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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일파(一派), 대붕파(大鵬派)이 멸(滅)
( 一 )
십여 일의 여정 동안 한연지는 단비하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그가 정말 멍청이인지 끊임없이 감시했
다. 하지만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틀림없는 바보였다.
만약 바보가 아니라면 정말 똑똑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당문사
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될 것이다.
한연지는 고민스러웠다.
당철휘가 되었든 단비하가 되었든 그 누구든 간에 자신의 치마
폭에 가둘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의 미모는 타고났다고 자부
했다.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단비하를 택한다면 고난을 겪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당철휘에
게는 당문이라는세력 기반이 있다. 역시 단비하보다는 당철휘
...'
생각을 굳혔다. 이제 남은 일은 단비하를 제거하는 일.
그렇다고 정말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를 달아서라도
당문을 향해 대들게 만들어야 한다.
한연지는 당철휘를 돌아봤다.
"내성이 강한 인간에게 만성독약(晩成毒藥)을 복용시키면 어떻
게 되죠?"
"전에도 말했지만 진독을 투여한다면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있나요?"
"만성독약은 필요 없을것 같아서..."
"구하는 방법은요?"
"시중에 나가면 하오문도(下五門道)들이 사용하는 것을 구할수
있소, 천박하기 이롤 데 없지만 복용 기간을 늘리면 당문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수 있지."
"구해 오세요."
"응? 누구에게 복용시키려고? 설마...나는 아니겠지?"
"단비하."
"아니, 저런 멍청이한테...그냥 일장에 때려 죽여도..."
"구해 오세요."
한연지의 눈은 초롱초릉하게 빛났다.
당철휘는 그 눈동자가 하늘에 떠 있는 어느 별보다도 영롱하다
고 느꼈다. 보드라운 살결, 까만 눈동자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
이 일었다.
하지만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에 손을 댈 용기는 아직 없었
다.
"단비하를 경계하는군."
당철휘는 한연지의 어감에서 그녀의 심중을 파악했다.
"필히 죽여야해요. 완전하게 목이 떨어지는 것을 봐야만 해
요."
"왜 그렇게 경계하지?"
"당신보다 똑똑하니까."
"뭐? 하하하..."
한연지는 가가 대소를 터뜨리는 당철휘를 보면서 가늘게 한숨
지었다. 당철휘에게 단비하만한 머리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
까. 아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을수도 있다. 뛰어난 머리는 자
신에게 있지 않은가.
"웃지 마세요. 당신은 단비하에게 발목을 잡힐 거예요. 그 전
에 제거해야 돼요."
당철휘는 웃음을 뚝 그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튼 소리를
할 한연지는 아니었다.
"그럼 지금..."
"아니요. 천천히...써먹을 만큼 써먹은 다음에..."
당철휘의 눈에 폐허가 된 대붕파 장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
다. 놀이터에라도 온 듯이 활개치며 다니는 단비하의 뒷모습만
이 뚜렷하게 부각될 뿐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적의가 하나가
득 담겨 나왔다.
한연지는 그런 눈빛을 읽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당철휘와 단비하의 싸움이 아닌 문주
와 자신의 싸움이...단비하는 당철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문주의 손에 죽어야 한다. 문주가 단비하에게 정신을
빼앗기는 틈, 그 틈만 발견되면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
다.
- 대붕파는 특이한 분야를 개척한 문파다. 문자(蚊子:모기),
취충(臭蟲:빈대), 도충(跳蟲:벼룩) 따위...그런 미물들에게 독
즙을 먹여서 강력하게 만들었지. 그들이 활개치는 동안은 마무
도 근잡할 수 없었어. 혈반사접을 만들어 냈다면 그들이 가장
유력해.
한연지는 오는 도중 당철휘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벼룩이나 빈대같이 저항력이 약한 미물에게 어떻게 독성을 부
여했을까?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많다지만...그 말이 사실이라
면 혈반사접을 만든 문파는 대붕파가 유력하다.
