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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혼란(混亂), 삶의 의미
( 一 )
'단 한번의 가름만 피하면...'
독비독심 당철목은 경솔히 추적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십칠 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는 독사우공 혼자
였지만 지금은 절정고수 다섯 명.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달려
올 때까지 결전을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한 번의 부딪침은 피
할 수 없을 테고 그 일격만 피해 내면...
"시간이 없습니다. 한번의 공격으로 끝을 봐야 합니다."
마른 장작개비가 나직이 말을 흘렸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
기 무섭게 사 인이 일제히 품에서 독특한 독물을 끄집어 냈다.
비홍사, 풍사, 우모침(牛毛針) 한움큼, 그리고 입으로 부는 죽
통(竹筒).
유독 독물을 끄집어 내지 않은 사람은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젊은 여자였다. 흑갈색의 피부에 만지면 튕길 듯 탄탄한
몸매, 하지만 눈동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맥없이 풀려 허공중에
걸렸다.
'제 정신이 아니군...'
당철목은 삶의 출로를 찾은 기분이었다. 과연...무산파파의 한
손은 젊은 계집의 손을 꼭 잡고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당철목은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깡마른 사내를 향해 물었
다. 내심에서 피어오르는 격렬한 긴장을 억누르고, 싸울 기색
이 없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분초불차(分秒不差)."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사내는 물음에 대한 응답 대신 진한
일성을 토해 냈다. 당문 형옥실 고수들 모습...눈에 비쳐 든
까닭이다.
쉬릭! 푸아악...! 사르륵...!
서로의 틈을 보완하면서 전후 좌우 상하를 철통같이 봉쇄한 공
격이 전개됐다.
당철목도 꾸물거리지 않았다. 지체할 여유도 없었다. 그가 당
문 십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독기를 무려 다섯 개나 한꺼번
에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 소매가 확 들쳐지며 조독기 다섯
개가 일제히 시커먼 독연을 뿜어 냈다.
휘릭!
독사우공이 물러섰다. 비홍사가 생물인 이상, 아무리 절독을
지녔다 해도 시조(구더기)에서 채취한 후란독(朽蘭毒)을 맞받
지는 못할것이다.
깡마른 몸에 키만 멀뚱하게 큰 놈은 입으로 죽통을 물어 강침
을 발사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검지손가락만하게 긴 강침은 오
리털까지 꽂혀 있었다.
미독환사는 흑풍사를 던짐과 동시에 물러섰고, 무산파파는 우
모침 오십여 개를 한꺼번에 날렸다.
가히 숨돌릴 틈 없는 공격이었다. 그 중 가장 빨리 다가온 것
은 강침 한개.
당철목은 넓은 소매를 떨쳐 허공을 휘저었다.
파라락...! 까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은잠사(銀蠶絲)로 만든 소매는 부드럽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철판처럼 딱딱해 암기 공세를 막기에는 최적이었다. 제삼실 암
기실에서 만든 공격용 무기의 정화가 당문 칠병이라면, 수비용
방패의 정화는 한 가닥 실이었다.
치지직...!
흑풍사와 후란독이 어울리며 기음을 토해 냈다.
두 개의 독은 서로 상극. 어울리면서 중화되는 연기가 백무로
화해 흩어졌다.
'무산파파의 공격만 피하면...'
당철목은 탄자선풍(灘子旋風) 초식을 펼쳤다. 제자리에 주저앉
는가 싶었는데 팽이처럼 빙그르 돌면서 소매를 휘저어 우박처
럼 쏟아지는 우모침을 밀어 올렸다.
그러나 한가지, 당철목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제갈문이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했다는 사실...
물러섰던 독사우공이 다시 질풍처럼 달려들었고 당철목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우모침을 밀어 올리는 데 급급했을 뿐만아니라
소매 속에 든 조독기는 비어 있는 상태, 수하들이 지척에 다가
왔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고, 더욱이 무척이나 얄미운 깡
마른 놈은 죽통을 다시 입에 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파파팟...! 쉬익...!
