줄은 충분히 끊을
수 있을 게요."
"호, 혹시...한매단(寒梅丹)?"
"맞소. 한매단은 균(菌) 덩어리요. 독기를 흡입하지 않으려고
호흡을 막았지만 어리석은 짓이었소."
"허허허...! 아직은...아냐...너도....중독..."
문득 당중문은 두발이 간지러웠다.
'응?'
고개를 숙여 발 밑을 쳐다보자 아주 조그만 흰개미들이 바글거
리고 있지 않은가,
"제길! 백마의(白痲蟻)에게 당했군."
실수다. 구음장에 신경 쓰느라고 백마의가 풀린 것을 보지 못
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에 승패가 판
가름난다. 시전자는 항시 자신이 시전하는 독에 대한 해약을
지니고 다닌다. 자신이 살포한 독에 중독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니까, 먼저 죽이고 해약을 빼앗는 사람이 이기는 승부.
"죽엇!"
탁! 타타탁!
조독기 세 개가 일제히 발사되며 흰 덩어리가 쏘아져 나갔다
휘익!
어정금은 황급히 신법을 펼쳤지만 이미 한매단에 중독당한 몸
이 제대로 말을 들을 까닭이 없었다.
퍽! 퍼억! 퍽!
빗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신을 파고드는 한매단의 독효는 무
서웠다.
"으으...!"
가는 신음을 토해 내던 어정금은 기어이 밑둥 잘린 고목처럼
무너졌다.
'실수...백마의를 너무 늦게 풀었어.'
순간 당주 남궁백의 위풍 찬 모습이 그려졌다. 활기에 찼던 장
원도, 꿈에 불탔던 십장로들도...태상당주(太上黨主) 남궁전
(南宮電)이 풍멸환의 제조기법을 가지고 실종되지만 않았어
도...
어정금은 쓰러진 자신을 갉아먹다 한매단의 독효에 죽어 가는
백마의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만우당의 마지막
생존자였음을 곧 깨달았다.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만우당주와
십장로, 동고 동락했던 문도 이백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까.
* * *
한연지는 마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골몰했다.
한가(韓家)는 험한 사천성의 지리학(地理學)에 달통한 가문이
다. 지리를 알자니 기문도해(奇門圖解) 역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가문들이 의독의 명가들인 반면에 한가는 기관
진학과 병가(兵家)로 이름을 떨쳤다.
만우당에서 비밀 기관을 찾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비록 절
묘하게 안배된 밀실이었지만...아직까지 중원에서 토목 건축에
관한 한 한가를 따를 문파는 없었다.
만우당의 밀실은 은밀함에 치우친 나머지 정교함이 뒤졌다.
북방(北方) 밀실은 웅장하며 간단한 반면 남방(南方) 밀실은
정교하며 섬세했다. 너무 섬세한 나머지 커다란 허점을 드러냈
다.
돌사자상.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 되었지만 기관진학에 조금이라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보면 한눈에 기관장치임을 알아볼 게다.
아마도 만우당에는 기관진학에 일가견있는 사람이 있었을 게
고, 그 사람의 얄팍한 지식을 절대인 양 믿었을게다.
< 우당 잠적지(潛跡地) 발견. 중원 각지에 산재해 있음.
그들의 소재지와 연락 방법을 기재한 책자를 발견했음.
상황으로 미루어 만우당이 혈반사접을 개발했다고는 믿기 어려
움 >
당철휘는 한연지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전서구(傳書鳩) 발목에 매달아 날려보냈다. 그리고 일 각,
대붕파의 전 근거지가 있었던 향계현(香溪縣)으로 향하는 일행
앞에 전위대 제이력 팔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만우당에서 습득한 책자를 원했다.
책자를 주는 것은 문제될 것도 없었다. 윤신처가 기재된 책자
를 보고 느낀 점은 현재 만우당으로서는 절대 혈반사접을 만들
수 없다는 것. 중원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무슨 수로
혈반사접을 만들겠는가.
독에 고견을 가진 사람이 만들수있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
었지만 당철휘는 일축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현재 독문들이 지닌 능력으로 그만한 독접을
만들어 내려면 족히 백 년은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
였다. 조직, 조직의 힘만이 독접을 만들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
면서...
한연지는 습득한 책자를 군소리없이 건네 줬다. 하지만 머릿속
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은...
'너무 빨리 나타났어!'
전위대원들이 어떻게 서고현으로 찾아왔을까? 사마전이 연락을
취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너무 빠르다.
'전서를 날리고 일 각...일 각만에 올수 있는 거리라면...'
만우당은 서고현 중심에 위치했다. 최절정의 신법을 전개한다
해도 서고현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들은 연락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이 된다.
'만우당은 초토화(焦土化) 되었겠군.'
다른 사실은 예측할 수 없지만 만우당이 완전히 멸문했다는 추
측만은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은신처가 적혀 있는 서책을
원할 까닭이 없으니까.
'우리들의 뒤를 따른다 이거지 무서운 계략이다. 당문주는 이
기회에 중원에 산재한 오대독문을 말살하려 한다. 문주는 내가
오대 독문부터 뒤지리란 것을 짐작하고 있었어.'
자신의 생각이 읽힌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설혹 부모라
할지라도 기분이 나쁜데 하물며 일가를 합병시킨 당문주라
면...
'어쩌면 내가 당철휘를 장악하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
군. 아니,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은 느낌이야. 혈반사접을
멸살시키는 것은 전위대주의 아들 당천우나 중위대주의 아들
당동한이 더 낫지 않은가. 경험이 있으니까.'
한번 의심이 들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만약 당천우나
당동한과 동행을 했다면 자신이 휘어잡을 생각을 했을까? 결론
은 아니다.
