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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단비하가 눈을 떴을 때는 햇살이 제법 따스한 기운을 뿜어 낼 무렵 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어질러진 수많은 종이에서 묵향 (墨香)만이 물씬 풍겼다. 임은후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한눈에 파악되었다. 가벼운 신음을 토해 내며 일어나자 의외로 몸이 가뿐했다. 유독제로 독을 격발시키면 사나흘은 꼼짝도 못하는 것이 상례 인데...잠들기 전에 맡았던 북방매물고등조개의 냄새가 되살아 나고, 임은후의 세심한 배려가 몸으로 전달되어 콧등이 시픈거 렸다. 단비하는 거실에 흩어진 종이를 주워 모았다. 잠결에 횡설수설한 듯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 독물을 말한것 같은데 이토록 많았다니. 단비하는 그 중에 서로 융합할 수 있는 독들만 따로 추려 보았 다. 독문사람에게는 기본에 속하는 일이다. 열두 개의 독물이 추려졌다. 검복, 곰치, 외대버섯... 단비하는 독물을 추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고 하 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 성질이 다른 독이 섞이면서 서로 상잔(相殘) 한다면 의미가 없 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은 대붕파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 다. 수많은 독물 중에 이 열두 기지를 추려 내는 일은 반년에 서 늦어도 일 년이면 가능하다. 그런데 이십 년이나 걸렸다? 합성독(合成毒). 독물들의 자연적인 독성에 의존하지 않고 가열(加熱), 정제(整 齊), 독성의 변화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합성독이었다. 그렇다면 해약은 오로지 합성독을 만들어 낸 대붕파만이 만들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유독제를 복용하고 도인술을 시험한 결과는 빈손 인 셈이다. 비록 이 열두가지의 독물들이 섞인 것과 비슷한 효 력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독. 해독약 역시 비슷하지만 근본은 다르리라. 임은후도 이 사실을 알까? 거실에 없는 것으로 보아 약제실(藥 劑室)에서 해독약을 만들고 있을 텐데. 애써 만든 해약이 쓸모 없다면 얼마나 허망해 할까? 다른 것은 다 괜찮다. 아버지의 신념대로 가문을 재건하는 것 에 연연하지도 않고 당문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도 부질 없는 짓이다. 당문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자신만이 성취 할 수 있는 독의 길을 개척한다는 것도...따지고 보면 허욕(虛 慾)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살기 위해서 살아 왔다.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모른다.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발버둥 치며 살 뿐이다. 기회가 생긴다면 인적 없는 산골에 묻혀 가문 이 전해 준 독술과 몸으로 체득한 독술을 정리하고 싶다. 그것이 유일한 꿈이다. 하지만 이대로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바보 아닌 바보가 되어야 했던 지난날들이 생각할수록 속상하 고, 특히 한연지가 보는 앞에서 몸이 해부될 수는 없다. 귀엽고 순진한 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사랑의 대상이 되었 다. 사랑했다. 자신처럼 어쩔 수 없이 당문에 억눌려 있는 줄 알았는데... 한때나마 마음을 빼앗았던 여인, 비록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 고 있을지라도 그런 여인 앞에 토막토막 찢겨져 죽을수는 없 다. 푸르스름하게 변한 피부만 변색할수 있다면, 당문으로 돌 아가 아버지를 보고 죽을수만 있다면... 단비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고, 임은후가 들어서는 것도 몰랐다. 어깨를 짚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서야 사람이 들어 섰다는 것 을 알았다. "무엇을 그리 깊게 생각하는가?" 임은후의 표정은 밝고 부드러웠으나 피곤에 지친 듯 무척 초췌 했다. "아무 생각도...해약은 만드셨는지요?" "후후후! 