지척에서 조독기를 발사하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리며 한 인영
이 뛰쳐 나왔다. 그가 조독기를 다루는 솜씨는 당철목에 뒤지
지 않을 정도로 고명했다. 한 여자도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사천 당문의 정통 검공인 환격검법(還擊劍法)을 시전했다. 손
에 검이 달라붙은 것처럼 세기(勢氣)가 두드러졌다.
"네놈들이..."
"당철휘...한연지..."
각기 다른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같이 엉켜 있던 여섯
명은 일제히 뒤로 물러서야 했다. 자신들을 향해 발사되는 독
기가 의외로 심상치 않았기에 이 두명의 등장은 한쪽에게는 절
망을 한사람에게는 구사일생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휘익! 휘이익...!
당철목의 수하들도 당도했다. 이십여 명은 오인을 둘러싸고 서
릿발같은 기세를 뿜어 내며 조독기를 겨누었다.
사르르...!
여러 종류의 독기가 스친 자리는 황폐했다. 아침 이슬을 머금
은 풀잎은 누렇게 탈색되었고. 그나마 당철휘가 조독기로 발사
한 자포독은 남은 잔재를 한줌 흙으로 돌려 놓았다.
"장문, 독사 새끼는 상처를 입어도 독을 품어 내죠. 이제는 이
단계 계획만이 남았습니다."
제갈문은 이런 상황을 예측 한 듯 변함없이 차분했다.
무산파파는 몸을 가늘게 떨면서 이유 모를 침음성을 뱉어 냈
다.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심의 격동
이 상당히 큰듯했다.
제갈문에게 당철휘를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당부받았건만 쉽게
죽일 수 없었다. 단칼에 목을 베기에는 일생이 무너져 버린 손
녀의 원한이 너무나 원통했다. 그래 목을 피해 배를 베었는
데...전서에는 분명히 진시, 불암 후면으로 적혀 있었는데...
여우 같은 연놈들...
이때였다. 싸움이 시작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이 멍청이 서
있던 갈홍아의 눈빛이 독광으로 이글거렸다. 그녀는 뚫어지게
당철휘를 쳐다보더니 한걸음 앞으로 나서다 말고 멈칫거렸다.
무산파파가 옷소매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제지 당했지만 당철휘를 쳐다보는 독기 어린 눈
길만은 돌리지 않았다.
"후후후! 네 명도 어지간히 길구나. 자포독에 당하고도 죽지
않다니...대단해."
당철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전혀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
로 유들유들하게 먼저 말을 꺼냈다.
"한마디만 해줘. 나를 죽이려 한 것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명랑하고 청순하던 갈홍아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 속에는 퇴폐
적이랄까?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어감이 섞여 있었다.
"본의라...그래. 본의가 아니었어."
"정말이야?"
일순간 갈홍아의 눈빛에는 희망처럼 보이는 밝은 빛이 떠올랐
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져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본의가 아니었지. 네 스스로 죽어 줬다면 굳이 내가 손 쓸 필
요는 없었으니까. 아니, 그까짓 몸뚱이 적선 한번 했다고 생각
하면 그만인걸 가지고...네가 나에게 달라붙지만 않았어도 죽
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당철휘는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중 마
음에 걸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연지는 이미 자신을 용서
했고, 당철목은 비록 존장이지만 아버지와 뗄 수 없는 관계...
자신이 이보다 더한 악행을 저질렀어도 편을 들어 줄 사람이었
다.
"당철휘...개새끼..."
갈홍아의 입에서 극히 저미한, 하지만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한 기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신형은 쾌속하게
쏘아졌다.
부욱!
무산파파가 잡고 있던 옷소매가 찢어지며 호수 없는 보검이 허
공을 갈랐다. 순간,
퍼억!
둔탁한 음향이 터지며 갈홍아의 신형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
렸다. 그녀를 안아든 사람은 제갈문,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제
갈문이 일지를 날려 혼혈을 점한 것이다.
"낄낄낄! 오늘은 이놈들이 고기 맛을 실컷 보겠군."
독사우공은 한손에 두 마리씩 비홍사 네 마리를 거머쥐었다.
그가 지닌 비흥사 모두를 꺼내 든 것이다. 생사절명의 상태가
아니면 있을수 없는 행동이었다.