한연지는 폐허가 된 장원으로 들어서면서 몸이 근질거려 옴을
느꼈다. 꼭 무엇에 물려서가 아니라 거지와 몸을 부딪쳤을때
드는 찜찜한 그런 느낌이었다.
"히히히! 여기는 이상한 데가 많다."
벌써 한바퀴 돌았는지 단비하가 튀어나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어디가 이상한데?"
"뒤에 가면 조그만 물 웅덩이가 무척 많아."
"그래?"
"같이 가자. 내가 구경시켜 줄게."
옷소매를 잡아끄는 모습이 천진스럽기 짝이 없다. 이 모습 어
디에 그만한 지략이 숨어 있을까? 무공은 익혔을까? 익혔을 것
이다. 독공은? 독에 그만큼 중독되었으니 틀림없이 독공도 익
혔을 게다.
단비하를 따라 뒤켠에 이르자 삼십여 개에 이를 것 같은 물 웅
덩이가 보였다. 넓이는 두칸 깊이는 세 칸정도. 안에는 혼탁한
물이 차 있는 것도 있었고 말라버려 텅빈 곳도 있었다.
"독물을 키우던 곳이야."
뒤따라 온 당철휘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독문 사람이니
이와 벼룩 등에게 독성을 부여한 현장을 답사한다는 자체가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여기서 문자, 취충 따위를 키웠다고요?"
"그래. 무슨 독을 사용했기에 독성을 부여할 수 있었는지...그
것은 대붕파만의 비밀이지. 흔적을 더듬어 보면 무슨 독을 사
용했는지 알아낼 수 있을거야."
당철휘는 녹피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야! 단비하!"
"응? 왜?"
"이리와 봐."
"싫어. 또 때리려고."
"이리 안와? 안 때릴 테니까 이리 와."
당철휘는 엉거주춤 다가온 단비하를 물 웅덩이로 힘껏 떠밀었
다.
첨벙!
"씨이! 내 이럴 줄 알았다."
단비하는 태연한 표정으로 물속에 주저앉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름에 가까운 계절이라 뜨거운 뙤약볕이 물을 그립게 했던 탓
이리라.
"독이 없었나?"
당철휘는 괜히 긴장했다는 듯 한연지를 돌아보며 싱겁게 웃었
다. 그런데 오히려 한연지의 표정은 긴장하고 있지 않은가.
두 눈을 부릅뜨고 뚫어지게 단비하를 응시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당철휘는 자신도 모르게 가는 신음을 토해
냈다.
물장난을 치고 있는 단비하, 그의 양미간에 검은 기운이 형성
되었다. 독에 중독된 현상 물경, 이십 년 동안 방치된 물웅덩
이, 그 속에는 아직도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지독한 독이
잔재했다.
단비하는 아무 증세도 느끼지 못하는 듯 물장난을 계속했다.
히히히, 철없는 웃음 소리만이 아무도 없는 뒤켠을 울렸다.
무척 혼탁한 물이라서 만지기가 꺼려질 정도지만 단비하는 개
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순간, 갑자기 단비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쉬더니 물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저, 저거..."
한연지는 몸을 날리려 했다. 단비하를 지금 죽여서는 안된다.
"움직이지 마."
크게 터진 당철휘의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여, 여긴 독지(毒地)야. 한걸음만 잘못 움직여도 저런 꼴이
돼."
당철휘는 천천히 주저앉더니 녹피장갑을 낀 손으로 푸석한 흙
을 만졌다. 천하절독이라도 만지듯이 신중한 행동이었다.
"치잇! 당했어, 여긴 완전 도충 천지야. 아마 우리 몸에도 옮
겨 붙었을걸."
당철휘는 품에서 옥병을 꺼내 푸석한 흙을 담고 마개를 단단히
막았다. 그리고 녹피장갑을 조심스럽게 벗어 던져 버렸다.
분명 녹피 속에는 도충이 우글거릴 테니까.
