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二 )
무화(茂花)는 뒤따르는 사람이 없나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면
서 빠르게 걸었다. 멍청한 남편 건도인은 세상 모르고 잠에 빠
져 있으리라.
그녀는 홍태곤의 의젓한 모습이 그리웠다. 젊어 포동포동한 육
체를 지니고 있었을때는 사랑도 많이 받았는데...
한번 생각난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걸음을 더욱 재촉시
켰다. 지금까지 대붕파에 대해 물었던 많은 사람들처럼 당문
한연지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다면 오늘밤은 육신이 녹아나는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폐허가 된 대붕파의 정문에 이르자 무화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 보았다. 뒤따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불안한 마음에
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서슴없이 폐장원으로 들
어섰다. 그리고 미리 봐두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마당 한구석으
로 가서 청석을 들어 냈다. 잠시 후 무화의 모습은 정원 어디
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휘익!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한연지와 당철휘가 내려섰다.
"이상해요 사람들은 왜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사람들이 이상한건 아니지 이십 년 동안 한 자리에 있었는데
도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행동이 은밀했다는 것이니까.
오히려 그런 그들을 너무 쉽게 찾아낸 한매가 놀라워."
"어떻게 하실 거죠? 안으로 들어갈 건가요?"
"으음...! 독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호호호! 독을 알아냈다고 해도 당대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
았을 거예요.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겠죠?"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을 쫓는다고 하지만...후후
후! "
"내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환히 꿰뚫어 보는군."
"누가 나타날까요?"
"그걸 나에게 물어 보나? 누가 나타날것 같나?"
"만약 만우당에 나타났던 전위대주가 나타난다면 대가가 문주
로 등극하는 시기가 빨라질 거예요. 하지만 그 외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면 요원하겠죠."
"어째서?"
"전위대주가 나타난다면 단지 잠적한 오대독문을 말살하려는
생각 뿐이에요. 그렇다면 무서울 게 없죠. 하지만 전위대주가
만우당에서 원하던 것을 습득하고 당문으로 호송 중이라면 나
타날 수 없겠죠?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당문주
의 지략은...자신없어요."
"후후후! 한매의 입에서도 자신 없다는 말이 나올때가 있나?"
"또 한 번 자신없다는 말을 하죠. 단비하를 죽이는 일...역시
자신없어요."
"마음이 많이 약해졌군. 몸이 피곤하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
지. 단비하, 그놈은 걱정하지 마. 내 확실히 죽여 줄테니까."
"휴우! 그러기를 바래요."
한연지는 다시 막힌 청석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또 한 사람, 그는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어둠과 동화되어 식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각없
이 회색빛으로 죽은 눈은 한연지와 당철휘의 뒷모습을 쳐다보
고 있었다.
단비하 그는 건도인의 다관을 찾아가던 중 한연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줄곧 그림자가 되었다. 한연지의 의도를 알
고 폐장원에 숨어든 지 이 각, 대붕파의 은거지도 알았고 이들
의 대화도 남김없이 들었다.
'그렇게 죽이고 싶더냐? 무엇이 너를 이토록 독하게 만들었더
냐?'
변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변했을 줄이야. 어렸을 적의
청순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단비하는 그녀가 정녕 왜 이렇게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수 없었
다.
코흘리개 시절에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던 기억이 창피해서라면
설명이 안 된다. 야망을 위해서라고 해도 자신같이 멍청하고
힘없는 놈을 염두에 둔다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없다
어쨌든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
단비하는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않은채 어둠속으로 침잠했다.
- 대붕파의 은거지 발견.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혈반사접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함. 어떤 독을 사용하는지 가늠하
지 못했음. 한군데 밀집해 있는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문도
수 또한 알수 없음.
* * *
양과광(陽顆光)은 어두운 암동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낮에
보았던 독물도감(毒物圖鑑)을 상기했다. 가장 기초적인 입문서
(入門書)이지만 무척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독초들
을 마음껏 활용하는 사형(師兄)들이 존경스럽기만 했다.
언제쯤 사형들처럼 적의(赤衣)를 입을 수 있을까? 오백여 쪽에
달하는 독물도감을 완전히 습득하면 입을수 있는 적의. 사형들
이 독을 다루는 솜씨를 보다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하물며 청의(靑衣), 흑의(黑衣)를 입은 사부(師父), 그 위에
회의(灰衣)를 입은 총관과 사호법의 실력은 추측할 수도 없다.