손녀나 다름없는 갈홍아와 당철휘 간에 오가는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금, 피가 곤두서는 분노에 치가 떨렸다. 자신이 피를
토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당철휘, 저놈만은 모가지를 떼어 낼
생각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또 제갈문이었다.
"정 장로, 나를 믿는다면 지금은..."
"개소리 말고 비켜!"
"정 장로, 정히 그렇다면 그 비홍사로 나를 죽이고 달려나가시
오."
"으음...!"
가늘게 신음을 내뱉은 독사우공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동안 제갈문의 지략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보아 왔고 그가
머리를 짜내 준다면 앞으로 분명히 기회가 생길 터였다.
독사우공이 물러섰음을 확인한 제갈문은 미독환사 전유를 쳐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충돌없이 빠져 나가는 것이 급
선무였다. 서로 부딪친다면 승패를 가늠할 수 없고 그런 싸움
은 제갈문이 가장 싫어하는 싸움이었다.
"제갈문, 아니 제갈 선생. 당신을 십 년만 일찍 만났어도 무산
파가 이 모양 이 꼴은 안됐을 텐데."
미독환사 전유는 말을 마치고 담담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오리
알만한 둥근 단환을 꺼내 들었다.
"흡혈단(吸血丹)."
"흡혈단을...죽기로 작정했군."
흡혈단은 수용성(水溶性) 독단이었다. 무산에만 존재하는 신
홍석에서 불순물을 분리해 내고 신(비소)과 홍(수은)만을 추출
하여 만든 광독(鑛毒). 물에 닿는 즉시 검은 운무가 피어오르
며 방원 십 장을 죽음의 도가니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무산파는 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물을 사용할 필
요가 없었다. 순식간에 방원 십 장을 뒤덮는 독그물에서 벗어
날 신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살 수 없는데 물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자신의 심장에서 품어 내는 핏방울이면 충분한
것을...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흡혈단이었다.
"당철목, 이쯤에서 서로 물러서는 게 어떨까? 정 장로가 길을
뚫고 전 장로가 흡혈단을 녹인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
지, 하지만 우리는 무산이괴가 사라질 뿐이야. 손해보는 장사
는 아니잖나?"
제갈문이 여유있게 웃으며 물었다.
틀어진 일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는 어떻게 하면 무사
히 황학산 한수곡을 벗어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모았다. 공격
은 손속에 사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철수에서는 그
런 일이 없을 것이고, 안전하게 물러설 자신이 있었다. 그런
데...
"호호호! 당신이군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무산파에는
돌머리들뿐인데...당신은 누구죠?"
옥구슬이 굴러가듯 영롱한 목소리였다.
"한연지 제법이군. 진시까지는 꼼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서구가 오히려 함정이었어. 당철목은 미끼에 불과했구. 존장
을 미끼로 쓰다니 대단한 뱃심이야."
제갈문은 마음속으로 진정 감탄했다. 전서구를 잡아서 혈서를
읽어 봤으니...거기에 복선이 깔려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무산파가 멸문 직전일지라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흡혈단 때문이었지. 여기서는 서로 으르렁대 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될것 같은데?"
순간 한연지는 뇌살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한사람을 불렀다.
"당 대가!"
당철휘는 사전 묵계가 있었던 듯 조독기를 꺼내 오 인을 겨냥
했다.
"잘 들으세요. 딩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저 조독기 안에는
풍멸환이 들어 있어요. 만우당의 풍멸환! 독사우공이 길을 뚫
는다고 했나요? 그렇게 할 수는 없죠. 우리 같이 죽어요. 호호
호! 여러분은 여기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해요. 어차피 사심
독에 중독된 몸인데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자, 흡혈단을 녹여
보세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됐다.
"같이 죽든가 아니면 사심독의 해약을 주세요. 그리고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해 볼까요. 지혜로 겨루든, 독으로 겨루든..."
하얀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번져 나갔다.
"풍멸환을 조독기로 발사한다면 한사람도 빠져 나가지 못한
다."
제갈문은 당황했다. 흡혈단이면 절대적 우위를 점할줄 알았는
데 난데없이 풍멸환이라니, 이렇게 되면 정말 같이 죽든가 무
릎을 꺾어야한다. 그의 눈이 무산파파를 행했다. 그리고 무산
파파와 갈홍아의 눈가에 어리는 귀기(鬼氣)를 보면서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절망이다. 장문은 물러서지 않는다.'
