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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복원된 것이나마-이제 다시 시간 순서를 따라갈 준비가 되었다.
사모스 점령으로부터 바로 이어진 작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기원전 201년 5월 경, 필리포스 5세는 아시아 원정군의 주력을 이끌고 키오스(Chios) 섬 공략에 들어갔다. 아마 비슷한 시기에 왕은 로도스 공화국이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해 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키오스(Ch) 침공은 어쩌면 이에 대한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이 섬은 로도스와 외교적,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보조를 맞추는 경향이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물론, 교통과 무역의 요지에 있던 작은 섬나라에 대고 예의 영토 야욕을 표출한 것 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편 마케도니아에 대한 페르가몬 왕국의 전쟁 선포와 그 함대의 출진도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점에 나왔을 것이다. 폴리비오스는 그 배후에 로도스의 함대 제독 테오필리스코스가 기울인 어떤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했다.(Polyb.16.9.4) 이는 페르가몬을 참전시키기 위한 외교적 교섭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출진의 재촉-독려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에 페르가몬과 로도스는 대체로 불편한 관계였던 편이지만, 이제 공통의 대적 앞에서 그러한 알력은 잠시 무대 뒤로 숨어들어갔다.(*)
키오스(Ch)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섬의 본도시를 포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이 때 필리포스는 도시 내부의 노예들을 이반시키고자 선동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Plut:Mor.245) 마케도니아군은 또한 땅 밑을 파고 들어가는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들이 미처 이를 끝내기 전에 로도스, 페르가몬과 뷔잔티온의 함대가 인근에 도착했다. 연합군 함대는 아마도 해협을 사이에 두고 키오스(Ch)를 마주보는 에뤼트라이 반도의 서쪽 해안에 기지를 차렸을 것이다. 로도스 함대는 테오필리스코스가 지휘해 왔고, 페르가몬에서는 아탈로스 왕이 직접 나섰다. 단, 실제 지휘는 제독 디오뉘소도로스와 제독 데이노크라테스(두 사람은 형제였다)가 맡은 것 같다.(Polyb.16.2.5;3.7)
필리포스와 마케도니아군은 이제 적 도시와 적군 사이에서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 왕은 함대를 불시에 출발시켜 적들의 감제망을 벗어나 사모스로 퇴각하고자 했으나 연합군 함대가 어물거리지 않고 바로 받아치러 나오면서 이 계획은 좌절되고, 곧 양측 대함대는 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Polyb.16.2.1-6) 상황이 분명해지자 필리포스는 항진 명령을 내린 뒤에 자신은 일단 해협 가운데의 한 섬으로 피신했다.(Polyb.16.2.8)
마케도니아 함대에는 총 53척의 대형 전함 "카타프락토스"와 150척의 소형 전함 "렘보스"가 있었다. 그 가운데는 필리포스 왕 자신이 탑승하던 거대한 10단선 기함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아마도 수 척(최소 6척) 가량의 중형 전함 "아프락토스"가 더 있었다.(Polyb.16.2.9) 함대 지휘관은 제독 데모크라테스라는 사람이었다.(Polyb.16.3.6) 병사를 합친 승무원은 총 28,000명 가량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에 맞서는 연합군 함대는 총 65척의 카타프락토스와 12척의 아프락토스로 구성되어 있었다.(Polyb.16.2.10) 승무원의 수는 대략 2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로도스와 페르가몬 함대는 넓게 퍼진 진형에서 각기 좌측과 우측을 담당했다.(Polyb.16.2.6)
