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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휘익! 휘이익...!
당철휘와 한연지가 떠난 자리에 무산이괴 독사우공이 내려섰
다. 그의 뒤로는 제갈문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모든 상황을
예측했던 듯 심각한 상태의 단비하를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
이 없었다.
"낄낄...! 과연 네 예측은 한치도 어긋남이 없군. 그런데 하나
만 물어 보자. 왜 이놈부터 공격하라고 했냐? 여우 같은 그 연
놈들부터 공격했으면 좋았을 텐데?"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당철휘나 한연지가 비록 고수이지만
독사우공께서 그들을 먼저 쳤다면 둘 중 하나는 제거했을 겁니
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갈 소저의 복수를 시원하게 할 수
없지요. 은원은 맺은 사람들끼리 풀어야 합니다."
"딴은 그렇군. 그럼 또 한가지 이유는?"
"당철목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 뒤를 따르는 당문 십절이 있는 것을 아는데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요. 당철목이 앞뒤 재지 않고 허겁지겁 달
려 온다면 승산이 있지요."
독사우공 정태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머
리여서인지 제갈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력을 기
울여 두 연놈부터 요절낸 다음 당철목을 제거하면 쉬울 텐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말끝을 흐렸다. 흐린 말끝처럼 심사가 복잡하기도 했다. 자신
이 생각한 대로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날수 있겠지만 아무
래도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무산파파의 어지러운 심기가 문제였다.
손녀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 성품을 변화시켰다. 꽉 짜여진
계략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사우공의 역할을 대신하려 했
던 무산파파.
그때 모습은 영락없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철부지가 아니던
가.
무산파 모든 사람이 당문의 저력을 과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사충전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기에 당철
목을 보낸터 섣불리 나설 계제가 아니건만...그 정도의 힘이라
면 몰락 직전의 무산파 정도는 너무 손쉬운 상대가 될 것이다.
'동굴로 숨어든 두 사람을 죽여야 될 텐데..."
마음이 답답했다. 무산파파는 당철휘나 한연지를 죽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어린 놈이라도 독사 새끼 역시 독사인 것
만은 분명했다. 살려 두면 언젠가 목젖을 물어 뜯으려고 달려
들 게다. 그러나 무산파파가 보여 주는 증오의 강도로 보아 살
려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고두고 고통을 주며 피를 말려
죽이려 할 게다.
"이놈은 어떻게 할까?"
문득 들려 온 말에 제갈문은 황급히 정신을 추슬렀다.
"무인이란 은원이 분명해야지요. 갈홍아를 살려 준 보답을 해
야 옳겠지요."
"보답? 아니 그럼 이놈을 살리잔 말야? 보다시피..."
팔짝 뛰는 독사우공을 보면서 제갈문은 빙그레 웃었다.
"비홍사의 독이야 독사우공께 해약이 있으니 문제없을 테고...
당철휘 그놈에게 당문 칠병의 하나인 혈왕절편이 있을 줄은...
아무래도 장문의 힘이 필요한 바...어서 해독약부터..."
제갈문은 독사우공을 다그쳤다.
"제길! 비홍사의 해독단은 단 네 알밖에 만들지 못했는데..."
정태구는 입으로는 불평을 토해 내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품에서 해독단을 꺼내고 단비하의 입을 벌려 넣은 다음 결분혈
을 누른 행동은 실로 전광석화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응? 이놈이 당한 것은 독공(毒蚣)의 독인데? 정말 혈왕절편에
독공의 독이 묻어 있었어. 악랄한 놈들..."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비홍사는 신경독인데 독공은 혈액독이야. 서로 성분이 달라
비홍사의 해독단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지. 길
어야 일각?"
"일 각이라...나머지는 운수 소관이겠지요."
"제길! 곧 죽을 놈한테 네 알중 한 알을 소모했다니...완전히
뒷간에다 산삼(山蔘)을 버린 격이군."
"빨리 가봅시다. 지금쯤 장문이 손을 쓰고 있을테니."
제갈문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신형을 띄웠다. 달밤에 야조가
날아가 듯 우아한 신형이었다.
'나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신법...제갈문...방심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야. 만약 무산파에 악심(惡心)을 품는다면...'
정태구는 단비하를 들어 어깨에 걸치며 형형한 안광을 발했다.