그들은 문주 자리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현 당문을 더 크게
발전시킬 위인은 못 된다. 그러나 그들이 나섰다면 무산삼괴에
게 그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사마전? 장강 선상에서 보여 준 사마전의 강검은 일품이었는데
과연 무산이괴와의 싸움에서 그는 전력을 다했을까?
어쩌면...무산파파의 손녀 갈홍아가 민선에 타는 것을 알았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여객선이 아닌 민선을 탄 점도, 오
수로의 부채주가 당했는데도 장강십팔채에서 아무런 보복을 하
지 않고 있는 점도 의문스럽다.
만약 당철휘가 갈홍아에게 한 짓까지 예측했다면...당문주 당
기룡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자신들은 그가 정해 준 선로(線
路)대로 걸어가며 그가 계획했던 대로 일을 풀어 주다가 아무
것도 얻는 것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연지는 뒤로 좀 처져서 따라오는 단비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 인간도 마음에 걸려...'
무산삼괴 중 삼괴 독안독귀조차 죽음을 면치 못한 무애곡에서
혈반사접올 채취했다? 무심히 지나쳤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였다. 단지 내성이 강하다는 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당 대가. 인간이 독에 얼마나 버틸 수 있죠?"
바람처럼 물어 온 말에 당철휘는 가는 미소로 먼저 대답했다.
귀찮은 존재 단비하를 멀찌감치 떼어 놓고 밀어(密語)를 주고
받으려 했건만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어 못내 답답했는데...
"체질에 따라서 차이가 많지만 진독을 푼다면 최대한으로 잡아
도 일각이겠지."
"만약 소림방장(小林方丈) 무상대사(無常大師)라면요?"
"무상대사?"
"네."
"무상대사는 중독시킬 수 없어."
"왜죠?"
"중독시키기 전에 먼저 죽으니까."
"푸훗! 당문 제일독이라는 무형지독을 사용해도 그럴까요? 무
색 무취의 절대독이라고 자랑하잖아요."
"무형지독의 하독 방법은 문주만 아니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힘들걸."
"만약 중독시켰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단정할 수 없어. 당문과 가장 근접해 있는 문파는 청
성파야. 하지만 한매도 알다시피 우리가 한수 양보하는 입장이
잖아."
"그점이 궁금했어요. 왜 그렇죠?"
"후후후! 내 안사람이 되려면 우선 독공부터 익혀야겠군. 독에
대해서는 완전 백지나 다름없는데."
"귀속칠가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요. 우선 하던 말이
나 마무리 짓죠."
당철휘는 냉담한 말을 듣고 자신이 문주나 되는 양 미안해 했
다.
"한매는 밥을 먹다 얹히면 어떻게 하지?"
"운기조식하죠."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말해 보겠어?"
"호호호!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다면 독성분이 아무리 강
해도 소용없나요?"
한연지는 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내공을 연마한 무인들은 약을 상용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웬만한 병은 모두 내기(內氣)로 다스린다.
당철휘의 말대로 위경련(胃痙攣)이 온다면 간유혈(肝兪穴), 담
유혈(膽兪穴), 거궐혈(巨闕穴)에 내기를 집중시킨다. 그러면
각 혈도에서 은은히 온기가 발생하며 통증을 제거하는 액(液)
이 분비된다.
독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내공이 강한 무인이라면 내기로 독
기를 유도하여 특정 부위에 몰아 넣을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기를 소멸 시키리라.
"전과는 다르지. 지금은 당문도 많이 발전했으니까. 만약 지금
부딪친다면 해볼만 하겠지?"
한연지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만약 당철휘의 말대로 지금 상태
에서도 승산이 있다면 문주 당기룡이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그는 효웅이니까. 그 점을, 당기룡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을 알
아야 한다. 그전에,
"단비하 저 인간은 내성이 얼마나 강한 거예요?"
"응?"
당철휘는 인상을 구겼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어쨌든 단비하의 말만 나오면 신경이 거슬렸다.
"단비하는 어째서 독을 복용하고도 죽지 않는 거죠?"
"하하하! 제놈이 독을 복용하고도 안 죽어! 하하하! 저놈이 복
용한 것은 극히 미량(微量)이야. 그것도 물과 희석해서 인체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하지만 보통 인간보다 오래 버
티는 것은 사실이야."
"혈반사접에게 당한다면요?"
"제놈이 살수 있나."
순간 한연지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피독
약의 효력은 두 시진이라 했다. 그런데 단비하는 무애곡에서만
하루를 보냈다. 혈반사접을 만나지 않고 채집을 할수 있는가?
만약 혈반사접을 만났다면 왜 죽지 않았는가? 멍청이가 아니라
는 결론이 유추된다.
"정말, 정말 죽게 되나요? 죽지 않을 수는 없나요?"
"한매! 왜...?"
한연지는 당철휘의 말을 마저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마상에서 조는지 꾸벅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단비하, 그가 했던
행동을 돌이켜 보면 가장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했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으되 그 덕을 본적이 많았다.
'문주...무서운 계략이지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단비
하...저 인간은 멍청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최대의 변수...'
모든 비밀을 어렴풋이 알것도 같았다.
자신과 당철휘, 단비하는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일
(一) 조(組)였다. 그리나 종국에 단비하는...그렇게 만들어서
는 안 된다. 당문주 뜻대로 일이 풀린다면 재미가 없다.
단비하, 저 멍청이에게 눈을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한연지는 고개를 들어 지는 저녁놀을 바라봤다.
"참 아름답군요."
복잡한 심사를 표현할길 없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당
철휘는 제기하던 의문을 접어 버렸다. 한연지가 생각했던 부분
까지 근접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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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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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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