전투는 아탈로스 왕의 기함이 앞장서 돌진하면서 시작되었다. 폴리비오스에 의하면 페르가몬 함대는 마케도니아 기함을 격파했으나, 아탈로스도 적선을 너무 멀리 추격하다가 반격을 받아 해안에 기함을 버리고 도주할 수 밖에 없었다.(Polyb.16.3,6.1-8) 다른 쪽에서는 로도스 뱃사람들이 뛰어난 항해술을 선보였다. 이들의 기술적인 움직임은 마케도니아 함대의 소형선이 대형선의 사이 사이를 커버하면서 방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로도스 전함들은 적함의 측면이나 후방으로 돌아가 충격 공격을 가하는 전법으로 다수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Polyb.16.4.4-15) 그러나 선상 백병전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를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었으며,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이 부문에서 강점을 보였다. 여러 로도스 병사들이 쓰러졌고 제독 테오필리스코스도 백병전 중에 큰 부상을 입었다.(Polyb.16.4.13,5.1-7. 제독은 결국 전투 이튿날 후임자를 지명한 뒤 사망한다.Polyb.16.9.1)
전장의 전반적인 형세는 마케도니아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의 기함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자 필리포스는 함대로 돌아가서 마치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것 처럼 병사들을 치하했다. 이제 마케도니아 함대는 아직 완전히 침몰하지 않은 자신들의 기함을 견인한 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Polyb.16.6.9-10) 아마 아탈로스의 배가 멀리 돌진하다가 사라져 버린 것 때문에 페르가몬 함대가 다소 우왕좌왕했고, 필리포스는 그 틈을 노렸던 것 같다. 로도스 함대를 떨쳐내기란 좀 더 힘들었을 것 같지만, 바람의 도움을 받았다면 여하히 가능했을 것이다. 마케도니아군이 물러나자 로도스 함대는 키오스(Ch)에 상륙하고, 비슷한 시간 페르가몬 함대는 자신들의 왕을 찾기 위해 에뤼트라이 반도쪽으로 향했다.(Polyb.16.6.11-13)
폴리비오스의 글 속에서 전해지는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은 거대한 반면, 연합군의 손실은 그에 비해 훨씬 적다. 즉, 마케도니아 함대 가운데서는 카타프락토스 24척, 트리헤미올리아급 3척, 렘보스 65척이 침몰했고 2척의 카타프락토스와 7척의 렘보스가 적에게 나포되었다. 또한 3천명의 병사와 6천명의 선원이 죽고, 2,700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Polyb.16.7,3.2,7-11) 이는 원래 세력의 거의 절반에 달한다. 한편 페르가몬 함대에서는 5단선 2척과 트리헤미올리아 1척의 침몰, 4단선 2척과 기함의 나포, 70명의 사망이 보고되고, 로도스 함대에서는 5단선 2척에 3단선 1척이 침몰하고 60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Polyb.16.7.3-5)
연합군의 손실은 필시 축소 집계된 것으로 보인다. 합쳐서 5단선 4척, 3단선과 트리헤미올리아가 한 척씩 침몰했는데 130명만이 사망했다면, 갑판 아래에 있던 노잡이 대부분이 제때에 탈출한 뒤 안전하게 우군에 구출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가 항상 존재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최소한 페르가몬 승무원 중에는 적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니카이아에서 디오뉘소도로스 제독의 발언으로부터 드러난다.(Polyb.18.2.2)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의 피해도 마찬가지로 왜곡되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유추이다.(cf>Berthold, Historia24. contra>Tarn, JRS31) 다소간 과장이 이루어진 정황은 어렴풋하게 존재한다. 전투 속 에피소드에서 나타나는 8단선 한 척씩의 침몰과 나포가 Polyb.16.7의 집계에는 반영되지 않는데,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연합군측의 무용담에 나오는 적함의 급수가 실제로는 훨씬 작았음을 암시하는 정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합군의 손실 데이터와는 달리 인명 피해와 선박 피해의 내역 사이에서 심한 마찰이 발생하지 않는 점은 눈에 띈다. 사실, 관련 정보 속에서 실질적으로 마케도니아군의 대손실과 모순되는 단서는 전혀 없다.(도리어 반대로, cf>Liv.33.3.3) 아울러 결정적인 것 까지는 아니지만 라데에서 로도스 함대가 단독으로 전투에 돌입한 일은 마케도니아 함대의 현저한 약화를 방증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폴리비오스가 전한 마케도니아군의 피해 규모를 대체로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키오스(Ch) 앞바다에서의 격전이 지나간 후, 필리포스는 ①아탈로스의 기함을 손에 넣었음, ②전투가 끝난 뒤에도 현장에 머물렀음을 근거로 마케도니아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며 함대를 계속 그 해역에 대기시킨 채 전사자를 수습했다.(Polyb.16.8.1-3) 어떻게든 병사들의 사기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가능하다면 자신의 자존심도) 그러나 이틀 뒤 로도스-페르가몬 함대가 재합류하여 접근해 오자 해안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Polyb.16.8.4-5)