천하가 좁다고 제멋대로 돌아다닌 수많은 세월은 경륜(經綸)이
란 걸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경륜으로도 제갈문이 왜 멸문 일
보 직전의 무산파에 몸을 담았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끙! 그놈 되게 무겁네."
하지만 단비하를 걸쳐 메고 신형을 날리는 정태구의 모습은 무
척 가벼워 보였다.
단비하는 도인술로 비홍사의 독기를 몰아가던 중 당철휘가 무
심결에 내뱉은 말을 들었다.
- 얼굴색이 흑갈색으로 병색됐으니 정통 해약이 없다면 죽은
목숨...제 아비 결으로 가게 될 거야.
제 아비 결으로 가게 될 거야.
너무 큰 충격은 의념(意念)을 망실했고, 독기는 걷잡을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전신을 휘돌았다. 전신이 마비되었다. 운공조식
도중 마음에 든 심마는 육신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갔다. 그러
나 그보다 꼼짝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가 죽다니. 아아! 하늘이시여!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수많은 고초를 당하고 생체 실
험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당문을 떠나지 못했던 까닭은 볼모나
다름없는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죽다니...
복부에 화끈한 감촉이 틀어박혔을 때에야 정신을 수습했다.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오고, 육중한 몸은 통나
무처럼 무너지는 중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 또한 어둠속에 묻
혀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데...
똑! 똑! 똑...!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 퍼부은 소나기의 잔재, 나뭇잎은 무슨 사연이 그리 많
아 이처럼 끊임없이 눈물을 흘릴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감시의
대상이었고 칼날 위에 사는 무인들보다도 더 죽음에 대한 공포
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살아온 탓이었다. 말 한번 삐끗 잘못하
면 그날로 이슬처럼 사라지는 목숨.
'당문...당문!'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문 모든 사람들이 생각나
고 그들이 찢어 죽이고 싶도록 미울 뿐이었다. 그 중 누가 가
장 죽이고 싶냐는 물음을 던진다면 대답할 수 없었으리라.
모든 사람이 싫고 미웠다.
"휴우...! 정 장로의 비홍사도 별것 아니군. 이제 몸에 구멍난
것만 메우면 사람 구실은 하겠어."
빙굴에 들어선 것처럼 으스스한 소리가 들려 왔다.
"장문, 수고 많으셨습니다."
극히 낮으면서도 새근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홍아를 살려 준 게 이놈 맞나?"
"병신같이 당가 애송이에게 당한 놈이 무슨 수로 자포독을 해
독할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형의 말로는 이놈이 무애객잔을
일러줬다고 하니까...끙! 연관은 있네요."
'무애객잔! 홍아...! 아, 갈홍아!'
단비하는 비로소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자신을 암습한 곳
이 사충전이 아니라 무산파란 것도... 하기는 비홍사의 독기는
정통 해약이 아니면 풀 수 없을 테니. 이제야 자신이 살게 된
연유를 알았다.
"전 장로는 차질없겠지?"
"전 장로는 성격이 차분합니다.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죠."
"당철휘, 그놈은 도망가지 않겠지?"
"죽였어야 합니다. 한연지만 살려 보내라고 그렇게 누누이 말
씀드렸는데...만약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당철휘 때문..."
"그만! 당철휘 그놈은 사심독(邪心毒)에 중독..."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신열이 너무 높아 의식을 아득한 먼 곳
으로 끌고 간 탓이다. 다른 사람들이 몇 마디 더 주고 받았을
터이지만 알아들을 계제가 아니었다.
* * *
"크윽! 빌어먹을 할망구..."
당철휘는 길 없는 산길을 치달리며 묵직한 비음을 토해 냈다.
"당 대가, 잠깐만요."
부리나케 뒤를 쫓아오던 한연지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고통으
로 얼굴이 이지러질 무렵이었다.
당철휘는 신형을 곧추세우고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요. 이건...이상한데요?"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해? 지금이 상황에서?"
처음으로 역정을 냈다. 여유있게 말하는 모습이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비웃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정말 이상해요. 안 그래요? 우리는 중독당했기 때문에 마음껏
신법을 펼칠 수 없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그러면 그 할망구가 뒤쫓아와서 목을 따야..."
