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범회장님의 카톡에서]
재미있는 과학경제 독재 읽을만 합니다.
< 한강의 기적 >
한강은 서울의 아이콘이다. 1965년에 350만이었던 인구가 팽창하여 천만이 되었다.
상수도 소요량이 팽창했지만 그 취수원인 한강은 날이 갈수록 오염이 심화되었다.
공장폐수, 축산폐수, 인분이 유입되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논과 밭으로부터 또다른 축산물의 인분과 퇴비가 마구 유입됐다.
가뭄이 들면 바닥이 드러나 악취가 먼 거리에서까지 진동하고 홍수가 나면 논과 밭이 쓸려나갔다.
’한강종합개발사업‘,
전두환은 일본에서 받은 40억달러 중 10억달러를 털어내 시궁창급의 한강을 오늘날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바꾸었다.
한강 양안을 따라 54.6km의 초대형 콘크리트 관을 묻어 한강으로 유입되는 모든 오폐수를 통과시켜 중랑, 탄천, 안양, 난지에 있는 하수처리장으로 보내 정화시켰다.
210만평의 고수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유원지, 낚시터, 자연학습장, 주차장, 자전거도로, 산책로, 체육공원 등을 조성하고 강에는 유람선을 띄우게 했다.
수중보를 설치해 한강을 홍수도 없고 가뭄도 없는 평균 폭 1km의 기나긴 호수로 가꾸었다.
88올림픽도로로 명명된 한강변 남로와 북로를 건설하고 수많은 교량을 건설하고 중랑천까지 개발해 그 양쪽을 달리는 중부간선도로를 건설했다.
일본 돈으로 지하철공사를 설치하여 3~4호선을 건설했고, 방대한 올림픽촌과 올림픽공원, 체육촌을 건설 하여 올림픽역사상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치렀다.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열린 88올림픽에는 자유진영 국가와 공산진영 국가가 모두 참여하여 보이콧 없는 첫 올림픽이 되었다. 160개국으로부터 선수들과 관람객이 모였고, 104억의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어 아름답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도우미들의 친절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공산권의 와해에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다.
관광객이 늘어나서 김포공항으로는 소화를 하지못해 인천공항을 건설하게 되었다.
국력이 한순간에 팽창된 것이다.
제2의 포항제철,
한국형 원자로!
지금 현재 독자적 핵연료봉과 원자로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 4개국 뿐이다.
한국형 원자로는 외화벌이 수단일 뿐만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외교수단 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이 원자로의 독자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은 과학계의 불가사의로 통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1983년 7월, 전두환은 한전, 에너지연구소, 원자력연료주식회사, 한국중공업등을 망라하여 상시 회의체인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촉진 대책회의‘를 가동시켰다. 핵연료 국산화가 첫 목표였다.
한필순 박사가 주도하는 기술팀이 ’중수로‘ 연료 국산화에 쾌거를 올렸다.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가능성을 걸었다. 현장에 나간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적극 지원할테니
’경수로‘ 연료를 국산화 하시오.“
전두환은 그의 의지를 한필순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전두환은 한필순을 대덕 공학센터의 센터장자리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 자리를 겸임시켰다.
그를 상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한국중공업 사장인 박정기를 한전사장으로 임명했고,
김성진 박사를 체신부 장관 에서 과기처 장관으로 옮겼다.
박정기는 전두환의 육사 3년 후배였고, 김성진은 동기생 이었다.
에너지연구소가 경수로 원료를 개발하려면 한전으로부터 용역을 받아야하고, 한전의 예산을 배정해주는 권한은 과기부 장관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연료봉 자체개발은 중수로 연료를 개발하는 것보다 한층 더 어려운 과제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기에 경수로 연료봉은 1983년에 완전 국산화가 됐다.
핵연료는 비싸기도 했지만 해외공급업체의 거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자로는 가동되고 있는데 연료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상 종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두환이 앞장 선 것이다.
한숨돌린 전두환과 한필순, 1984년에 다시 만났다. 전두환이 한필순을 청와대로 불러 활짝 웃으면서 한필순의 손을 두손으로 감쌌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추켜올렸다. 사실 그러했다.
한필순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하고 긴장했다. ”한 박사, 한국형 독자 원자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독자기술로 만들 수 없소?“
이크,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놀란 한 박사,
대답이 궁했다. 사실 이건 100%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각하, 그건 좀...“
이 표현에 전두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된다는 거요?“
사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한국기술이 거기까지 가려면 요원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원자력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말을 하겠는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치 빠른 전두환이 한필순의 마음을 읽고 물었다.
”이보게 한 박사, 포항의 모래바닥에 포항제철을 누가 건설했소?“
”그어야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지원으로 건설했습지요“
”포항제철도 맨땅에 헤딩해서 건설했으면 한국형 원자로도 맨땅에 헤딩하면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한 박사가 할말을 잃었다.
”한 박사가 박태준이 되든지,
박태준을 구해보든지 하시오.
얼마면 되겠소?“
10년이라 말해도 거짓말 인데, 10년이라고 말하면 곧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네, 5년만 주십시오.“
”알았소. 적극 지원하겠소.
가보시오.“
청와대에서 나온 한필순은 지옥문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고, 얼굴에 노랑병이 걸렸다.
”청와대 다녀오시더니 왜 저러시나~“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선임연구원 이병령 박사가 한 박사를 찾아갔다.
”소장님,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한필순이 고민을 털어놨다.
그런데 이병령이라는 젊은 박사에서 당찬 소리가 나왔다.
”에이, 소장님, 아 그까짓거 가지고 웬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 세상에 없는 물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개발한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도 했는데 우리라고 왜 못합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의외의 이 시원시원한 말에 한필순의 노랑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이 박사, 고맙다.
우리 한번 해보자“
1985년 7월, 프로젝트는 에너지연구소가 한전으로 부터 한국형원자로 개발사업 용역을 받는 단계로부터 출발했다.
에너지연구소가 원청업체가 되어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CE(컨버스천 엔지니어링)를 하청업체로 선정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병령 박사는 70여명의 과학자들을 인솔하고 미국 CE사에 가서 원자로 설계를 함께 개발했다. 이것이 한국형 원자로가 되었고 이 기술로 영광 3~4호기, 이어서 울진 3~4호기가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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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만원 주고사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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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