필리포스의 아시아 원정은 이 시점에서 흡사 좌절된 것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의 캠페인 시즌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키오스(Ch) 이후 사건들의 인과 관계는 대단히 불투명하므로, 설정된 진행 과정을 통해 추론할 수 밖에 없다. 늦가을에 이르기까지 마케도니아군은 페르가몬 왕국을 약탈 공격하고, 라데 섬 근해로 남하하여 로도스 함대와 충돌하고, 카리아를 침공했다. 세 작전 기간 동안 더이상 로도스-페르가몬의 연합된 군세와 싸우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된다. 아마도 필리포스는 로도스와 페르가몬 군대가 힘을 합치고 있는 한 자신의 승리 전망은 어둡다고 판단, 두 세력을 분단시켜 따로 처리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필리포스는 또한 많은 보급 물자도 확보해야 했다. 적들이 제해권을 누리고 있는 한 그리스에서 보급 수송을 해 오기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전 중에는 실패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활로를 여는 결과는 분명히 가져왔다.
먼저, 어떤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6월 무렵 마케도니아군은 키오스(Ch) 해역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목표는 바로 페르가몬 본국이었다. 가능하면 아탈로스가 연합군의 대열에서 탈락해 버릴 정도로 큰 타격을 지상에서 가하는 한편, 뮈시아의 풍요로운 농촌을 약탈하는 것이 목표였음이 분명하다.(cf>Polyb.16.1.1, Diod.28.5)
아탈로스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러 돌아온 것 같지만 야전으로 침략군에게 도전했다는 증거는 없다. 필리포스는 숙련된 지상군 지휘관이었으며 그 휘하 군대는 오랫동안 마케도니아군의 명성에 걸맞는 뛰어난 전투력을 보였다. 아탈로스는 적들이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만한 전장에서 감히 승부를 보는 것 보다, 대신 수도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들판의 곡식 등 물자를 서둘러 성벽과 요새 내로 거두어 들여 마케도니아군의 성취를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cf>Polyb.16.1.3, Diod.28.5) 이에 다분히 충동적인 화풀이로, 필리포스는 병사들을 시켜 페르가몬 시 인근에 있던 아테나 니케포로스 신전과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괴해 버렸다.(Polyb.16.1.5-6) 그 즈음 아탈로스는 우방국이자, 근래에 마케도니아의 공세에 피해를 입은 아이톨리아 연방에 연락하여 마케도니아 본국을 공격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톨리아측은 이를 거부했다.(Liv.31.46.3-4)
이어서 마케도니아군은 페르가몬 시역에서 벗어나 동남쪽 국경지대의 튀아티라까지 이르렀지만, 아무래도 보급 물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는지 방향을 돌려 트로아드쪽의 비옥한 "테베 평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다지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원정군은 페르가몬 영토를 다시 한번 거의 종단하여 셀레우코스 제국령 히에라 코메로 들어갔다.(Polyb.16.1.7-8) 이곳에서 필리포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아시아 대총독 제욱시스에게 보급 요청을 띄웠고, 대총독은 아마 체면치레 할 정도의 물자를 제공했던 것 같다. 필리포스와 안티오코스의 "밀약"을 의심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제욱시스가 곤궁에 처한 마케도니아군을 원조하는 것과, 또 마케도니아군이 셀레우코스 제국 영내를 방해받지 않고 이동하는 것을 보고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같은 시간 로도스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페르가몬 방어전에 참가한 정황은 없다. 아마 함께 오지는 않았을 것이며, 사모스 남쪽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혹은 로도스로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다. 