"일단 물러가자."
"단비하는..."
일순 당철휘는 이상하다는 듯이 한연지를 올려봤다.
"저놈은 귀찮기만 한 놈이야. 혈반사접을 채집해 오는 것으로
저놈의 용도는 끝났어. 그런데 왜 저놈에게 그렇게 연연하지?
만성독약까지 복용시킬 정도라면 상당히 높은 비중인데..."
"휴우! 아직도 모르겠어요? 문주께서 단비하를 왜 동행시켰는
지...단비하는 대가와 맞먹는 독술의 명인이에요. 대가는 독을
만들고 하독하는 데 성취를 얻었지만 단비하는 독을 파악하고
해독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요. 대가가 공격을 한다면 단비하는
수비를 맡아야 해요."
"그런가? 후후후! 그러면 당신은 두 남자를 조정하는 머리 역
할을 하겠군."
"맞아요. 그것이 문주가 우리 삼 인을 동행시킨 이유예요, 만
약 단비하가 없다면 우린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거예요."
"일단 뭍러가지. 목옥부터 해야될 거야. 도층의 특성은 흡혈
(吸血)이니까 간지러운 곳이 있으면 해독제를 발라야 할거
고...원래는 발진열(發疹熱)을 매개시키는데 그밖에 어떤 독이
포함되었는지는 모르겠어."
"그걸 알려면 단비하를 데려가야 될 텐데요?"
"하지만 지금 저놈 몸은 도충으로 우글거릴 텐데."
"좋은 방법이 있어요."
한연지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결에 있던 노송(老松)으로 신형
을 날렸다. 푸른 검광이 번쩍 하는 순간 이미 커다란 가지가
잘려져 떨어졌다. 놀랍도록 빠른 신법에 너무도 쾌속한 검공이
었다.
"그걸로 단비하를 집어서 던져요. 손을 댈 수 없으니 이런 방
법으로라도 데려가야죠."
당철휘는 한연지의 말에 따랐다.
휘익! 쿵! 휘익! 쿵...!
기묘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개울물에 빠지기 전까지 한동안...
"도충의 몸 빛깔은 다갈색 내지 흑갈색인데 이놈은 청색이야."
목욕을 마치고 새옷으로 갈아입은 한연지의 모습은 수많은 사
람들 틈에 섞여도 한눈에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에서 풋풋한 냄새가 풍겼다.
당철휘는 그런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탁자에 놓인 옥병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낸 바를 설명해 줬다.
"도충을 이렇게 만드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거야. 이놈은
한번에 약 열 개의 알을 낳지. 삼 개월 동안 꾸준히 낳으니까
도합 사백여 개가 되는 셈이야. 수명은 적온(適溫)에서 삼백
일 내지 오백 일."
"도충은 독에 접하는 즉시 죽어 버릴 텐데요."
당철휘는 고개를 돌려 머리를 말리는 한연지의 모습을 힐끔 쳐
다보고는 다시 말을이었다.
"평범한 도충은 더듬이가 짧고 굵으며 세 마디야. 밑마디는 매
우 크고 발목마디는 다섯마디. 하지만 이놈은 더듬이도 네 마
디이고, 발목마디도 일곱 마디야. 중요한 것은 피각을 찌르는
입이 퇴화되어 흡혈을 할 수 없어. 그래서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지. 그런데 단비하는 혼절했단 말이야. 그놈을 개울물에
씻기지 않는건데..."
"혼절한 원인은 찾아낼 수 있지 않나요?"
"찾아냈어. 광독(鑛毒)이야."
"광독이요? 그런 독은 금시초문인데요."
"징니연(澄泥硯)이야. 강물 속에 침전된 고운 진흙을 정선하여
구워내면 단단한 돌이 되지. 웬만한 돌보다 더 견고해. 대붕파
는 미물들에게 징니연을 먹였어. 그런 놈들을 진화(進化)시켰
지. 한번 물리면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질 거야."