한번도 보지 않은 장문의 실력은 더욱 추측불가일 터이고...
기이하게 생긴, 또는 주변에서 쉽게 볼수 있는 잡풀들과 비슷
하게 생긴 독초들의 모양새와 이름을 부지런히 상기했다.
일 년이 지나도록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암동에서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에는 그보다 적절한 일
이 없었다.
'몽령초(夢靈草), 모양은 참등과 비슷하다. 전국에 분포하며
개화(開花)는 사월에서 오월, 결실기(結實期)는 시월이다. 높
이는 칠장에 이르며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觀賞用)으로도 사용
한다. 꽃을 말려서 흡입하면 강력한 환각(幻覺)에 시달린다.'
독물도감에서 보았던 몽령초의 모든것이 줄줄이 암송되었다.
실제로 본 적이 있어서 연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선마초(仙痲草), 잎이 네 개로...응? 누구지?'
문득 양과광은 암동을 묵직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떨
리는 손으로 가죽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일 장 앞에 그어진 백
색 선(線)도 확인했다. 암동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후 몇
번이고 확인한 선이니 거리 정도는 눈 감고도 알수 있다.
'갑자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와...!'
대붕파의 문도들은 이쪽 통로를 이용하지 않기에 더욱 발걸음
이 뜸한 곳. 임무를 부여받고 일 년이 지나도록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암동에 방향(芳香)을 풍기는 여인이 찾아왔다. 무화
라고 했던가? 그게 바로 어제인데 오늘 또 사람이 찾아오다니.
양과광은 검은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비춰지자 목에 힘을 주
어 일갈을 내질렀다.
"움직이지 마랏! 누구냐?"
"네 이놈!"
맞은편에서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능가하는 대갈이 터져 나
왔다.
자연히 주눅이 든 양과광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신지...?"
"네 이놈! 아직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뚜벅! 뚜벅...!
상대편의 발걸음에는 자신감이 깃들여 있어,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걸음씩 다가
왔다.
'이쪽으로는 오가는 사람들은 외부 사람뿐인데...'
의아심이 들었으나 너무도 당당한 상대의 호통과 발걸음에 할
말을 잃었다. 상대는 일 장 앞에 그어진 백색 선을 넘어섰다.
가죽주머니에 든 취충에게서 자신을 보호받을 수 있는 백색
선.
촉초(蜀椒)와 청미래덩굴의 덩이뿌리, 그리고 파두(巴豆) 씨앗
을 정제하여 만든 가루.
"어!"
양과광은 너무도 이상한 광경에 크게 눈을 부릅뜨고 경악성을
발했다.
뚜벅! 뚜벅...!
백색 선을 넘어선 사내의 뒤에 나타나는 그림자들...족히 십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선 사내는 생소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호북성(湖北省) 무인들이나 대붕파 문도들은 소매가 짧은 단삼
(短衫)을 즐겨 입는 데 반해 소매가 넓고 길었다.
처음보는 사람들, 알지 못할 위험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 누구냐?"
양과광은 떨리는 음성을 내밸으면서 가죽주머니를 힘껏 움켜잡
았다. 여차하면 취충에 보호를 받지 못한다 해도 던져 낼 기세
였다.
"이놈아! 나라니깐."
앞에 선 사내는 어이없는 듯 가볍게 되받으며 다가섰다.
"저, 적이다.!"
양과광은 비로소 상대의 존재를 직감했다. 순간 그의 손은 암
동 한쪽에 늘어진 붉은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뎅! 뎅! 뎅...!
암동 저쪽에서 급격한 동종 소리가 울려 왔다.
퍼억!
양과광은 가슴이 불로 지진 듯 화끈거렸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크윽!"
손에 든 가죽주머니를 터뜨리려는 찰나, 번개같은 흰 섬광이
손목을 쳐왔다.
"아아악!"
손목을 베어 낸 검은 여세를 몰아 목덜미를 후려쳤다. 양과광
의 목은 꼭지 떨어진 감처럼 힘없이 암동구석으로 굴러갔다.
"불을 피워라!"
남은 한손으로 떨어지는 가죽주머니를 받아 쥔 사내가 힘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존명!"
뒤따르던 사내들은 일제히 준비해 온 마른나뭇 가지를 모아놓
고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리고 등에 짊어진
바랑을 끌어 내린 후 곱게 접힌 잎사귀를 꺼냈다.