규모는 잘 알 수 없지만 사모스에는 마케도니아군이 확보한 배가 추가로 존재했고(Polyb.16.2.9) 필리포스가 함대 가운데 상당 부분을 사모스로 돌려보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로도스군이 그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페르가몬과의 오랜 불편한 관계가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여 로도스인들로 하여금 단독 행동을 선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경위가 어떠했건 한동안 로도스 함대가 따로 떨어진 타이밍이 나왔음은 분명하다.(Polyb.16.10.1) 페르가몬 공격 자체의 성과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필리포스는 바로 이 타이밍을 잡아내는데는 성공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히에라 코메에서 사모스로 귀환한 뒤 남하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 함대가 선행했는지, 아니면 지상군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밀레토스 앞의 라데 섬 근해에서 로도스 함대와 마주치게 된 것은 확실하다. 대략 7-8월 중의 일이었을 것이다.
라데 해전의 풀 내러티브는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은 로도스 함대가 2척의 5단선을 나포당했으며 단계적으로 퇴주했고, 계속해서 뮌도스로, 코스로 물러났다고 하는 것 정도이다.(Polyb.16.15.1-4) 또한 전투가 끝난 후 밀레토스 시민들은 필리포스와 헤라클레이데스(이 해전에서 제독?)에게 관(冠)을 바쳤다.(Polyb.16.15.6) 기원전 2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보이는 로도스 출신의 두 역사가, 제노와 안티스테네스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투 자체는 로도스의 승리인 것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그들의 선언이 전과 및 정황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Polyb.16.15.7-8)
로도스 역사가들이 애국심때문에 억지를 썼는지 판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라데 해전의 결과 최소한 일시적으로 로도스 함대가 카리아 서부 해안에서 "치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마케도니아군은 다소간 여유를 가지고서 카리아 남부의 도시들과 로도스령 페라이아를 공략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오랜 마찰에 대해서는 Starr, CPh33.
Eckstein(2008)은 아탈로스가 로도스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 때 손을 잡은 것은 "왕들의 밀약"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p195-198) 그는 페르가몬의 참전 배경으로 기존에 거론되던 것들, 예컨대 프로폰티스에서의 마케도니아 확장이나 비튀니아와의 연계 위협 등은 모두 추측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옳은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왕들의 밀약"이 페르가몬의 참전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 역시도 추측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단편적인 사료 속에는 페르가몬의 전쟁 동기를 직접 진술해 보여주는 것이 없고, 두 나라가 왜 손을 잡았는지 알려주는 대목도 없다. 양국의 지도부는 확실히 어떠한 큰 위기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어떤 기록도 그 위기가 "왕들의 밀약"이었다고 특정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시아 서부나 프로폰티스-에게해 일대의 안정이 전복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해도 특별히 이상할 것이 있는가?
Eckstein은 또한, 기원전 204년 이래 진행된 마케도니아의 프로폰티스-에게해 방면 확장 과정에서 출현한 각종 사건이 로도스와 페르가몬에 압박이 되었으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사건들이 개별적으로 전쟁의 이유까지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세부 논의에서 각 이벤트의 파급 효과를 부실하게 분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자적으로 전쟁의 동기까지는 되지 못할 것 같아도 위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높은 이벤트가 있다면, 마땅히 그러한 것들이 누적-결합되는 경우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 Eckstein 선생은 이러한 면모를 고찰하는데는 대체로 실패하고 있다.