"전신이 마비된다는 말인가요?"
"그런데 묘한것은...단비하에게선 왜 그런 증세가 일어나지 않
을까, 하는 점이야. 억지로 추측한다면 내가 채집한 이놈처럼
진화 과정에서 도태한 놈에게 당했다고 밖에 할수 없는데..."
"대붕파의 문도를 만나보면 알수 있겠죠."
"응? 대붕파 문도들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는 말이야?"
"그럼요."
순간 소자(梳子)로 머리를 쓸어 내리던 한연지의 신형이 번개
처럼 튕겨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고 빠름이었다.
우지직, 문이 부서지며 너무 놀라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점소이의 모습이 보였다. 한연지는 이미 그의 완맥(腕脈)을 거
머쥔 상태였다.
"네놈이 대붕파의 졸개냐?"
"무, 무슨 말입니까요. 소저."
"흥! 네놈이 제 명을 다하기 싫은 모양이군."
싸늘하게 냉소를 터뜨린 한연지는 점소이를 방안으로 끌고 들
어왔다.
"크윽!"
한데 점소이는 입으로 검은 피를 주르륵 홀려 내며 절명하고
말았다. 입에 문 독단을 깨문 듯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적갈색
으로 변했다.
"지독한 놈이군."
한연지는 이미 죽은 점소이의 완맥을 놓고 다시 동경(銅鏡) 앞
에 앉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건만 자신과는 상
관없다는 듯 극히 태연한 행동이었다.
"이제는 어쩔 참이야. 대붕파의 졸개마저 죽었으니..."
당철휘도 점소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색을 보이
지 않았다.
"대붕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뭐! 폐장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도충의 생명은 삼백 일에서 오백 일 사이랬죠? 그렇다면 주둥
이가 퇴화된 도충이 이십 년이나 살이남을 수 있었을까요? 대
가가 채집한 도충은 근래에 버려진 도충이에요."
"그렇군..."
당철휘는 한연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동경에 비친 한연지의 눈매가 가늘게 웃는 듯 했다. 조금만 생
각하면 알수 있는 일이 아닌가.
"단비하의 상세를 보고 오세요. 그리고 그가 일으킨 증세를 연
구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알았어."
당철휘는 힘없는 소리로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단비하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증세를 면밀히 관찰했다.
고통이 없는 대신 무력감(無力感)이 몰려왔다. 오랫동안 병석
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사람처럼 노곤했다.
'대붕파는 미물을 사용한다. 그런데 대붕파라...'
문파의 이름은 사용하는 무공에서 착안하거나 위치한 지역에서
따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대붕파는 전혀 상관없는 이름
을 사용했다. 왜일까? 그저 하늘을 나는 대붕이 부러웠기 때문
일까?
'미물과 대붕과의 상관 관계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사
용하는 독에 대해서도 알게 될 텐데...'
몸을 추슬러 일으켰다. 물 먹은 솜처럼 묵직하기는 했지만 그
런대로 거동하는 데 불편은 없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잡다한 독을 복용해 봤지만 이런 독은 처음이
었다. 도저히 종류를 알수 없는 독, 과연 혈반사접은 대붕파에
서 만들었을까.
단비하는 방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향계현은 이십 년 전 대붕파의 보호를 받던 곳.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악 감정을 풀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통해 대붕파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할 생각이었다.
* * *
목삼상(睦三尙)은 눈곱이 떨어지지 않은 눈을 들어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가야 찾아오는
사람 한 명 없는 초라한 모옥(茅屋). 죽은 귀신들도 몸을 움츠
린다는 흉가(凶家)를 찾아오는 사람이 다 있다니...
"대붕파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씀해 주시겠소?"
젊은이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뱃속까지 맑은 계류(溪流)로 씻
어 내리듯 시원했다.
"대, 대붕파..."
곧 죽어 관 속에 들어갈 것 같은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젊은이는 뉘시오?"
"단비하라 합니다. 사천성 단가의 후손이지요."