잎사귀는 긴 타원의 피침형(披針形)이며 길이는 네 치 닷 푼으
로 끝이 뾰족하고 양면에 짧은 털이 나 있었다. 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 일부에서 볼수 있는 새애기풀과도 흡사했지만 크기
와 무늬에서 크게 달랐다.
사내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마른 잎사귀를 불붙은 가지에 올려
놓았다.
타타탁...!
잎사귀는 몸을 사르며 흰 연기를 뿜어 냈다. 고요한 가운데 일
렁이는 빨간 불꽃, 암동에 번져 가는 자욱한 연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지만 십여 명의 사내들은 훈기(薰氣)에 몸을 쐐
기 바빴다.
마른 가지들이 재로 변하고 마지막 불똥이 안간힘을 쓸 무렵,
선두에 섰던 사내가 가죽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것을 바닥에 쏟
았다.
툭! 투두둑...!
좁쌀만한 취충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원래 취충은 길이가 한푼에서 두푼으로 육안으로 식별이 극히
곤란하다. 납작한 원형이며 빛은 갈색, 뒷날개는 피화되었고
몹시 악취를 풍긴다. 하지만 지금 쏟아져 나오는 취충은 크기
도 훨씬 클 뿐만 아니라 빛깔도 청색이었다.
"이것이 대붕파가 자랑하는 청살취충(靑殺臭蟲)이로군."
사네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렀다.
청살취충들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
내 잠잠해졌다.
"가자!"
사내의 명령과 동시에 십여 명의 수하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
다.
암동 안쪽으로...
"으아악!"
"크윽!"
널찍한 지하광장은 피 냄새를 뭉클 풍기는 지옥의 아수라장으
로 변했다. 느닷없이 침입한 십여 명의 무공은 신랄했고 패도
적이었다.
대붕파 문도들이 알고 있는 독술은 무용지물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백천문자(白天蚊子), 청살취충(靑殺臭蟲), 흑멸도충(黑
滅跳蟲)등 대붕파의 모든 것을 걸고 키워 낸 독물들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 이유가 침입자의 몸에 배인 훈향 때문이란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문도의 절반이 살상된 후였다.
"멈춰라!"
대붕파 총관 홍태곤은 일갈을 터뜨리며 장내 싸움판으로 뛰어
들었다.
"네놈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기에 감히 여기서 살상을 저지르는
게냐?"
홍태곤의 붉은 눈동자는 더욱 붉게 충혈되었다. 눈앞에 드러난
살육의 현장은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 거의 대부
분이 좁은 암동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마주친 문도들인
지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은 극심했다.
홍태곤의 시선은 하관이 빠르게 돌아간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다른 침입자들이 흑의 무복을 입은 데 반해 눈이 가는 중년인
은 갈색 장삼을 입은 탓이다.
"다, 당풍준!"
짧은 경악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
한 정적이 흘렀다. 당풍준이 누구던가. 독의 제일거봉 당문에
서도 중위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당문 십절 중 일인이 아니던
가. 비록 암동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문도들이지만 당풍준
의 위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후후후! 오랜만이다. 용출거독(溶出巨毒) 홍태곤."
하관이 뾰족한데다 눈까지 가늘어 잔인한 인상이 풍겨 나오는
당풍준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홍태곤을 바라보았다.
"다, 당문이 무슨 일로 대붕파를 치는 게요?"
홍태곤의 음성은 말을 할수록 가라앉았다. 비록 전위대보다 알
려지지는 않았지만 오십 명으로 구성된 중위대원은 개개인이
고도로 훈련을 받은 전문 살수였다. 그 중 열 명이라면...문도
삼십여 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미 죽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문도 삼십여 명이 그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더욱이 대붕파의 독물들은 힘을 쓰지 못
하는 상황이니...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대붕파에서 기르는 독물을 채집
하는 것. 그것은 이미 달성했다."
당풍준은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문도들이 살포한
독물들을 채집했음이 틀림없었다. 싸우는 와중에 언제 몸을 빼
독물을 채집했는지...실로 귀신도 놀랄 만한 무공이 아닌가.
"다른 하나는 이놈들을 어떻게 키울수 있었는지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아마 말하지 않겠지?"
"다, 당풍준! 같은 독문끼리 이럴 수는 없는 일이오. 차라리
소림사에 가서 칠십이절예(七十二絶藝)를 달라고 하지 그랬
소."
"후후후! 역시 말로 해서는 안될 줄 알았어."
