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高手)의 흔적
늘푸른언덕
하루의 감정은
고달픈 일과(日課)에서 열도를 더해가고
먼지 자욱한 가로는
바비론의 화산(火山)처럼 들끓고
누군가 부채질 바람을
보내는 나무그늘에
가슴으로 전(傳) 해 오는 눈부신 화사(花蛇)의 야기들
뜨거운 사구(砂丘)를 넘는 아우성은
저 육교가 서는 아스팔트의 비명
나의 여름이, 여기는 이대로
푸르른 시간, 짤막한 행복
옛날에 乙女에의 사랑처럼
또 몇 귀의 서정시를
쓰는 시간을 준비하리
스산한 삶의 퇴로에서도
유난히 검은 눈망울을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는 아픔
나도 한 잎의
녹음을 당신께 드릴 수 있나니
녹음(綠陰)에 부치는 사연 / 최선덕
제 인생 나이 20세, 약관(弱冠)의 시기에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신 선친께서 살아생전 쓰신 글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녹음(綠陰)에 부치는 사연>이란 제목의 유작 시를 처음으로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50여 년 전, 강원도 춘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선친은 시인이며 수필가였습니다.
젊은 시절 많은 시와 수필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께서 남긴 유작들이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이 시는 제가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마치 유물과도 같은 유작 시입니다.
‘잘 살아보자’는 전 국민적 구호를 외치며 6~70년대 오직 일로만 매진하던 여유 없던 고달픈 삶의 일상을 뚫고 절절한 사연을 담아 마치 한 통의 연서(戀書)를 쓰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생 50이란 비교적 짧은 삶을 살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신 부친의 삶을 기억해 보면 한마디로 ‘낭만스러움을 겸비한 삶의 풍류객’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음악과 술을 좋아하셨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겨 하시며 시와 수필 등 문학을 사랑하시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치지는 못하셨지만 재야의 고수처럼 살아가시던 선친의 삶 속에서 아들인 제가 발견한 것은 인생을 관조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던 삶의 고수로서의 멋진 가르침입니다.
언어의 조탁미로 표현하며 절제된 감정선을 잘 담아낸 오늘 인용한 유작 시에서도 삶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은 고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잡지 기사에서 흥미롭게 다룬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씨와 2002년 월드컵 4강의 주인공 축구선수 박지성 선수의 발, 그리고 피겨의 여왕 김연아 양의 혹독한 훈련으로 변형된 발의 모습이 실물 사진과 함께 한 때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발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발이었고 그 발이 상징하는 것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의 흔적을 오롯이 담아낸 듯한 인증샷이어서 오랜 감동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발을 보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과 남모르는 피눈물을 흘렸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발은 그대로 그들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으며 바로 고수의 흔적을 입증합니다.
어디 이들의 발뿐이겠습니까? 숨은 노력으로 최고의 정상에 오른 각 분야의 최고수들의 비밀을 파헤쳐 보면 어딘가에 그 뚜렷한 흔적들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재야엔 정말 숨은 고수들이 많습니다.
요즘 주말이면 강원도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이동 수단을 대중교통편에서 직접 운전하는 차로 바꾸면서 제 삶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한 주간의 일을 모두 마치고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이용합니다. 시간에 크게 구애받음 없이 완만한 속도로 경치를 완상하며 달리는 작은 습관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리고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이 시대 문명의 이기(利器), 유튜브가 제공하는 음악을 들으며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에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두 시간이 주는 작은 행복감이고 안식과 힐링의 시간입니다.
지난 몇 주간은 제가 아주 특별한 음악에 빠져 몰입하게 되었는데 바로 ‘싱어게인 3’이란 예능 프로에 출연한 무명가수들의 거의 반란에 가까운 음악세계입니다.
최근 16명으로 좁혀진 숨은 고수들의 음악을 들으며 거의 전율이 돋을 정도의 감동을 받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런 천재 가수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왜 이들은 이런 놀라운 실력을 겸비하고서도 여태껏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던 것일까?”
기존의 음악을 직접 편곡하여 만들어내는 그들의 독창적인 음악성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노래 속에는 그들이 재야에 숨어지내며 얼마나 많은 피와 땀들을 흘리며 갈고 닦아왔는지 진짜 고수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야엔 정말 고수가 많습니다.
지난 두 달간 손을 놓고 있었던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며 개인의 일신상의 새로운 변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남선교회 총회장직입니다. 새해 새로운 직임과 소명을 준비하면서 지난 주에는 전임자로 무려 6년이란 시간 동안 총회장직을 맡아오신 전임 총회장의 특별한 수고를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그동안의 공로에 감사하고 축하하는 글귀를 손수 작성하여 오래 간직하시라는 의미로 기념패를 제작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기념패에 담을 글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 원로장로께서 이 분을 칭찬하며 표현한 안성맞춤인 키워드 하나를 인용하게 되었는데 바로 ‘불멸의 족적’이란 말이었습니다. 오래 기억될 전무후무한 영적 고수의 흔적을 대변하는 ‘불멸의 족적’이란 말이 큰 감동으로 남아 이 말을 기념패에 담기로 결정합니다.
비록 사람이 칭찬한 말이긴 하지만 만일 이 말을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듣게 된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기념패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영적 소망이 생기는데 그것은 이 땅을 사는 동안 영적 고수로서의 흔적을 남기고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그분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태복음 25장 21절)
라는 성경의 말씀을 이루는 것일 것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의 삶에서 가장 큰 영적 고수의 흔적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적 고수의 흔적인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가 상장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일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십자가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다 버리고 가장 낮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세상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 상에서 피를 토하시기까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고수의 흔적,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2023년의 한 해를 마무리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는 올해 삶의 고수로서 이 땅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지나 온 삶을 돌아볼 때, 세상에 끼친 나의 선한 영향력의 흔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 달려가며 이 땅에 남길 영적 고수로서의 삶의 흔적은 또 무엇인가?
한 번쯤은 중간 점검하고 넘어갈 시간입니다.
언젠가 이 땅에서 주어진 소명 다 마치고 우리를 보내신 우리들의 주인 앞으로 돌아가는 날, 그분께 아뢸 우리들의 삶의 흔적, 인생의 영적 성적표는 과연 어떤 것일까?
갑자기 다가올 내일이, 또 새롭게 맞이할 2024년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2023년 계묘년(癸卯年) 세모(歲暮)의 시간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아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장 7절 ~ 8절
첫댓글 Adieu 2023!
2023년의 끝자락에서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분주하게 보냈지만 무엇을 남겼으며
또 무엇을 드리며 살았는지 그 흔적을 계수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영적 고수의 흔적은 십자가 사랑임을 깨닫고
나의 영적 흔적을 중간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