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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기원전 200년의 봄철이 되자 페르가몬과 로도스의 함대는 서부 에게해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Liv.31.14.11) 마케도니아측에 나포된 아테나이 전함 4척을 로도스인들이 구출한 사건(Polyb.16.26.9)은 아마 그 도중에 일어났을 것이다.
사로니코스 만 내의 섬 아이기나는 아이톨리아 전쟁 이래 페르가몬 왕국이 영유하고 있던 곳으로, 연합군 함대는 일단 여기에 전진기지를 차렸다.(cf> Liv.31.14.11,15.8) 마침 이 때쯤 M.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포함된 로마 사절단이 피라이우스에 도착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탈로스 왕은 이들과 회담하기 위해 서둘러 아티카 본토로 넘어갔다.(Polyb.16.25.1-2*) 그리고 로마인들은 아탈로스가 필시 듣고 싶었을 소식을 전해 주었다. 즉, "로마는 필리포스와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Polyb.16.25.4)
이제 아탈로스와 로마, 로도스 사절단은 아테나이로 이동했다. 아테나이 시민단은 열광적인 환호로 이 손님들을 맞이했고, 권유받은 결과였건 우군을 확보했다는 자신감 때문에서건 마침내 마케도니아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Polyb.16.25.5-26.9, Liv.31.14.10-15.7) 많은 경의와 영예를 헌사 받은 뒤, 아탈로스는 아이기나로 귀환하여 이번에는 아이톨리아 연방도 궐기시키기 위해 사자를 파견했다. 로도스 함대는 케오스로부터 퀴클라데스 제도로 나아가 안드로스, 파로스, 퀴트노스를 제외한 모든 섬을 제압했다.(Liv.31.15.8) 크레타 섬 내의 친 마케도니아 세력들도 아마 비슷한 시기에 로도스의 우위를 인정하는 형태의 종전을 받아들인 것 같다.(Syll.581)
한편 로마 사절단은 역시 그 즈음에 아티카에 군대를 이끌고 침입한 마케도니아 장군 "코끼리" 니카노르를 만나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전달했다.
①마케도니아는 어떤 그리스 국가와도 전쟁을 하지 말 것.
②페르가몬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것.(배상액 책정은 공정한 중재 심판에 맡길 것)
로마인들은 만약 필리포스가 이 조건을 따른다면 로마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대가 될 것"이라고 덧붙여 그것이 사실상의 최후통첩임을 밝혔다. 당연히 필리포스에게 이 중대한 사태를 알려야 했을 니카노르는 발길을 돌렸고, 로마 사절단도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한 여로에 올랐다.(Polyb.16.27)
이상 봄철 무렵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마케도니아에 있어 뚜렷한 군사적-외교적 악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늦가을 이래 닥쳐온 위기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펼쳐진 필리포스의 행동은, 그가 수세를 취하며 웅크리기보다 마치 키오스(Ch) 직후에 그랬던 것과 같이 공세에 더욱 집중하는 쪽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곧 장군 필로클레스가 지휘하는 보병 2,000명, 기병 200명의 부대가 또다시 아티카를 침공했다. 이것은 명백히 로마의 최후 통첩에 대한 필리포스의 답변이었다.(cf> Errington, CAH vol.8, p259) 그리고 왕 자신도 친히 군세를 이끌고서 트라키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지상군의 군세는 아티카 침공군과 비등한 2,000명의 경보병과 200명의 기병이었지만, 여기에 별도로 헤라클레이데스가 이끄는 함대가 있었으므로 전체 병력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Liv.31.16.1-3)
국왕 본대의 목표는 주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령이었다.(**) 마로네이아를 빠르게 점령한 후 마케도니아군은 아이노스를 포위 공격하여 역시 함락시켰다. 이와 함께 해안의 도리스코스와 세리온, 내륙의 큅셀라도 접수한 뒤, 필리포스는 케르소네소스로 진입하여 엘라이우스, 알로페콘네소스, 칼리폴리스, 마뒤토스 등 일대의 주요 도시들로부터 속속 항복을 받았다.(Liv.31.16.4-5)
대략 기원전 200년 늦봄에서 여름철까지 걸쳐 실행된 그 전역의 결과는 필리포스에게 있어 또 한번의 큰 승리였다. 비록 마케도니아 국왕의 친정군 앞에서 감히 변변한 저항을 하지도 못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의 해외 주둔군들을 휩쓴 것 같은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성과를 통해 필리포스는 적대 세력의 하 마케도니아 공략 기지가 될 수도 있는 위험 지역인 트라키아 남부를 일단 확보했고, 또 한편으로 헬레스폰토스 무역로에 대한 감시력도 강화할 수 있었다. 그것이 꼭 전체적인 전쟁의 맥락 속에서 이득이었는지 판단하기란 어렵지만, 어쨌거나 필리포스가 지배하는 왕국의 영토가 재차 확장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페르가몬과 로도스의 군대가 그 사이에 마케도니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흔적은 없다.(cf> Liv.31.15.10-11) 아마 페르가몬 함대는 여전히 아이기나에 머물러 있었고 로도스 함대도 아직 퀴클라데스-크레타에서 작전 중이었을 것이다. 초봄경까지만 해도 反 마케도니아 연합 세력의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 같은 승기는 어느새 신기루로 변하고, 이제 필리포스는 야심차게 다시 한번 아시아로 넘어갔다. 노리는 것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세스토스와 마주보는 도시, 아뷔도스였다.