홍태곤은 당풍준의 뱀처럼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부지런히 머
리를 굴렸다.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든 자료를 태우는
데 필요한 시간은 일 각, 일 각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버터야
한다.
"쳐라!"
당풍준은 홍태곤의 마음을 읽었는지 급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한치도 물러서지...억!"
마주 일성을 토해 내던 홍태곤은 지하 광장을 가득 덮는 은빛
광망에 경악스러웠다. 당문칠병 중하나인 투골망, 사십여 명이
드잡이질 하기에는 좁은 광장, 피할 곳은...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을 빨랐다.
재빨리 칠성둔형(七星遁形)을 펼쳐 뒤로 주르륵 물러섰다. 한
데,
툭!
등뒤에 와닿는 감촉은? 분명 수하중 한명의 몸뚱이리라.
쐐에엑!
은빛 광망이 머리를 덮는 순간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사금
이 살을 파고드는 감촉, 그 감촉은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을
불러 왔다.
"으아아악...!"
독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용출거독 홍태곤은 전신을 산산이 으
깨는 은사에 마지막 비명을 처절히 내질렀다. 독수리에 채인
독사처럼 천적을 만난 독인이 당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죽음
이었다.
허병현(許炳賢)은 비명 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추스르던 문서들
을 팽개치고 이미 쌓아두었던 문서에 기름을 뿌렸다. 모든 자
료를 없앨 수 있으면 더없이 다행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우선 쌓아논 문서라도 태워 없애야했
다.
'총관이 일 각을 버티지 못하고 당하다니...'
장문이 원망스러웠다. 완성 직전에 있던 충생비록(蟲生秘錄)을
가지고 사라지지만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치욕을 당할까.
아니, 대붕파가 지하로 숨어들 이유도 없었으리라. 천적이 없
는 독충들은 무림 십 개 거파마저 휩쓸어 버렸을 텐데...
만약 대붕파에서 충생비록을 잃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그 동안 원한관계에 있던 많은 무림인 앞에 오체분시(五體分
屍)가 되고 말았겠지. 이제 간신히 전과같은 독물들을 만들어
냈는데...
기름을 다 붓자 품에서 화섭자를 꺼냈다. 순간,
"구유만리(九幽萬里) 허병현! 대붕파의 일호법이라면 그 자료
가 얼마나 소중한건지 잘 알 텐데..."
문득 등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허병현의 손길이 부들부들 떨
렸다.
맞는 말이다. 대붕파 칠십여 명이 이십 년간 쏟아 부은 피와
땀이 배인 문서들이다. 이 문서가 당문에게 넘어간다면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 그러나...그러
나 자신들을 해한 원수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 줘야 한단 말인
가.
'안돼! 비록 사장(死藏)되는 한이 있더라도...'
허병현은 마음을 굳히고 화섭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치익!
짧은 불꽃이 일었지만 불이 켜지지는 않았다.
"멍청한 짓!"
퍼억!
일갈과 동시에 가슴을 뚫고 나오는 묵빛 죽대 투골망의 사정
거리는 삼 장 하지만 은사만 신경 썼지 튀어나오는 죽대의 힘
이 이 정도일 줄이야.
"꺼억!"
허병현은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화섭자를 켜려 했지만 결국 켜
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화섭자가 무심하
게 주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허병현, 죽지 않을수도 있었는데..."
당풍준은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허병현을 지켜보았다.
방향성식물(芳香性植物)인 하고초(夏枯草)와 밀원식물(密源植
物)로 사용하는 능소화(凌宵花)를 교배시켜 만든 석창초(石菖
草)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대붕파를 건드리지는 못했으리
라 그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제일실 만채실장 만초신의 당중화
야 말로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대붕파가 사용하는 독 성분을 어떻게 손금 보듯 알 수 있
었을까? 그런 사람이 그들 은거지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다는
것도 이상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쳐버릴 수 있는 곳이
대붕파였는데...
석장초의 훈기가 독물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이 밝혔졌음에도
정리된 자료를 가져 오라는 의도는 무엇일까? 당문십절 가운데
한사람을 보낼 정도라면 필시 중차대한 문제일 텐데.
당풍준은 뛰어난 지자(知者)로 알려진 허병현을 죽인 것이 못
내 마음에 걸렸다. 문파를 떠나서 같은 독인으로 인정할 만한
상대였으니까. 그만은 살리고 싶었으니까.
그는 대붕파가 이십 년에 걸쳐 이룩해 놓은 독문서들을 훑어보
았다.