자네도 독문 사람 아닌가? 단가에는 비전 수법이 있 다는 걸 알고 있다네. 자네 몸에 난 도흔이 말해 주었지." "...!" "자, 받게!" 봉밀(蜂蜜)로 버무린 듯 향기 좋은 단환을 내밀었다. "열두가지 독이 합성되었다면 이걸로 충분할 걸세. 하지만 나 나 자네가 추측하듯이 합성독이라면...휴우! 어쨌거나 우선 복 용해 보게나." 단비하는 눈으로 감사의 뜻을 전달하며 단환을 받아 복용했다. 은은한 향내가 나는 단환은 침에 닿자마자 스르르 녹아들었다. "운기조식을해서 약효를 최대한 받아 들이게." 단비하는 그말대로 이행했다. 필요없는 줄은 알지만 임은후의 성의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싸아악...! 단환이 약효가 몸 속을 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목숨을 걸고 익힌 도인술이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약효를 이끌었다. 일 각 정도 지났을까! 눈을 뜬 단비하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은후 의 눈동자를 보았다. "효, 효과가 있는가?" "구급(拘急:근육이 당기고 죄어짐) 증상과 심하견만(心下堅滿: 명치가 걸리고 딱딱해짐) 증세가 남았습니다." "완치는 안 되었군. 하기야 대붕파의 독이니..." 단비하는 임은후의 말에서 어떤 예감을 받고 황급히 두손을 들 어 올렸다. 오오! 살색이 변해 있지 않은가! 제 살색을 찾은 크고 투박한 손이 이처럼 정다울 줄이야. "가게. 시간이 벌써 정오(正午)에 가깝다네." "어르신! 정말 고맙습니다." "자네 덕분에 부담을 하나 덜었네. 언젠기는 보답할 날이 오겠 지, 하고 생각은 했네만 바로 당대(當代)에 갚게 될줄은 몰랐 네. 하하하...!" 임은후는 실로 통쾌하게 웃었다. 귀한 약재가 있는 곳을 찾아 중원 각지 떠돌지 않은 곳이 없는 의원 임은후는 당문이 부자(附子)에서 독을 빼내는 독특한 방 법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부자는 잘 쓰면 명약이요, 못 쓰면 독약인 요물이라 독을 제거 하는 방법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데 당문이 독성분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니 얼마나 반가운 말인가. 당문은 독에 관한 것이라면 철저히 유출솔 방지했지만 약에 대 해서는 찾아오는 의원을 박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이 는 당문을 천하제일 의가라 칭하기도 했다. 당문은 그 점을 노 렸고, 성공한 셈이다. 인망이 두텁게 쌓였으니까. 임은후는 급한 마음에 산길을 타다가 청살무사에게 물리고 말 았다. 아무피 의원이라도 약제가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지 않 은가. 얼떨결에 응급조처를 하고 신열(身熱)에 시달리며 찾아 간 곳이 단추강의 대장간. 무의식중에 밤하늘을 찢어 놓는 망 치 소리를 따라간 끝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식한 대장장이가 청살무사의 독을 제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그를 의형으로 모시게 되고 멍청하면서 도 똑똑한 조카가 생길 줄은 더욱 몰랐다. "자네 부친이 아니라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네, 고맙다는 생각 은 말고 몸이나 보중하게." 임은후는 아버지처럼 부드럽게 손을 잡아주었다. * * * "이 이 멍청아. 너 어디를 나갔다...어!" 당철휘는 막 객잔을 들어서는 단비하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다가 너무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비하, 이 인간의 살색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연화제 를 닷 되나 만들어 놨는데, 연화제를 만들기 위해 한 냥짜리 말굽은을 네개나 소모했는데. "수, 술을 먹었는데...저 쓰러져 잤는데...기, 길을 잃어 서...' 단비하는 곧 몽둥이 세례가 날아올 듯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너, 몸 아픈 데는 없어?" "어제는 조금 아팠거든? 그런데 자고 나니까 하나도 안 아파." 당철휘는 맥이 탁 풀렸다. 내성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정말 지독히도 강한 생명력 이다. 빗물에 이십 년이나 씻겼으니 독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대붕파의 독인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들어가서 목욕하고 나오거라. 