아뷔도스를 공략하기로 한 왕의 저의가 트라키아 점령 상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데 있었는지, 혹은 폴리비오스의 분석처럼 장래의 새로운 진출을 대비하여 아시아 방면 교두보를 확보해 두려 했던 것인지(Polyb.16.29.2)는 알 수 없다.(※) 굳이 이유가 하나여야만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단, 만약 후자가 인정될 수 있다면 당시 필리포스는 함대 전력 복구 가능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뷔도스를 교두보로 삼는 아시아 진입 루트라면 아마도 대부분이 육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수륙에서 병력을 전개하고 다채로운 공성 장비를 동원하여 아뷔도스를 조여들어갔다. 폴리비오스에 의하면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사기는 일단 드높았고, 마케도니아군의 공성기를 다소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Polyb.16.30.1-4) 그러나 일개 도시의 힘만으로 마케도니아 국왕군의 공격을 오래 버텨내기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절실했겠지만 확인되는 지원 병력은 페르가몬으로부터 온 병사 300명과 로도스 4단선 1척, 퀴지코스에서 온 3단선 한 척이 전부이다.(Polyb.16.31.3, Liv.31.16.7※※) 비록 로도스 함대가 트로아드의 해안 도시 테네도스까지 왔고, 아이톨리아에 걸었던 기대가 또다시 배반당한 후 아탈로스 왕도 이 방면에 몸소 나타나기는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포위를 해제시키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Liv.31.16.6-8, Polyb.16.34.1) 어쩌면 마케도니아군이 해협에서 이미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연합 세력의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포위된 도시의 사정은 점차 악화되었고, 끝내 성벽이 무너지고 마케도니아군이 판 땅굴도 그 안쪽까지 뻗어왔다. 폴리비오스는 심상치 않은 반 마케도니아적 정서를 드러내는 묘사를 통해 아뷔도스의 최후 저항을 전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먼저 아뷔도스 시민들은 도시를 넘겨줄테니 주민과 외국 병사들은 떠날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고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이를 일축했고, 그러자 아뷔도스쪽에서는 더욱 극단적인 결의로 대응하고 나섰다. 우선 값나가는 재물은 모두 항구에 정박한 배와 광장으로, 여성들은 신전, 아이들은 체육관으로 보내졌고, 남자들은 죽을때까지 싸우기로 결정되었다. 도시가 끝내 함락된다면 미리 선발된 50명의 처리반이 신전과 체육관에 갇힌 사람들까지도 전부 죽이고 재물을 실은 배는 불태우며 광장의 보물은 저주의 말과 함께 바다에 내던질 것이다. 그리하여 침략자에게는 사람도, 금전도 전부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시가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Polyb.16.30.6-31.8)
죽음을 각오한 아뷔도스 사람들의 최후 저항은 필리포스 5세의 의지를 (잠시나마) 꺾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넘어 파상적으로 공세를 가해오는 마케도니아군을 해가 떨어질때까지 막는 과정에서 저항군의 대부분이 전사했다. 마침내 몇몇 원로가 자살적 저항을 포기하고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살리자는 결정을 내려, 마케도니아 진영에 항복 의사를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형태로 살아남는 것은 죽은 동료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긴 나머지 가족을 해친 뒤 스스로도 목숨을 끊고 말았다고 한다.(Polyb.16.33, 34.8-12)
이런 이야기 가운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기란 불가능하다.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점은, 필리포스는 아뷔도스 포위 전역의 마무리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는 맞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아뷔도스가 거의 떨어져 그 해의 트라키아-헬레스폰토스 원정이 준수한 성공으로 마무리 되려 하고 있던 바로 그 즈음, 이제껏 왕 자신이 마케도니아에 비해 약소한 나라나 부족들에게 자주 그러했던 것 처럼, 그에게도 남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불쾌한 운명이 들이밀어졌기 때문이다.
로도스를 거쳐온 M.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결국 필리포스의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Polyb.16.34.1-3. Liv.31.18.1)
*폴리비오스는 그보다 며칠 앞서, 아테나이에서 이미 아탈로스에게 초청을 띄웠던 일을 언급했다. 따라서 폴리비오스의 글 속에서 아탈로스는 아테나이의 공식 초청에 바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가, 로마인들이 피라이우스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움직였던 것이다. 당시 아테나이가 지녔던 가치에 대한 시니컬한 뉘앙스가 행간에서 드러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제국령 트라키아에 관한 언급은 Polyb.5.34.7-8. 리비우스의 서술 순서에 관한 논의는 Briscoe, p101.
※아뷔도스에 대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은 언급 Polyb.16.29.1에서, 폴리비오스는 필리포스가 "이쪽방면의 접근로와 물자를 로마인들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헬레스폰토스의 제압이 곡물 수송로를 차단하려는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높은 것이다. Walbank P, p133. Errington, CAH vol8, p259. 아뷔도스는 당시 독립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퀴지코스가 언제 反 마케도니아 전선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다. Liv.31.16에는 이 3단선의 정보가 나오지 않지만, 이는 필시 단순한 누락이다.
§Starr는 로도스와 페르가몬 사이에 상호 불신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즉, 페르가몬측은 로도스 공화국의 퀴클라데스 석권에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반대로 로도스에서는 아뷔도스가 구원될 경우 그 도시가 페르가몬 세력하에 들어가게 될 것을 우려했으리라는 것이다. p67-68. Thiel(1946) 은 이 설명을 채택하였고(p226) Walbank도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ii, p538) 그러나 Briscoe는 연합쪽이 단순히 병력이 부족했던 것일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p100.
J. H. Thiel, "Studies on the history of Roman sea-power in republican times" (1946).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마지막부분을 읽으니 남중국해에서 깽판치는 중국함대 앞에 미국함대가 나타나는 듯한 장면이 그려지네요.
감사합니다.
저 시기 마케도니아는 사방의 어그로를 너무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