한장 한장에 기울인 심혈이 종이를 타고 전해졌다.
싸움은 이미 끝났는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하다못해 부상자
들의 신음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았다.
"출구는 건양하(建陽河)의 수로(水路)와 연결 되었습니다. 모
든 배가 빈틈없이 정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빠져 나간 사람
은 없습니다."
중위대 부대주 풍마린(風碼璘)이 숨 한올 흐트리지 않은 고요
한 음성으로 보고했다.
"입구와 출구를 철저히 봉쇄해라."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입구는 청석만 닫으면 귀신도 모르고,
출구는 바위 틈바구니 사이로 조그만 소선만 드나들게 되어 있
습니다. 정말 숨기에는 감탄할 만한 최적지입니다. 안에서 움
츠리고 있다면 백년이 지나도 찾지 못할 요새입니다."
당풍준은 몇 마디 하려다 그만두었다. 풍마린이 장담했다면 믿
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풍가(風家)의 소가주인 풍마린은 명석하다. 지략으로 따진다면
한연지와 엇비슷하고 무공으로 논한다면 자식 당동한과 쌍벽을
이룬다.
문무겸전(文武兼全)에 성취욕(成就慾)까지 가지고 있다.
다행이라면 결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설복에 응한
사가 후인들이 나타내는 전형적인 특성인 충성심과 처지를 알
고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으니까.
"문서를...잘 챙겨라. 이곳은 철저히 불태운다. 독물들이 한마
리라도 살아있다면 곧 번식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미 암동에 기름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래? 잘 했구나."
당풍준은 눈을 감지 못한채 숨이 끊어진 허병현의 두눈을 쓸어
내렸다. 그것이 같은 독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무인에게 해줄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한연지와 당철휘는 향계현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대붕파가 멸문했음을 알았다. 기름 태우는 연기는 유황불처럼
매캐한 냄새를 동반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일행이 전서구를 보낸 지 삼각 만에 방문한 사람, 중위대주(中
衛隊主) 오독일지(五毒一指) 당풍준(唐風俊).
당문 십독 중 다섯 가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음풍쇄골지(陰風
碎骨指)와 함께 하독하는 절정고수. 음풍쇄골지만으로 놓고 볼
때도 구파일방의 장로들과 견주어 밀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한연지는 당풍준이 들어서자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상
은 했지만 자신의 꿈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을 감내할 수
없었다. 하얗게 탈색된 얼굴에서는 심한 절망감이 배어나왔다.
당풍준은 그런 한연지를 힐끔 바라보고는 당철휘에게 다가섰
다.
"전서는 잘 받았다. 너희는 곧바로 일독문을 추적해."
그 말은 모든 사실을 구체화시켰다.
자신들은 추적자에 불과할 뿐, 더도 덜도 아니었다. 대붕파가
혈반사접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고 전서를 날렸음
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치기 전에 일독문을 추적하라는 말은
...혈반사접과 관계없이 당문과 견줄 수 있는 독의 명가들을
말살하겠다는 의사(意思)였다.
지금은 누가 뒤를 따르고 있을까? 전위대주와 중위대주가 나타
났으니 후위대주 당잠청일까?
문주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왜 가만있어도 소멸될 것
같은 독문들을 치는 것일까? 자신이 비록 한가의 최고기재라고
는 하지만 그전에도 자신과 필적할 만한 두뇌는 있었을터, 왜
그들에게 추적을 명하지 않았을까?
한연지는 실타래처럼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당문주 당기룡
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뛰어난 독인이면서 절묘한 지략가
다. 자신보다 한수 위임을 인정해야 된다. 그렇다면...
'손아귀에서 놀아 주면 된다. 단비하에게 눈길을 돌릴 때까지
천하제일 문파를 만들어 무림을 호령하는 일은 십 년 후라도
늦지 않아.'
한연지는 당철휘에게 요염한 미소를 보냈다. 부처도 성욕(性
慾)이 발동할 만큼 고혹적인 미소였다.
"일독문에 대해서 참고할 만한 것이 있나요?"
"응? 흠!"
당철휘는 멍하니 한연지의 옆 모습을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물
어 오는 질문에 헛기침을 토해 냈다.
"일독문은 한 가지 독만 집중적으로 배양시킨 문파지. 수독(水
毒), 가장 빠른 살상력을 지녔어. 하독 방법도 간단해 옥병 마
개만 열고 뿌리기만 하면 되니까. 무공의 고하는 상관없지 그
래서 일독문의 고수들은 신법에 치중한 점이 특색이야."