"단가의 후손? 낄낄낄! 망해 버린 집안에도 후손이 있었나?"
노인은 괴기롭게 웃으며 겉옷을 들어 잡던 이를 계속 잡았다.
손끝을 따라 제법 통통한 이가 핏물을 튀겨 내며 으스러졌다.
"일어서는 가문이 있는가하면 망하는 가문도 있는 게 아닙니
까. 망했다고해서 자식도 낳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응? 낄낄낄! 하기는...원래 가난하고 못 배운 인간들이 자손
은 많은 법이지."
"대붕파에 대..."
"나는 대붕파 모르네."
노인은 말허리를 끊고 일언지하에 딱 잘라 말했다. 어디서 그
런 힘이 솟았는지 우렁찬 일갈이었다.
"목삼상, 대붕파에 멸문한 대도장(大刀莊)의 장주. 무공 절기
는 풍뢰연환십삼도(風雷連環十三刀). 영원히 도를 잡지 못하게
양쪽 엄지손가락이 잘렸음. 또 뭐가 있더라. 음...! 일가 식솔
은 대봉파의 대공격시 몰살함..."
"네놈이...죽고 싶으냐?"
"신법과 퇴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양쪽 발목에 있는 복류혈(復
溜穴)이 잘렸음."
"이, 이놈!"
"무릎 관절을 사용할수 없게끔 곡천혈(曲泉穴)을 파괴당함."
"네, 네놈이 정말..."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오래 전에 끝났지."
"네 이놈!"
목삼상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한걸음
도 내딛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발없이는 앉은뱅이
나 다름없는 신세. 화난다고 마음대로 분풀이 할 계제도 못됐
다.
"후후후! 화 나시오? 이십오년이나 지났으면 초연할때도 됐는
데..."
"...!"
목삼상은 떨리는 손으로 겉옷을 집어 들었다. 계속 이를 잡으
려고 했지만 그렇게 많던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당신만 당한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나도 다리가
잘리고 손가락이 잘렸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문을
위한 충견(忠犬) 노릇뿐..."
톡! 톡...!
이가 으스러지면서 튀겨 내는 피가 손톱을 빨갛게 물들였다.
"대붕파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주겠소?"
"알아서 뭐 하려고?"
"혈반사접이란 나방을 만난 적이 있소.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저주의 마물이었소. 그런 마물을 만들어 낸 문파가 혹시 대
붕파가 아닌지 궁금하오."
"대붕파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치겠느냐?"
"내가? 어림없는 소리...그것은 당문이 할 일이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충견 노릇뿐이라
고..."
"불쌍한 놈이군."
"노인보다는 좀 나을 테고..."
목삼상은 단비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내를 알수 없는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덮여 있다. 무척 많은
한을 간직하였으면서도 겉으로 표출할수 없는 심사가 읽혀졌
다.
"준비한 독을 알면 대비하기도 쉽지. 독이란 풍(風), 수
(水), 화(火)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
목삼상은 계속 이를 잡으면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영원히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십오년 전의 일을 되새김하기도 싫은 치
욕의 순간을.
"하지만 대봉파의 독은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네. 내가
잡고 있는 이놈처럼 아주 하찮은 미물과 사는 사도(邪道) 무리
들..."
잠시 이빨을 부드득 갈던 목삼상은 핏발 선 눈을 들어 먼 하늘
을 바라보았다. 격동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했다.
"그들은 대도장에 이르자 하얀 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네. 그리
고 가죽주머니를 던져댔어. 대붕파? 흥! 잡놈파라는 게 어울리
겠지. 장원에 있던 사람들은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네. 막을 수
도 없었지. 검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전부...죽었다네."
"그토록 강력했다면 당문도 상대가 안되었을 텐데..."
"당문뿐인가 천하를 수중에 넣을 수도 있었지. 그래서 대붕파
라는 문호를 사용했다네 대도문 정도는 아침 요기감이었어."