예감은 정확했다. 물러설 곳이 없자 무산파파는 오히려 편안한
듯 했다.
"전 장로, 흡혈단을 녹여라."
기어이 동귀어진(同歸於盡)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당철휘가 가지고 있는 풍멸환은 미완성이다. 고통은 있을지언
정 죽지는 않는다."
어디서 들려 오는지 가늠잡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단비하!"
한연지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면서 귓청이 떠나갈듯 빽 소리
를 질렀다.
"단소제! 그 말이 정말인가?"
제갈문은 지옥 문턱에서 부처를 만난 기분이었다.
단비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풀숲 어딘가에 숨어
서 모든 사람들을 보고 있으리라. 지금 그가 내뱉는 음성은 평
소의 어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탁한 듯 하면서도 분
노가 깃들인 그런 음색이었다.
"잠복기는 일 각, 고통 지속시간은 일 다경."
말이 끝나기도 전, 당철목의 신형이 번개처럼 뛰어 올랐다.
어디 숨어 있는지 파악한 듯 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한시도 눈
을 떼지 않고 있던 독사우공 정태구도 신형을 날리며 비홍사
한 마리를 던졌다.
"허억!"
당철목은 짧은 헛바람을 토해 내며 휘릭, 몸을 뒤틀어 제자리
로 물러섰다. 그 사이에도 허공에는 검은 운무가 활짝 피어올
랐다. 그리고 흑무는 비홍사가 물러설 틈을 주지 않고 동체를
휘감았다.
끼르륵...!
길이가 일 척 정도인 비홍사는 기음을 토해 내며 똬리를 틀었
다. 축축한 습기가 묻어 나올 듯한 거죽은 검붉은 반점이 형성
되었다. 부시독 최강이라는 후란독에 중독된 것이다. 잠시 꿈
틀거리던 비홍사는 갈라진 혓바닥을 드러내고 동체를 축 늘어
뜨렸다.
그순간 단비하의 음성은 뚝 끊겼다. 찰나의 틈을 이용해 자리
를 이동한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말은 커다란 바위 뒤에서 들
려 왔다.
"내공을 운기하여 독기를 상양혈(上陽穴)로 밀어 내면 참을 만
한 고통..."
말소리는 다시 중도에서 끊겼다. 바위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일 게다. 사실 이때 정풍화검 당상명이 살그머니
신형을 움직여 바위 결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치잇! 여우 같은 놈."
당상명이 맥빠진 소리를 흘려 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동하는
기척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소리없는 이동 그리고 간간
이 흘러나오는 음성.
"후후ㅎ! 한연지, 흡혈단을 녹여 보라고 했나? 심계가 무척 깊
군. 지금도 그 말이 유효한가?"
자신을 얻은 제갈문은 여유만만했다.
"호호호! 이상하군요. 분명 이 자리에는 저보다 존장이 계신데
왜 저에게 묻죠?"
철면피 한연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모든 전권을 당
철목에게 전가했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얄밉기조차했다.
"그렇군. 어린애가 말장난한 걸 가지고...당철목, 우리는 돌아
가겠네."
제갈문은 급히 무산파파에게 신형을 옮겼다. 눈에 독기를 풀풀
날리며 당철휘의 용모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무산파파가
무슨 사단을 벌일지 몰랐다.
"제갈선생, 자신있나?"
무산파파의 입에서 가슴을 저미는 비감 어린 음성이 터져 나왔
다. 겨울 찬바람처럼 매서운 기운만 제거한다면 듣기 좋은 청
음(淸音). 제갈문은 말의 뜻을 파악하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
다.
"청산(靑山)에 녹수(綠水)가 있는 한 땔감은 걱정없지요."
"돌아가자!"
마지막 말을 맺는 순간까지도 당철휘를 쳐다보는 눈길에는 독
기가 풀풀날렸다.
'저, 저 계집을...'
당철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갈홍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한시도 마음놓고 편한 잠을 이룰 수 없으리라. 지금
죽이고 싶은데 엄지손가락에 약간만 힘을 가하면 조독기가 발
사될 텐데. 하지만 곧 마음을 정리했다. 얄미운 놈, 제갈문이
말하지 않았던가? 청산에 녹수가 있는 한...