한연지의 말을 반박하던 당철휘는 문득 일리있다는 느낌에 말
끝을 흐렸다. 독도 독이려니와 무공 자체만 보더라도 감히 상
대할 수 없을 정도. 당문 십절이라면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런
데 아직까지 조용하다는 것은...
'다른 급한 일이 생겼다.'
"혹시 우리가 쏜 신호탄을 보고..."
"아니에요. 시간이 일러요. 우리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야밤에 산길을 타고 찾아오려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삼각은 있어야...아!"
한연지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말을
잊은채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건 정말..."
당철휘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면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 앉았다. 무산파파의 장검에 베인 복부는 예상외로 상처가
깊었다. 살갗속 누런 지방이 드러나고 흐르는 핏물은 멈출줄
몰랐다.
'할망구...꼭 내 손으로 죽여 주마.'
이를 부드득 갈며 요상약을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도주하느라고 지혈(止血)조차 못 했기 때문에 현기증까지 일었
다. 긴장이 풀리자 모든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골수까지 저며드는 고통에 눈살이 찌푸려질 대로 찌푸려졌다.
'크으윽.'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는 것보다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당한 패배가 가슴 아팠다.
"빌어먹을 동굴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생각에 잠긴 한연지를 보는 눈이 미덥지 못했다.
비홍사에 기습을 당할때만 해도 그럴싸하게 들린 말. 동굴은
또 어떻던가? 입구는 좁고 안은 넓으며 한눈에 전방이 환히 보
이는 요지(要地)가 아니던가. 이런 동굴이라면 아무리 사충전
이 지독하다 해도...
그 순간만은 이런 여자를 내가 소유할 수 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동굴로 들어서는 순간 일이 심상치 않
음을 알았다. 독에 관한 한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 자부하던 몸
이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는 냄새를 놓칠 리 없었다.
'사심독! 무산파파!'
중원 천지에서 사심독을 사용하는 사람은 무산파파밖에 없었
다. 피로감 ,허탈, 체온 상승의 초기 단계를 거쳐 경련, 구토
를 일으키고 간장(肝腸)과 신장(腎臟)을 녹여 버리는 치명적인
독.
하지만 즉음에 이르기까지는 하루 정도의 잠복기를 거치기 때
문에 결전에 임하는 독문고수들은 사용치 않는 독이었다. 그러
나 무산파파만은 유독 사심독을 즐겨 사용했고 상대가 검을 접
는다면 해독약을 주는 아량도 베풀었다. 중후한 성품을 엿볼수
있는 단면.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동굴 가득히 퍼진 사심독은 치사량
(致死量)을 넘어 죽일 의사가 확실함을 보여 주었다. 뿐이랴!
황급히 동굴을 물러 나왔을 때 야차처럼 귀광을 번득이며 달려
드는 모습은 흉신악살을 능가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죽은줄 알았던 갈홍아의 등
장. 어떻게 살았을까? 자포독은 당문 십대 절독으로, 당문에서
제조한 해약이 없다면 신이라 해도 살 수 없는데, 내력이 깃들
인 발길에 복부를 걷어 채었으니 내장이 파열됐을 텐데...
한연지가 '조독기' 하고 외치지 않았다면 날아온 검날에 머리
가 두쪽으로 갈라졌으리라. 너무 놀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
었으니까.
"알았어요...호호호...!"
한연지는 느닷없이 귀신의 호곡성 같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
렸다. 여태껏 발소리조차 죽여 가며 신형을 날리던 모습과는
상반된 행동, 상처 입은 맹수가 포효하는 것 같은 처절한 웃음
소리였다.
"무산파에 귀재가 있군요."
갑자기 웃음을 멈춘 얼굴은 웃을 때보다 더욱 귀기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당철휘는 아픔을 참으며 물었다. 마음속은 사심독 해독 방법을
찾느라 부심했지만 너무 뜻밖의 상황을 접하자 묻지 않을수 없
었다.
"대가는...갈홍아를 깨끗하게 죽였어야 했어요. 무산파파는 우
리를 살려 줬어요. 왜인 줄 아세요? 우리가 결코 이 황학산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자신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도 알고 있어요."
말을 잇는 한연지의 눈동자는 귀광으로 반짝였다.
"...!"
"다시 말해서 당문 십절을 잡은 다음 요리하겠다는 심산이에
요. 그 다음 천천히...죽이겠지요. 마음껏 조소하고 즐기면서
...이게 무산파파에요. 늙은 생강이 맵다는 이유를 이제 알았
나요? 대가는 엄청난 강적을 만들고 말았어요."