'그런가? 대붕파가 단지 그런 의미뿐이었던가...?
"혹시 잠적한 이유를 짐작할수 있겠소?"
"아무리 독성이 강해도 미물인 이상 어찌 천적이 없겠는가. 일
독문인지 어딘지에서 천적을 개발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
네. 그런 풍문이 들린지 얼마 안 되어 대붕파에는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어."
"잘 들었소."
"가려나?"
"사람들이 말합디다. 대붕파에 가장 원한이 깊은 사람은 목삼
상 당신이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건도인(乾導仁)이라고..."
"건도인? 흥! 배알도 없는 놈이지."
"만나 볼 생각이오. 그도 알고 있는게 있을 테니까."
"하나만 물어 보자. 내가 알기로 단가는 백년 전에 당문에 흡
수됐어. 자네의 꿈이 무엇인가? 가문을 재건하는 건가? 아니면
당문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건가?"
"글쎄...어려운 질문이오. 가문을 재건한다? 당문에서 한자리
를 차지한다?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소? 무림이란 자체가
물고 물리는 싸움판인데."
"그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설치고 다니나 그저 굿이나 보고 떡
이나 얻어먹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그것 뿐인가?"
"그것 뿐이오."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단비하는 한동안 목삼상의 눈을 쳐다보았다. 꿈을 잃은 인간,
좌절하고 타락한 인간이 앉아있었다. 그 모습은 꼭 자신의 모
습이었다.
"한때는 독을 알고 싶었던 적도 있었소. 독문의 조사(調査)들
이 꿈꿨던...사람에게 득이 되는 독을 만들고 싶었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을 가볼 생각이었소. 갈
수만 있었다면..."
목삼상에게 한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스스로 넋두리 한 말이
었다.
"후후후...!"
목삼상은 힘들게 웃었다.
지금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조차 의미가 없었다. 이 젊은이는
떠나가면 그뿐이고 자신은 다시 외롭게 지내야한다.
사립문을 밀치고 나가는 단비하의 고독한 뒷 모습을 잠시 쳐다
보던 목삼상은 이가 득실거리는 겉옷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 * *
건도인은 다기(茶器)를 씻으며 쌓이고 쌓였던 불만을 토해 냈
다.
"제길! 내가 종이야 뭐야. 저는 자빠져 잠만 자면서 나만 뼈빠
지게 일해야 되는 건 또 뭐야. 일하려면 같이 해야될 거 아
냐."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벼락처럼 들려 왔다.
"일 할 거야, 말 거야? 그래도 이만한 다관을 가진 게 누구 덕
인데 그래?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사내가 염치가 있어야지!"
"아, 그래서 지금하고 있잖아."
차를 즐기던 사람들은 부부간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쓴웃
음을 베어 물었다. 하루이틀 본것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듣
는 싸움이요 광경이었다. 모든 사내 망신을 혼자 다 시키는 건
도인이라는 작자는 마누라의 일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빌어먹을 내 다음 세상에서도 향계현에서 태어난다면 차라리
개가 된다."
마누라가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건도인은 문을 열
고 들어서는 미인을 보자 얼이 빠져 버렸다.
"세, 세상에 저런 미인이...."
그뿐만이 아니라다 관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길이 일제히 한여
자에게 쏠렸다. 정인 군자인 척하는 사람들은 차마 내놓고 바
라보지 못했지만 흘낏거리는 눈초리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도인이라는 분을 뵙고 싶은데요."
깊은 산골에서 흐르는 맑은 물소리처럼 영롱한 음성과 미모를
음미하던 건도인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화들짝 놀랐다.
자신을 찾아온 미모의 손님? 살다보니 이런 일도...
급히 젖은 손을 옷에 쓱쓱 문지르고 뛰쳐 나갔다.
"제, 제가 건도인인데..."
순간 건도인은 등골이 자르르 저려 왔다. 한쪽에서 주문을 받
던 마누라의 눈길 때문이었다. 성난 살팽이처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마누라는 잠시 씨근덕거리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우리 바깥사람은 왜 찾아?"