갈홍아는 얌전히 뒤를 따랐다. 신지가 잘못된 듯 걷는 걸음걸
이도 경쾌하지 못했다.
독사우공은 비홍사 세 마리를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질쳤다.
맨 마지막으로 미독환사가 왼손에 흡혈단을, 오른손에는 하얗
다 못해 푸른빛이 일렁이는 유엽도(柳葉刀)를 들고서 물러섰
다.
쉬익!
당철휘의 신형이 번뜩였다.
물러서는 무산파 사람들을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그렇지만 단
비하는 외톨이, 그만은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흥! 심성이 독하기는 하되 머리가 없다. 모든 면에서 당영지
를 쫓아갈 수 없어. 아! 그만 살아있다면...'
소나기가 퍼붓고 난 다음의 하늘은 너무 쾌청했다. 푸른 물감
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 야망과 지성과
힘을 고루 갖춘 한 인물이 조각됐다. 한연지는 곧 머리를 세차
게 흔들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아닌가.
'단비하는 지금쯤 죽으라고 줄행랑을 놓고 있겠지.'
풀숲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당철휘의 몰골이 우습게 비쳐 들
었다.
이때 단비하는 이십 장 밖에서 전력을 다해 곡구로 달음질치고
있었다.
* * *
"무산파에 당했다고?"
당기룡은 인공 연못에 활짝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면서 나직
이 반문했다.
"하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만정이 뚝 떨어질 것 같은 냉막한 음성이 뒤를 받쳤다. 사마
전이었다.
"혈반사접은 어느 정도인가?"
"무서운 자생력(自生力)을 지녔습니다. 벌써 유충에서 변태한
독접이 산란을 시작했습니다. 버마제비처럼 수컷이 희생되지
요. 희한한 것은 알을 깐 암컷도 죽는다는 겁니다."
은근히 무게가 실린 음성이었다. 독제실장 무독천살 당운담.
그러고 보니 당기룡의 등뒤에는 당철목을 제외한 당문구절이
쭈욱 늘어서 있었다.
"혈반사접을 길들일 방법은 찾았소."
"그것이 아직..."
당운담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중원에 널려 있는 동식물은 나름대로 독창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 습성을 파악하는 것이 그것들을 수족처럼 길들이는
첫 번째 단계.
그런데 혈반사접은 사람처럼 천태만상이었다. 어느 한 마리,
똑같은 습성을 가진 놈이 없었다.
"허허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그놈의 독은 나도 치가 떨릴
만큼 맹독이었으니까 쉽지는 않을 게요. 하지만 당문의 존폐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항시 염두에 두기 바라오."
'최종 통보...기한이 별로 없다.'
육신에 개미 떼가 달라 붙은 것 같이 간질거렸다. 문주는 늘
이런 식으로 말하지만 그 다음 조처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
다. 자칫하면 독제실장으로 쌓아 온 모든 공적이 한 순간에 모
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혈반사접은 사대독문이 만들지 않았소. 그들은 제 살기도 급
급했으니까."
"문주, 그럼 왜 그들을 치셨습니까?"
암기실장 당두감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허리를 잘랐다.
"두 가지 목적이 있소. 하나는 혈반사접을 만든 무리들에게 당
문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은거한 독문들을 찾
는 동안 그들은 방심하겠지. 또 하나는 비록 은거한 가문들이
지만 그들이 만든 독은 우리에 필적할 만한 것이오. 제조 기법
을 알면 당문의 힘이 그만큼 강해진다는 이야기가 되지."
모두들 입이 얼어붙었다. 문주는 당철휘 일행을 파견하는 순간
부터 헛걸음이 되리란 것을 예상했다. 그 외 자잘한 안배까지
도 어김없이 맞아들었다. 문주는 신인가! 문주의 지략은 어디
까지 닿아 있는가.