곧 출발할 예정이니까." 당철휘의 등뒤에서 맑은 음성이 터졌다. 단비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쏜살같이 계단을 밟아 올라갔 다. 더 있다가는 당철휘에게 한대 맞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한연지는 단비하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다음 당철 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된 일이지요?" "독이...저놈에게 졌어." "그게 말이 되나요? 어제만 해도 분명히 청동빛이었는데." "독이 몸에 침투하여 내성에 진다면 땀이나 뇨(尿)로 씻겨 내 려가 몸에는 한 올의 독도 남아 있지 않아. 하지만 독에 대항 하는 항체(抗體)는 성장하지. 저놈처럼 건강한 놈은 훌훌털고 일어날 수 있어." "혹시...해약을 복용했다면?" "응? 한 매! 도대체 왜 이래? 단비하 저놈이 소림방장이라도 돼? 나도 독에 대해서라면 일가견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야. 그런 내가 무슨 독인지도 모르는데 어떤 놈이 해약을 만들어?" 당철휘는 자존심이 상한 듯 언성을 높였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니까 화풀어요. 혹, 흥산성에 독의 대가가 살고 있나요?" "없어." 당철휘는 한마디 내뱉고는 횡 하니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지 않아도 연화제가 무용지물이 되어 기분이 나쁜데다 천고일독 (千古一毒)을 알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오장이 뒤집히는데, 하 는 말이라고는... 한연지는 깊은 생각에 골몰했다. 독에 관해서라면 문외한이니 할말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어제까 지 중독된 증상이 뚜렷했던 사람인데 멀쩡하다니 말이 안 된 다. 독이 내성에 졌다면 서서히 없어져야지 갑자기 완쾌될 수 가 있을까? '문주 손에 죽게 만들더라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겠 군.' 단비하가 부담스러웠다. 가볍게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무게를 더해 가는 인간이었다.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멍청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일 게 다. 그 점도 확인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지닌 검공,독공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유효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까. 한연지는 흘끔거리는 점소이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계단을 밟았 다. 흥산성에서 모록산까지는 칠십오리.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이면 닿을 거리지만 워낙 늦게 출발했던 지라 하룻밤 이슬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계절은 초 여름이라서 야영(野營)하기에는 적합했다. 당철휘는 능숙한 솜씨로 천막을 치고 주위에 백반 가루를 뿌렸 다. 천막안에는 냄새가 향긋한 용연향(龍燕香)을 피워 뭇 벌레 들의 접근을 막았다. "히히히! 정말 재미있다. 이거 봐라." 단비하는 연신 웃어대며 산 개구리 한마리를 잡아 놀았다. "야! 멍청이! 너 이리 와봐!" 당철휘는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웃는 웃음소리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점도 기분 나빴다. 멍청하니까 그렇게 웃 을 수밖에 없고, 바보니까 천막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 니 시킬 일도 없지만 마음껏 패버리고 싶었다. 원인은 하나 총명하고 아리도록 예쁜 한연지가 단비하만을 쳐 다보고 있다는 것, 멍청이한테 일어나는 질투를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응? 왜?" 퍼억! "아이쿠!" 웃는 얼굴로 달음박질해 온 단비하는 느닷없이 뻗어 온 발길질 에 안면을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아앙! 왜 때려?" "응? 울어? 이게 어디서..." 