"저는 당문 사람이에요. 몇 마디 여쭤 볼 일이 있어서..."
순간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 버렸다. 당문? 미인? 한
사람의 명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빙지설화 무음무영 한연지
중원 전역에 이름난 고수 중 한 사람.
건도인은 짚이는 게 있어 어깨를 움츠렸고 그의 마누라는 감히
제 성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꼬리를 말았다.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그, 그러죠."
건도인은 자신도 모르게 내실 쪽으로 걸어갔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어.'
건도인은 한연지의 물음에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대붕파에 관한 일이라면 남들보다 잘안다. 평생 은인으로 모시
겠다고 골백번도 더 다짐한 인물이 대붕파의 총관(總管) 홍태
곤(洪泰昆)이었다.
남들은 배알도 없는 놈이라고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하
는 소리. 홍태곤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자신에게 천하일색
마누라를 얻어 주고 다관도 차려 주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마누라는 홍태곤의
첩이 아니었다. 첫날밤에 홍혈(紅血)을 분명히 확인했으니까.
"병신 너는 달거리도 모르냐?"
짓굿은 놈이 비아냥거렸지만 오히려 성을 내줬다. 아무리 모른
다해도 홍혈과 달거리를 구분 못 하랴.
평생 은인 홍태곤은 수시로 다관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무슨
밀담을 나누는지 밀폐된 방안에서 마누라와 단둘이 근 두시진
을 보내곤 했다.
"병신 안방과 마누라를 한꺼번에 내줘?"
문득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고고한 학자처럼 의젓한 대붕파
총관이 설마...어려서부터 고아가 된 마누라를 주워다 기른 정
은 친부모 못지 않은데 잠시 동안이라도 불순한 생각을 한 자
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것도 이십 년이 흘렀다. 간혹 가다 총관이 준 한 냥짜리 말
굽은...그때는 참 좋았는데...
"저, 대붕파라면 너무 오래된 일이라..."
건도인은 말꼬리를 흐렸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딱 부러지게
뭐라 말할수는 없지만 그것이 홍태곤을 위하는 길 같았다.
"대붕파는 이미 이십 년 전에 사라졌어요. 갈은 독문이라 궁금
해서 물었는데...모른다면 할수 없죠. 실례했어요."
뜻밖에도 한연지는 순순히 일어섰다.
그녀가 나간 후 건도인은 한연지가 앉았던 자리에 살며시 손을
댔다. 따뜻한 온기, 바로 그녀의 체온이다. 아직도 풋풋한 방
향(芳香)이 풍기는 듯 했다.
'기가 막힌 미인이었는데...쩝!'
입맛을 다셨지만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바로그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정말 듣기 싫은 앙칼진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빌어먹을!
여운이나 즐기고 난 다음에 나타나든가 하지 하필이면...그러
나 그런 내색은 깊이깊이 감춘채 태연히 돌아섰다.
"아니 여기 뭐가 묻어 있어서..."
"무슨 말을 했어요?"
"대붕파에 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달라더군. 특히 장문과 총
관, 그리고 사호법(四護法)에 관해서..."
"흥! 보나 안보나 뻔하지 미주알 고주알 불어댔겠군."
건도인은 황급히 두손을 휘저었다.
"아니야. 내가 그런 놈으로 보여? 한마디도 안했어. 정말이라
니까."
건도인은 마누라의 얼굴에 만족스런 기색이 흐르는 것을 놓치
지 않았다. 휴우!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만약 말했다면 이
마누라에게 어휴!
"뭐 해요? 빨리 나가서 일하지 않고..."
톡 쏘아 붙이고는 밖으로 나가는 마누라 뒤꼭지에 욕을 한사발
해줬다. 그의 눈길은 한연지가 앉았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
다. 아직도 삼삼한 자태가 어른거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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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뗄 수가 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