"사충전은 존재하지 않소. 그들은 이미 하류 잡배로 전락하고
말았소. 그런데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산파의 흡혈단을 얻
기 위해서였는데...혈반사접을 추적하는 일은 중위대에게 넘기
겠소. 당동한(唐銅翰)을 보내시오.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
고"
"문주 죄송하지만...당동한, 당철휘, 당자인은 차기 문주감입
니다. 그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몬다는 것은..."
중위대주 오독일지 당풍준이었다. 그는 내심 당문에 남아있는
자신의 아들이 가장 아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들놈마저 내몰리다니.
'당자인이나 당철휘는 밀명을 받지 않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
성해줬소. 허허허! 중위대주 내 분명히 말해 주겠소. 당동한에
게 내린 명령만은 복선이 없소. 혈반사접을 만든 무리들...그
들은 꼭 찾아야 하오."
당기룡은 연꽃잎이 무성한 연못으로 눈을 돌렸다. 사이사이에
어른 팔뚝만한 잉어가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경험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들 셋이 맡은 임무는 경중을 저울
로 달수 없는 막대한 임무들이오."
당기룡은 손에 든 깻묵을 연못에 풀었다. 금방 잉어들이 모여
들어 누렇고 빨간색의 조화를 만들어 냈다.
"사마전! 전서를 보내라. 무산파를 놓친 이상 암계는 필요없
다. 형옥실장은 철수한다. 당철휘와 한연지는 단비하를 죽인
다."
"존명."
대답을 한 사마전은 급히 신형을 날렸다. 황학산에 대기하고
있는 당철목 일행에게 전서를 날리기 위해서.
"당자인의 상황은 어떻소?"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한 물음이었다.
"최악입니다. 추종하는 무리들이 백여 명은 되는 것 같은데...
무척 궁핍한 모양입니다."
"궁핍하다...허허허! 고생이 많구먼. 물론 당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겠지?"
"어느 문파 보다도..."
후위대주 당잠청은 죄송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말굽은 백 냥을 보내 주시오. 한동안 넉넉한 살림이 되겠지.
당철휘와 손을 잡을수 있게끔 통로를 열어 주시오. 단비하를
죽이라는 명령이 촉매제가 될 거야."
"문주, 단비하 정도로 어찌 그렇게까지 바라십니까?"
독제실장 당운담은 완연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혈반사접을 만든 무리를 찾는 것은 당문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
한 문제였다. 그런 막중한 임무가 중위대주의 아들인 당동한에
게 넘어간 것도 언잖은데 겨우 무지렁이 같은 놈 하나를 죽이
라니, 어떻게 그것과 이것이 같은 비중을 점유할 수 있단 말인
가.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단비하를 제거하고 난
다음 다른 명령이 내려질 줄 알았기에 사실 단비하 한 놈을 죽
이는 데 무슨 놈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저 손짓 한번이면 족한
것을...
그런데 지금은 뭔가? 문주의 말은 쉽게 단비하를 제거할 수 없
다는 의미가 아닌가? 후기지수 중독에 관한 한 제일의 실력을
가졌다는 당철휘를 그 정도밖에 보지 않았던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상했소? 허허허! 독제실장,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게
자식이오. 하지만 자식을 영웅으로 만들려면 장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오. 내 전에 말한 적 있소. 생존력만큼은
단비하를 따를자가 없다고...만약 당자인과 연계하지 않고 단
비하를 죽일 수 있다면 차기 문주로 당철휘를 지목하겠소."
"문주, 그 말씀은..."
"기분대로 말씀하시면..."
여기저기서 반대 의견이 속출했다. 그만큼 그들은 단비하를 무
시하고 있었다. 무시 정도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만큼
도 여기지 않았다. 단비하뿐만이 아니라 당문 시험독인들에 대
한 일반적인 견해였다.
"조용히!"
조용한 일갈이 터져 나오자 당문 구절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들이 이제껏 보아 온 문주는 온화하다기 보다는 잔인한 사람
이었다. 다만 다른 잔인한 자들과 틀린 점이 있다면 일단 중인
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것.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맺을 때는
그 누구도 항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
다.
"당철휘에게 눈과 귀를 주겠소. 만채실장, 당문과 거래를 하고
있는 약초상의 수는 얼마 정도요?"
"중원 전역에서 오가고 있으니...도매상(都賣商)만 칠십여 명
입니다."