말을 하던 당철휘는 순간적으로 모든 동작을 정지하고 납짝 엎 드렸다. 한연지 역시 검을 움켜쥐고 긴장된 기색을 떠올렸다. "아아앙! 아파서 죽겠단 말야. 왜 때려?" 철부지 단비하가 우는 소리만이 부드러운 미풍과 함께 야영지 롤 훑고 지나갔다. 사사사삭...! 풀숲을 기는 벌레 소리 아니 바람 소리! 극히 저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당철휘의 몸은 번개처럼 쏘아졌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조독기가 들려진 상태였다. 파앗! 그의 몸이 수풀속에 잠기는 찰나 조독기에서 흰빛 광망이 쏘아 졌다. "크윽!" 분명 사람의 비명 소리가 화응했다. 순간 한연지의 신형도 수 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손에서 싸늘한 한광을 발산하는 검이 날을 드러내며 쾌속하게 수풀더미를 베어 넘겼다. "아아악!" 이번에는 좀더 인간다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크억...!" 연이어 터지는 비명은 수풀 속에 응크린 사람이 한두 명 아니 라는 증거였다. 간간이 울리는 비명은 일 각 동안 지속되다가 태고의 정적을 몰고 온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이 장밖에서 몸을 일으킨 당철휘는 흑의무복을 입은 장 한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걸어나왔다. 한연지는 좀더 멀리 삼 장 밖에서 몸을 일으켰다. "끄으윽...! 마, 말하겠습니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털보장한은 당철휘의 고문을 이기지 못 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우모침(牛毛針)으로 혈도를 쑤시는 당문의 고문술은 정평이 났으니 어찌 버릴 수 있으랴. "어디서 온 놈들이냐?" "헉! 헉! 이, 일독문." "일독문?" 당철휘와 한연지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선제 공격을 가할 줄이야, 다행히 무공이 낮은 놈들이 왔으니 망정이지 고수가 끼어 있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너희들만 왔느냐?" "저, 저희는 정찰만...잠시 후면...크윽!" 말을 있던 털보장한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당철휘가 지닌 암기들은 모두 독 묻은 암기뿐이었다. 독 묻은 우모침으로 혈 도를 찔렸으니 계속 고통을 당한다 해도 얼마살지 못할 운명이 었다. "한매! 놈들의 선공이오."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해요." 투지에 불타는 당철휘에 비해 한연지의 표정은 다급했다. "일독문이 선공을 가해 온다는 것은 만우당과 대붕파가 당했다 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우리 뒤를 계속 미행했고, 우리가 당문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예요. 대가라면 자 신없는 싸움을 하겠어요? 무조건 이 자리는 벗어나야 해요." 당철휘는 한연지의 말을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깊 은 신음성을 토해 냈다. "미행자는 흥산성 쪽에서 일독문은 모록산 쪽에서 올 거예요. 우리는 모록산쪽으로 가야 돼요. 빨리..." 말을 마친 한연지는 단비하의 마혈(痲穴)을 짚었다. 그리고 뒷 덜미를 움켜쥐자마자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 한매?" 부지불식간 경악성을 터뜨린 당철휘는 한연지의 뒤를 쫓아 부 지런히 신형을 날렸다. 일 다경이나 지났을까? 말 세 필이 길게 투레질하고 천막쳐진 야영지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일독문주 안태강과 대회의청에서 얼굴을 보인 사람들 전부 그 리고 수하인 듯한 사람들 육십여 명. 모두 칠십여 명이나 되었 다. 하지만 그 중에 이호법 배원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갈 문을 놓친 것만도 성질나는데 그가 내민 취마옥환 한쌍을접하 고 수하들의 쑥덕거림을 듣는 순간, 가차없이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흥! 이 멍청한 놈들은 정찰만 하고 오랬 더니, 에잉!" 안태강은 화를 참을수 없는지 싸늘하게 변한 털보장한의 시신 을 힘껏 걷어찼다. "놈들 뒤에는 당문 십절이 따르고 있습니다. 놈들이 도망갈 곳 이라고는...흥산성 쪽으로 간다면 조우할수 있습니다." 일호법 예지신(倪枝申)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태강의 급한 성격을 아는 까닭이다. 