당철휘는 소름이 오싹끼쳤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지만 죽일 수 있는
목숨을 좀더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 살려 주다니, 어쩐지 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너무 쉽게 벗어났다 했는데...
"미쳤군. 감히 당문 십절을 죽이려 하다니."
"그럴까요? 우리도 당했어요. 처음부터 동굴로 숨어들 줄 미리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독을 풀어 놨고...그렇지 않았다면 이
렇게 쉽게는..."
"그렇다면 무산파에 한매를 능가하는 머리가 있다는 말인데."
"비꼬지 마세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패배는 한번으로 족해
요. 그들은 우리를 알았고, 우리는 그들을 몰랐어요.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알죠. 재미있지 않나요?"
"재미?"
"무산파파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마음놓고 잠이 들어도 목이 떼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가? 후후후! 좋은 적수군. 나는 독으로, 한 매는 머리로
정말 재미있겠어."
어느쪽이 진짜 모습일까? 지금의 모습은 효웅이라 말하기에 부
끄럽지 않았지만 어떤 때는 한심하게 느껴질 적도 있으니...
"또 하나, 아셔야 될 것이 있어요. 갈홍아를 확실히 죽이지 못
했듯이 단비하가 살아난다면...뼈 아프게 후회할 거예요."
"단비하? 그렇군. 십이 년이나 죽은 듯이 살아온 놈이니까."
"대가는 사심독의 해독 방법을 생각하세요. 늦어도 일 각 안
에...당문 십절이 구해 줄 것이란 미련은 버려요. 그게 우리가
사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말을 마친 한연지는 당철휘에게 가까이 다가 앉았다.
"많이 다쳤군요. 무산파파의 일검에 살기가 실렸으니..."
"참을수 있..."
당철휘는 다시 아픔이 상기되어 인상을 쓰다가 모기 소리보다
더 가늘게 들려 오는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아무 소리나 계속하께요. 무산파파는 우리를 치기 전에 당문
십절을 먼저 쳐야돼요. 그러려면 힘을 분산할수 없어요."
한연지는 상처를 살펴보는 척하면서 계속 말을이었다.
"대가에게 미완성 풍멸환이 있는걸 알고 있어요."
"그, 그걸 어떻게..."
정말 기겁할 일이 아닌가.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어디다 쓸 것인지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
가 살려면 그걸 써야돼요. 풍멸환을 조독기로 발사할수 있나
요?"
"무, 물론..."
"좋아요. 일 각 정도 여기서 머물다가 곡구로 나가요. 그때는
우리를 막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만약 우리가 늦는다면 우리
뒤를 따르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죽어요."
한연지는 실눈을 뜨면서 가는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러나 잘하면 무산파를 때려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건 오로지 대가의 손에 달렸어요."
그리고 상처가 진정 염려된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안되겠어요. 당문 십절에게 도움을 청해야지."
"그, 그래 주겠어."
얼떨결에 장단을 맞춘다고 한 말이었다. 소곤거리던 사람이 갑
자기 목청을 돋운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한연지는 옷자락을 찢어 펼쳐 놓고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 두었던 글귀를 써 내려 갔다.
잠시 후 푸드덕 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만 비둘기가 날개를 폈
고 산중은 다시 고요한 정적에 묻혀들었다. 단지 각기 다른 생
각에 몰두한 두사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눈망울만이 어둠
을 지켰다.
* * *
< 一. 무산파의 급습.
二. 매복 중임. 당문 십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음.
三. 현재 위치는 황학산 한수곡(寒水谷) 불암(佛巖).
四. 무산일괴 미독환사, 요주의 대상.
五. 진시(辰時), 불암 후면에 도착 요망. >
독비독심 당철목은 손에 혈서를 들고 깊은 침묵에 잠겼다.
무산파와는 서로 해결해야 할 은원이 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자신이 손수 키운 형옥실 고수 이십
명이라면 독사우공뿐 아니라 무산삼괴 전부에다 무산파파까지
가세한다 할지라도 필승하리라.
그러나...
혈기에 치우친 나머지 한 팔을 잘라야 했던 뼈아픈 과거가 등
골을 짓눌렀다. 무산파에 관해서라면 당문 전체를 뒤져 봐도
자신보다 더 잘아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들의 무공, 독술 사
용하는 독.