한연지는 당철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단비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단비하, 그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
미도...분명 몸 전체가 파랗게 물든 듯 했는데 단비하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듯 하품만 연신 터뜨렸다.
'독충들의 몸에 나타나던 현상...아직도 대붕파의 폐장에서 입
은 독상을 제거하지 못했다. 미물에게 독성을 부여하던 독...
그게 무엇이기에...'
당철휘는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쉬임없이
주절댔지만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당문주의 복안을 알수
있는 단서가 잡힌 까닭이었다.
"당 대가. 단비하를 보세요. 눈치채지 않게..."
"응? 왜?...어?"
"왜 저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알겠어요?"
"음...! 대붕파의 독!"
"역시..."
한연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슨 독이 사용되었는지 알수 있겠네요?"
"겉으로 봐서는 알수없지. 만약 꼭 알아 내려면..."
"알아 내려면요?"
"저놈 몸을 갈기갈기 찢어야 할거야. 어떤 독은 살갗뿐만이 아
니라 근육 심하면 내장까지 변색시키거든 정말 독종인데? 저
정도 되면 죽어야하는데 말야. 무엇보다 독성분을 알아내는데
는 겉면보다 오장육부를 헤집는 편이 정확하지."
"해부를 한다면 어느정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죠?"
"장문에서라면 십 할이지. 거기는 기구가 많거든...하지만 이
런 야지(野地)에서라면 칠 할? 아니 육할 정도..."
"인체의 일부만 가지고는 안 될까요?"
"한매? 혹시..."
"그래요. 해부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붕파가 사용한 독의 실
체를 알아야해요, 분명히 알아두세요, 독의 실체를 안다면 대
가는 당문의 문주가 되는 거예요. 그 점은 내가 장담할게요.
하지만 단비하를 죽이는 것만은 동의할 수 없어요. 아직은 아
니에요. 제가 죽이라고 할때...아셨죠?"
"대붕파의 독이라...후후훗! 그렇군. 그 독은 반드시 알아야
해."
당철휘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살광은 소름끼치도록 잔인했다.
품속에 간직한 폭우빙혼통, 만우당에서 가져 온 풍멸환 거기에
자신조차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던 암동 속에 바글거릴
독충이 가세한다면 무적고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독충을
키워 낼 수 있는 열쇠를 단비하가 가지고 있다. 그의 몸이...
"좀더 가능성을 높여야겠어, 대시진(大市鎭)으로 나갑시다. 몇
가지 약초를 준비해서 연화제(軟化劑)를 만들면...자신있어."
"그래요? 그럼 흥산성(興山城)으로 가요. 하루면 도착할수 있
을 거예요. 일독문의 근거지였던 모록산(茅鹿山)으로 가는 길
목이니까 의심 받지도 않을테고..."
"그럽시다."
'됐어...만우당, 사충전...두 독의 연관성만 찾아 낸다면 당문
주의 의도를 알수 있어.'
한연지는 다시 깊은 생각에 몰입했다.
단순히 혈반사접을 만든 문파를 찾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고 이
미 잠적해 버린 독문들을 찾아 멸문시킨다고 당문의 위상이 높
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무엇인가 다른 것이 또 있는데...
무엇일까?
기대할 수는 없지만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혔다. 그
리고 그것이 단비하의 몸에서 일어나는 증세라면 더욱 간명했
다.
한연지의 눈은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단비하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도 모른 채 길게 하
품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누구보다도 복잡했다.
파란 물감에 집어넣었다 꺼낸 듯한 양손, 눈이 있으니 보지 않
을 까닭이 있는가. 독에 중독된 증상임은 분명한데 무슨 독에
걸렸는지를 알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독에 대한 지식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있었다. 가문 전래의 의
독(醫毒)을 목숨 걸고 전수받았고, 당문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
든 독을 몸으로 체험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도 자신이 중독당한 독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었다.
'대시진으로 가야 한다. 어떤 증세가 이는지 알아내야만 해독
약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자면 독기를 이끌어 내는 유독
제(諭毒劑)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가까운 대시진은 흥산
성...흥산성에는 임(林) 숙부(叔父)가 계신다. 가야하는데...'
서로 다른 심중, 하지만 가는 길은 같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함니다.
즐감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
잘 보고 갑니다
즐독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ㄳ
항상 감사합니다.
즐독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