일독문의 주춧돌마저 서슴없이 처단하 는 성품이 아니던가. 그 점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몸에 음용시킨 만성독약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수없이 산재한 독문 중 성장 가능성이 가장 두드러진 문파였고 문주였다. 그러던 사람이 어 느 날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혼인식을 올린 지 반년밖에 안된 부인 만홍선자(萬紅仙子) 기 사희(奇沙姬)가 일독문 최고비전(最高秘傳) 부육수와 화골수의 제조 비법과 독물을 모두 가지고 야반도주한 다음부터... 수하들도 믿지 못해 만성독약을 복용시키고 한달마다 한번씩 해약을 내주었다. 해약을 받는 날은 누구나 긴장했다. 충성심 이 약간이라도 의심나는 수하에게는 해약을 주지 않았으니까. 이십 년 만에 독물을 모아 음의 성질을 지닌 부육수와 양의 기 윤을 띤 화골수를 만들어 본래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되찾았 는가 싶었는데... "가자!" 안태강은 예지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령을 발하고 신형 을 날렸다. 한편, 당철휘는 언잖은 기분으로 신형을 날리던 중 갑자기 바 위 뒤로 숨는 한연지를 따라 몸을 은신했다. 그리고 바로 뒤이 어 자신들 옆으로 스쳐 지나는 칠십여 명의 일독문 무리를 보 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한연지의 말을 듣지 않고 버텼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 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한연지는 아무 소리 말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대고 바위 뒤에 서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바로 일독문 무리들이 사라진 방 향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쫓고 쫓기는 입장이 바뀐 것 이다. 이렇게 뒤를 따르면서 조심만 한다면 결코 발각될 염려 는 없었다. "수하들이 있으니 빠르게 나가지 못할거예요. 잠시 쉴 때 전서 구를 날리세요. 들키면 끝장인 거 알죠?" 바짝 결에 붙어 말하는 한연지에게서 상큼한 냄새가 풍겨 왔 다. 이 냄새는 분명 그녀의 육향(肉香)이었다. 방향제(芳香劑) 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가 그녀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 이다. 입이 바짝 타들어 가며 몸에서 더운 열기가 쏟아졌다. 성(性) 에 대한 충동이 어처구니 없게도 이런 상황에서 발동하다니. "한 매!" 당철휘는 한연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당신이 나의 여자라는 확신을 줘." "대가는 참..." 한연지는 곱게 눈을 흘기면서 몸을 살짝 비틀었다. 하지만 그 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는 동작은 아니었다. 자신을 얻은 당철 휘는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빨아갔다. "으흡...!" 도리질을 하던 한연지는 단비하를 놓고 양팔로 당철휘의 목을 끌어 안았다. 서로의 혀가 얽혀들고 진한 타액을 주고 받았다. 흥분한 당철휘의 손이 가슴을 더듬는 순간, "그만요." 나지막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당철휘는 그 작은 소리 를 무시할수 없었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몸을 태우고 있지만 더 이상 발산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매, 왜?" "제가 말했잖아요. 당신이 차기 문주로 내정되는 날...다른 것 은 고사하고 적어도 무산파는 제거해야 되지 않나요?" 순간 당철휘는 전신에 돌던 뜨거운 피가 급속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한매. 왜, 왜 무산파를 들먹..." "빨리 쫓아가야 돼요." 한연지는 냉막한 기색을 띠면서 당철휘의 손을 뿌리쳤다. "하, 한매!" "아무 말도 듣기 싫어요. 하지만 당신이 차기 문주로 내정되고 무산파를 제거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당신 여자가 될 거예요." 말을 마친 한연지는 품에서 봉황문양이 양각된 호수를 꺼내 던 지듯 건네 주었다. 