"실장님, 하명(下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철목은 부실장 정풍화검(頂風火劍) 당상명(唐霜溟)의 말을
듣고 언뜻 고개를 치켜 들었다. 태양혈(太陽穴)이 불끈솟아 강
맹한 기도를 풍기는 육 척 거한이 눈에 들어왔다.
"소리없이 한수곡으로 접근해라. 그러나 진입하지는 마라."
결국 한연지의 혈서대로 의사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성급하게 끌어 올리려다 유혈(流血)을 볼 필요는
없다. 당철휘와 한연지의 안위가 걱정되지만 그들이 먼직 전서
를 날려오지 않았는가. 제 몸가림은 할 자신이 있으니 그런 혈
서를 보내 왔겠지.
"실장님, 신호탄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당상명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형옥실과 독제실은 한몸같이 지내 왔다. 독제실에서 만든 독의
대부분은 죄수들에게 복용되었다. 아무래도 진독의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도 괜찮은 몸뚱이가 필요했고
그런 사람들이 형옥실에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
죄인들은 독제실에서 만든 실험용 독을 복용했고 어떻게 죽는
지 보여 줌으로써 효과를 증명했다.
때로는 숨겨야 할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은 독제실장과
형옥실장 간의 합의로 영원히 묵인되었다. 형옥실과 독제실...
떼려야 뗄수없는 관계였다.
하물며 차기 문주로 가장 유력시되는 당철휘는 독제실장의 아
들. 그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데...당상명은 독비독심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독화를 믿을 수 밖에..."
"한연지 말입니까?"
당철목은 말없이 혈서를 건네 주었다.
"으음! 혈서를...믿을 수 밖에 없군요."
"최대한 빠르게 한수곡구로 다가서야 한다. 무산파 놈들이 어
떤 공격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혈서를 보내 온 점으로 봐서 성
급하게 나가서는 안된다. 감히 나를 치려고 하다니..."
독비독심은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얼굴로 나직이 읊조렸다.
그날, 비홍사에 물려 한 팔을 절단한 날부터 독사우공의 목을
베지 않고는 웃지 않기로 작심했고 십칠 년간이나 그 맹세를
지켰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웃어도 되겠군.'
그의 망막에 목잘린 독사우공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부시독에 검게 타버린 육신, 후란독(朽蘭毒)에 검게 그을린 얼
굴. 십칠 년간 농축된 한(恨)이 분출한 것치고는 어딘지 미흡
했지만 웃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미독환사 전유는 곡구에 몸을 은신하고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쳤다. 귀식대법을 펼치면 몸의 자유를 속박 당하지만 그만큼
정신이 한곳에 집중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력도 아니요, 후
각도 아닌 청력이었다.
타다다닥...!
극히 미약했지만 분명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 오랜 기간 혹독
한 수련을 받은 듯 일사불란하게 다가오는 무리가 감지됐다.
'제갈문, 기가 막히군.'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서서히 귀식대법을 풀
었다. 다가오는 행로를 정확히 예측했으니 그들이 이곳에 잠복
하리란 것은 불문가지였다.
발걸음 소리로 거리를 측정하며 양손에 피수투(皮手套)를 꼈
다.
'깨끗하게...소리없이...'
한움큼 모래를 움켜쥔 손이 잘게 떨렸다.
칠, 육, 오...삼 장 거리.
사라락!
봄철에 불어오는 황사풍(黃沙風)처럼 어둠 한편에서 누런 모래
가 허공 중에 흩어졌다. 황사는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은밀하게 숨어드는 일단의 무리들을 휘감았다. 순간,
"...?"
신음 한마디 없는 고요한 정적.
모래알이 심해 한가운데 떨어진 듯 사위는 고요한 침묵이 이어
졌다. 암습자도 암습을 당한자도 숨을 멈줬다.
'역시 당철목...'
쉽게 당하지는 않을줄 알았다. 독수에 맥분(麥粉)처럼 고운 모
래를 담그고 나흘 동안 졸여서 만든 흑풍사(黑風沙)라면 충분
할 줄 알았는데...전유는 독비독심이란 명호가 그냥 얻은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 당문은 급성장했습니다. 반면에 무산파는 오샌 세월 동안 답
보 상태...전에는 동수(同手)였을지라도 지금은 상대할 수 없
습니다. 전 장로님의 흑풍사가 위력적이지만 그 정도의 대책은
갖추고 왔을 겁니다. 날이 밝기 전에 곡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번 성패의 관건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가볍게 흘렸던 제갈문의 말이 소록소록 되살아났다.