예컨대, Eckstein은 기원전 202년 필리포스의 프로폰티스 원정이 페르가몬 영토 공격을 수반하지 않았으며, 비튀니아와 마케도니아의 연계는 오래된 일이므로 하필 그 시점에 아탈로스를 새삼 자극할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만이 아니라 잠재적인 공격 가능성도 군사적으로는 역시 위협이며, 이것이 아탈로스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원인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현전하는 모호하고 파편화된 증거들을 가지고는 "왕들의 밀약"에 비해 이쪽이 페르가몬 왕의 관심을 덜 끌 이야기임을 보일 수 조차 없다. 아울러 선생은 프로폰티스에서 필리포스의 활동 결과 비튀니아의 영토가 늘어났을 뿐더러, 그 일대가 마케도니아 중심으로 재편될 경우 페르가몬 왕국의 북쪽 경계 거의 전부가 마케도니아-비튀니아 세력과 마주보게 된다는 점을 무시하였다. 즉, 마케도니아의 프로폰티스 확장과 비튀니아와의 오랜 친연 관계는 Eckstein이 시도한 것 처럼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없다.
선생은 페르가몬이 기원전 202년에 당장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아무런 시사도 주어지지 않는다. 전쟁을 할 뜻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반대로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다 하더라도, 강대국인 마케도니아와 맞서기 위해서는 당분간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기원전 202년의 프로폰티스 전역에서 직접 공격받지 않았던 것은 로도스도 마찬가지였으나, 키오스(K) 사건 이후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관되게도, Eckstein은 로도스의 전쟁 결정 역시 "왕들의 밀약" 때문이라고 강변했다.(p184-195) 이 논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그는 키오스(K) 사건 이후 로도스인들이 필리포스를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준비에 들어갔다는 폴리비오스의 언급(Polyb.15.23.6)을 감정적인 면에 대한 설명이라고 괴이하게 한정시켜 해석했다.(이 부분이 그 뒤에 붙은 아이톨리아인들의 분노에 대한 언급과 비슷하다고 하는 주장은 공허한 희망 사항의 표명이다. 이 세상에는 완전히 동일한 사례로만 줄줄 연결되지 않는 문장이 셀 수 없이 많다.) Polyb.15.23.6은 사실상 로도스가 마케도니아에 저항하게 된 계기와 관련되어 남아있는 유일한 진술이다. Eckstein은 이를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무시해 버림으로써 무근거한 상상의 연속만으로 이론을 세워야 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선생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은 정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기원전 201년 말에야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전에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암시하는 움직임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는 두 나라의 지도부가 원래 견적했던 전쟁의 규모를 어느정도 짐작케 하는 것으로, "왕들의 밀약" 실현을 저지해 보겠다는 식의 계획에 걸맞는 거대한 것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로도스인들이 로마를 경계한 나머지 지원 요청을 망설였다는 "ad hoc"을 사용해도, 이는 아탈로스 왕의 입장을 함께 설명하지는 못하므로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 아탈로스 왕에게 애초에 "왕들이 밀약"에 저항할 뜻이 있었다면, 왜 굳이 라이벌이던 로도스와 손을 잡았는가? 우방국이면서 강대국인 로마에 달려가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Eckstein 선생의 설명은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을뿐더러 대단히 부자연스럽다. 그러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헬레니즘기의 전함 구분 용어 "카타프락토스"와 "아프락토스"에 대해서는 Casson, p88. 본문의 계산 결과는 카타프락토스를 평균적으로 5단선(~승무원 350명), 아프락토스를 3단선급(~승무원 200명)으로 보고, 렘보스는 50명이 승선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얻은 추산치이다.
G. Starr, Jr., 「Rhodes and Pergamum, 201-200 B.C.」, CPh33 (1938).
L. Casson, 『Ships and seamanship in the ancient world』(1995).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