얼떨결에 호수를 받아든 당철휘는 얼굴색이 하얗게 탈색되었 다. 비로소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갈홍아에 대한 모든 것.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에 안기고 용서하다니 선 녀처럼 착하고 총명한 여자이거나 더없이 지독한 악녀일 게다. "다, 다시는 그런 일이..." "됐어요. 믿어요." 한연지는 하얗게 웃었다. 무산삼괴를 죽이는 순간 터뜨리려던 일, 지금은 그 상황보다 훨씬 효과가 컸다. 당철휘는 앞으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절대로... * * * < 일독문 흥산성으로 이동 중. 인원은 칠십여 명. 일독문 전고수가 동원된 것으로 사료됨. > 제삼실 암기실장 천수나천 당두감은 당철휘에게서 날아온 전서 를 받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당문 십절과 부대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이미 완숙한 경 지에 들어선 당문 십절에 비해 젊고 혈기방장한 부대주들은 물 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돌봐줘야 할 대상이었다.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있는 부대주들도 있지만 아직 절정고수를 만나지 못해서이고 만약 구파일방의 장로들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일패 도지(一敗塗地)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부대주 두명과 멍청이 한명이 무려 이십 년 동안 찾지 못 했던 대독문(大毒門)들을 찾아내고 있다. 그것도 미처 석 달도 걸리지 않고, 또한 은거한 독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실전(失 傳) 독술(毒術)을 완성했다. 그러나 혈반사접의 독은 아니다. 이십 년이라는 기한, 완성된 독술, 그리고 혈반사접. 무슨 상관 관계가 있을 법도 한데 감이 잡히지 않았다. "놈들은 어느쪽으로 오고 있나?" "전서에 의하면 상률촌(上栗村)에서 방향을 틀어 산길로 접어 들었다 합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일독문주는 있다던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제육실장님과 버금가는 신법을 구사하는 인물이 있답니다." "일독문주라는 이야기군. 일독문은 부시독(腐屍毒)을 연구했 지. 완성 했다던가?"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으음! 일독문은 수독(水毒)을 사용했었다. 수독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지. 가까운 거리에서는 누구도 당적하지 못한다. 물 방울 하나라도 몸에 닿는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돼. 하지만 거 리만 둔다면 승산이 있다. 오장, 오장밖에서 공격할수 있는 암 기를 준비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환상적인 손을 꺼내는 순간 암기 열 개를 던진다는 암기실 부 대주 환수(幻手) 풍도건(風棹乾)은 장읍을 취한 후 물러났다. '수독에 암기라...' 실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위대주가 만우당을 칠 때도, 중위대주가 대붕파를 멸할때도 가장 극성(極盛)인 공격력을 사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수독 에 암기라면 필승이다. 비록 적은 칠십여 명이고 이쪽은 이십 여 명이지만 승산은 구할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매복(埋伏)을 하고 기다린다면... '당기...' 혈통의 갈래를 따져 올라간다면 육대조(六代祖)에서나 만나는 멀고 먼 혈족. 그의 지혜가 하늘에 닿았음은 익히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만약 사충전과 무산파까지 이런 안배를 펼쳤다 면 독문은 통일된다. 당문에 의해서... 물론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고심하며 만든 독들의 정화는 당 문이 차지하게 된다. 교묘한 시간적 안배였다. 독의 완성과 공 격...옆에서 자세히 관찰하야만 이런 시기를 포착할수 있다. 문주는 어떻게 이런 시기를 잡았을까? 혈반사접의 등장과 더불 어 절정 독들이 일제히 완성 되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 제였다. 독문을 통합한 다음은 승승장구다. 모든 독문의 힘이 집약된 당문을 누가 건드리랴. 