죽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몸을 빼는 것 정도는 우습게 생각했는
데 막상 부닥쳐 보니 그게 아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전유는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 시켰
다. 독충이 다가온다면 소리가 있을 테고 독분을 뿌렸다면 냄
새가 있을 것이다. 잠행술(潛行術)을 펼친다면 육감을 벗어날
수 없고, 한꺼번에 공격해 온다면 그야말로 바라는 바다.
양손에 거머쥔 흑풍사가 믿음직 스러웠다.
한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것은 거리가 삼 장이나 격해 있었
던 상태, 만약 반 장 안에만 들어온다면 거미줄보다 총총한 모
래가루의 공세를 벗어날수 없다.
사사삭...!
일 장 앞에서 풀숲을 건드리는 음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동
시에 전유가 뿌린 흑풍사는 괴물체의 전신을 뒤덮었다.
케에엑...!
섬뜩한 기음이 야공을 찢었다.
'토끼! 내가 걸렸다.!'
간단한 계략.
못이나 수초가 우거진 늪, 숲이나 풀이 무성한 곳에서 싸움이
벌어졌을때 독문 고수들이 왕왕쓰는 수법이었다. 이때는 두 가
지의 경우가 상정된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됐다 싶어 자리를
피한다면 타초경사(打草驚蛇), 토끼나 다람쥐 등을 죽였음에도
제자리에 머무른다면 전형적인 타초불경사(打草不驚蛇)가 된
다.
상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도주하기를? 아니면 가만히 있기
를...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위치가 이미 노출 됐다는 것이다.
'놈은 내가 도주하기를 바란다. 신법에 자신있다는 말이겠지.
과연 제갈문의 생각대로다. 여기서 뛰쳐 나가 위험에 처해지기
까지 일 다경이 안 걸릴 거라고 했지? 그럼 시험해 볼까.'
전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법 중 빠르기로는 단연 으뜸인 사
전나붕(射箭拿鵬)을 펼쳤다. 허리가 활처럼 꺾인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신형은 화살처럼 쏘아졌다.
파아앗...1
그와 동시에 한 인영이 날아 올랐다. 괴인영은 전유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신법을 펼쳤다. 누가 더 빠르다고 말할수 없는 절
묘한 신법이었다.
'치잇! 당철목, 그동안 신법만 연구했나?'
이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대경공대가(四代輕功大家)의 일인으
로 지칭되던 자신이 아닌가. 흑풍사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다 하여 미독(迷毒), 신형이 아른거릴 정도로 빠
르다 하여 환사(幻士)란 말을 들었는데...
동녘이 밝아올 무렵 전유는 곡구에 이르렀다. 조금만 더 가면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테고 수하들을 떼
어 놓고 혼자 달려온 당철목은 눈깜짝할 사이에 제거될 것이
다. 그런데,
쉬익!
당철목의 신형이 달려온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쏘아지며 어깨
를 스치고 지나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 일 다경이다. 제갈문, 귀신 소리를 들을 만하군. 망설
이면 죽는다고 했지?'
전유는 앞을 가로막는 괴인영에게 육탄으로 돌진했다. 몸과몸
이 부딪칠 찰나 괴인영은 몸을 약간 틀었고 전유는 양손에 거
머쥔 흑풍사를 아낌없이 뿌렸다.
쉬리릭...! 파앗!
상대방도 독을 전개하는지 당문에서 사용하는 조독기 특유의
음향이 들렸다. 하지만 전유는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황
급히 좌로 일보 비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달렸다.
"노...옴...!"
추적자는 황급히 신형을 날리려다 묵직한 침음성을 터뜨리며
발길을 멈줬다.
눈앞에 나타나는 인물들. 독사우공, 늙은여자는 무산파파일 테
지만 머리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계집과 기다란 마른 장작 같
은 놈은 누군가.
미독환사 전유 역시 몸을 돌려 세웠다.
오(五) 대(對) 일(一)의 싸움, 상황은 역전되었다.
첫댓글 즐감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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