지금 어깨를 으스대는 아미파와 청성파 역시 썩어 문드러진 시신으로 가득 덮일 것을. 문득, 당두감은 추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 그러면 천하 공적이 되고...멸문한 다. 설마 그렇게 까지야.' 당두감은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직 혈반사접을 만든 문파는 나타나지 않았다. 혈반사접을 만 들 정도의 문파라면 당문이 전력을 기울여도 승산이 없다. 일독문이 만들었다면 제삼실 암기실은 전멸할 것이고 다음 차 례인 사충전이 만들었다면 제오실 형옥실장(刑獄室長) 독비독 심(獨臂毒心) 당철목(唐鐵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전초(前 哨)를 몰살시킨 문파는 전력을 가다듬은 당문에게 총공격을 받 겠지. 이런 상황에서 독문을 통일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문주가 특별히 지시한 일은 그렇게 밖에 생각이 안들었 다. 당두감이 받은 특별 지시는 일독문의 완성된 독을 채집하 는 것. 문주는 일독문이 독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하는 점이다. 마치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지 않은가. 당두감은 생각을 그치고 전면을 노려보았다. 타타탁...! 급격하게 땅을 박차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적어도 육칠십 명 은 되는 사람들이 내는 발걸음 소리였다.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전혀 경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까아악! 까악! 까...악!" 길게, 짧게 길게 세 번의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환수 풍 도건이 내는 공격 준비 신호음이었다. 타타탁...! 십 장, 구장, 팔장...사장. "쳐랏!" 풍도건의 명령과 동시에 손바닥만한 화살 열 개를 일시에 발사 한다는 소전십궁(小箭十弓)이 발사되었다. 투골망과 함께 당문 칠병의 하나였다. 하늘을 나는 소전 삼백 개는 무방비로 신법 을 전개하던 칠십여 명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화골만천(火骨滿天)!" 일독문주 안태강의 입에서 대갈이 터져 나오고, 칠십여 명이 손에 들고 있던 옥병 마개를 열어 자신들 전면에 일제히 뿌렸 다. 치치직...! "으아악...!" 섬뜩한 기음과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지며 솟구쳐 오른 선혈이 눈앞을 가렸다. "이, 이럴 수가..." 안태강의 놀라움은 컸다. 단 한번의 격돌로 삼십여 명의 수하가 명을 달리한 것이다. 당문의 매복이 있음을 짐작해서 무질서한 듯 했지만 사실은 엄 밀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이동했다. 암기와 독술로 유명한 당 문. 그렇기에 화골수를 언제든지 사용할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런데 삼십여 명이 죽다니. 당두감과 풍도건 역시 대단히 놀라고 있었다. 소전십궁이 어떤 병기던가! 빛살처럼 빠른 화살 삼백 개면 능 히 전멸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겨우 삼십여 명이라니, 뿌연 액체에 소전이 녹아버리다니, 그짧은 순간에 도저히 믿을수 없 는 일이었다. 소전십궁에 화살을 재 장전한 당문도가 화살을 겨누며 몸을 일 으켰다. 소전은 최상질의 현철(玄鐵)로 만들었다. 그런 만큼 위력도 강했지만 만들기도 어려웠다. 당문이 만든 소전은 모두 일천 개, 그 중 일독문도의 몸에 박힌 오십여 개는 회수한다해 도 이백오십여 개는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 다시 똑같은 현상이 발생한다면 절반이 사라지는 것이 다. 그러면 소전십궁의 사용을 당분간 절제해야 한다. 안태강은 당문의 거대한 힘을 절감했다. 제갈문의 말마따나 일 단은 물러섰어야 옳았다. 이십 년 동안 갈망했던 꿈이 이루어 지자 이성을 상실했다. "암기라면...당두감인가?" "실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겁을 상실한 놈이군." 환수 풍도건이 싸늘한 일성을 토하며 나서는 순간이었다. "물러나라. 한문파의 문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멀찌감치서 구경만 하던 당두감이 위엄 서린 목소리로 일갈을 내뱉은 후 앞으로 걸어나왔다. "내가 당두감이오. 할말이 있는것 같은데..." "으음! 비무를 요청한다면 받아주겠소?" 안태강은 자신이 패했음을 느꼈다. 지금에 와서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호쾌한 죽음 뿐. 칼날위에 사는 목숨이라 죽음에 대 한 미련은 없었다. "독으로 비무를 하자면...패했음을 시인하겠소." 당문 십절이 할 말은 결코 아니었으나 지금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방금 전에 벌인 격돌에서 화골수의 위력을 충분히 보았으니까. 이만한 독이라면 십대절독중 무형지독이나 투골독 에 버금간다. 불행히도 당두감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투골 독을 가져 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독으로, 그대는 암기로...공평하겠소?" 안태강은 품에서 옥병 두 개를 꺼내 마개를 열고 양손에 거머 쥐었다. 투명한 옥병 속에는 희뿌연 액과 붉은 액이 담겨 있었 다. 당두감은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무엇을 들 고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차앗!" 공격을 먼저 시작한 사람은 안태강이었다. 그는 빠르게 몸을 붙여오면서 옥병 속에 든 액체를 확 뿌렸다. 쭈욱 뻗어 나오는 액체는 다가오기 전부터 살이 썩는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화골수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 부육수에서 나는 냄 새리라. 타악! 쉐에엑...! 당두감의 옷을 찢고 튀어나온 강침(剛針) 한 개 그와 동시에 신형은 누가 뒤에서 잡아끄는 것처럼 주르륵 밀려났다. 수독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동작이었다. "어딜... 크윽!" 한 걸음 더 다가서려던 안태강은 심장이 꿰뚫리는 아픔에 엉거 주춤하고 말았다. 솟구치는 선혈이 옷을 붉게 물들였다. "이, 이게 무슨 암기?"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가누고 말문을 열었지만 두눈에는 믿 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화골수로 공격하고 부육수로 전면에 치밀한 방어막을 펼쳤거늘 그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는 강침이 있다니... "당문 칠병 중 하나, 파갑전(破甲箭)이오. 기구에 의해 발사되 며 강침은 대설산 백철(白鐵)로 주조되었소. 단 하나뿐인 화 살. 이제 당문에는 육병(六兵)만이 남았으니 억울한 죽음은 아 닐 게요." "파갑전...흐흐흐! 파갑..." 안태강은 말을 마저 마치지 못하고 고목이 무너지듯 뒤로 넘어 갔다. 쿵, 하고 땅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착잡 하게 만들었다. 그중 한사람은 일호법인 예지신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만성독 약에 중독된 상태가 아니던가. 문주가 없다면 길어야 한 달밖 에 살지 못하는 인생. "공격해라!" 그가 내린 결정은 양패구상(兩敗俱傷)이었다. 설혹 그렇게는 안 될지라도 몇 놈은 저승길에 동반할수 있으리라. 파아앗...! 타타탁...!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독운무(毒雲霧)는 일제히 당문도를 쓸어 갔고, 당문도가 발사한 소전십궁은 일독문도를 꿰뚫었다. 십이 명. 백여 명이 소로에서 벌인 접전은 열두명만 살려 놓았다. 당문 이 삼개 파를 몰살시키는 동안 처음으로 겪은 고전이었다. 당두감은 녹피장갑을 끼고 빈 옥병 두 개를 집었다. 부육수와 화골수가 담겼던 옥병, 그속에는 극히 미량의 독수가 남아 있 었다. "이 옥병의 재질은 천산(天山)에서만 볼 수 있는 곤옥(昆玉)이 다. 유일하게 독기를 흡수하지 않는 물질이지. 모두 거둬라. 그리고 옥병에 남은 방울들을 한병에 모아라. 조금은 건질 수 있을게다." 명령을 내리던 당두감은 문득 눈에 이채를 띠고 커다란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지금 내려오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야." 일장격돌에 대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지 아니면 너무도 허무한 결과에 대해서 고뇌하는지 그의 목소리는 어눌했다. 눈은 나무 위를 지나 멀리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었 다. < 第 一 卷 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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