"그들과 관련있는 의원이나 약초상은?"
"수를 헤아릴 수 없지요."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시오. 단비하의 인상 착의를 그려서
보내주고 발견하는 즉시 연락을 주도록...당철휘가 찾아가면
최선의 배려도 부탁하고..."
"문주. 그렇게 하면 설혹 하늘로 도망가더라도..."
"아니오."
당기룡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런 조력을 얻어도 단비하를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오. 그
래서 당자인과 연계하라는 것이오. 당자인은 어려서 단비하에
게 패배를 당한 적이 있지. 그 후, 단비하를 쳐다보는 눈매가
날카로웠소. 당문에서 단비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단연 그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중인들은 이제야 문주가 단비하를 중시하는 연유를 알고 얼굴
에 짙은 그늘을 떠올렸다.
- 단비하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무공은 물론 독공도 익힌 것
같습니다. 수준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평범하지는 않았습
니다...
무려 십이 년 동안이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속여 온 인간.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고는 하지만 그속에서 이를 간 날이 어
디 하루이틀이겠는가. 만약 중원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조롱할 것인가.
'세상에 그런 놈이 있다니...'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먼저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에서 허허
웃었고 다음은 이런 놈은 후환 덩어리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
다. 마지막으로 당철휘와 한연지는 물론 형옥실장까지 있었는
데도 유유히 탈출했다면 필히 제거해야 될 놈으로 부각되었다.
문주는 더욱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눈앞에 실실거리며 알짱
거리던 인물, 그놈이 바보가 아니었다니 그런 놈을 몰라보고
중원으로 보냈다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아니고 무
엇인가.
그런 놈이라면 문주 말대로 쉽게 처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중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문주, 차라리 저희 대원들을 보내심이..."
전위대주의 말에 당기룡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럼 놈 하나 처리하는데 전위대까지 나선다면 볼썽 사납지
않겠소. 가볍게 처리합시다. 설마하니 부대주 세 명이 한놈을
요리하지 못하겠소? 당철휘의 독심, 한연지의 지략, 당자인의
통찰력이 합해진다면 단비하 정도는..."
당기룡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유히 연못에 노니는 아름다운 색
깔의 잉어들을 한동안 응시했다.
"당자인이 해야 할 일은 시급한 일이오, 단비하에게 손을 뺏기
면 안되지.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단비하를 죽여야 하오. 그
런 다음...후위대주, 내 말뜻 알겠소?"
후위대주 당잠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와 문주사
이에는 모종의 밀약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혈반사접을 찾는 일에 버금갈 것임은 분명했다.
"그들은...당문이 구파일방의 반열에 올라서는 밑거름이 될 것
이오. 영원히 당문사(唐門史)에 기록될 인물들이..."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온갖 힘을 다해 키워 온 당문. 이제 매미가 허물을 벗고 날개
를 펼치듯이 성충으로 태어나려 한다. 그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개개인의 성격을 완벽히 파악
했기에, 그만한 능력들이 구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소림처럼, 무당처럼...무너지지 않는 사천 당문을 만들리
라!'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깻묵을 다 먹은 잉어들은 다시 유유히
흩어졌다.
* * *
단비하는 편안하게 누워 야공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까마득히 보이는 별들은 맑은 광휘를 뿌려 냈다. 영원히 손에
닿지 않을 거리에서 묵묵히 마음을 비춰 주었다.
복수라는 말이 되새김 되었다. 억눌려 온 지난 세월동안 한번
도 떠올리지 않은 말이지만 전혀 거부감 없이 다가와 활활 타
올랐다.
사천 당문의 모든 구조가 떠오르고 당문 십절의 장단점이 분석
되었다. 어떠한 인간이라도 약점은 있지 않은가. 그 동안 모멸
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참아온 모든 것이 힘이 되었다.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이다. 그럴 힘도
없지만 그렇게 간단히 죽일 수 없다. 천천히 고통을 느끼게 하
면서 죽여야한다. 받은 고통만큼, 아픈 만큼 돌려 줘야 한다.
'불쌍한 노인...'
손에 못이 박이도록 쇠망치만 휘둘러 온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어떻게 죽었을까? 왜 아버지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았을까?
당문에 부는 회오리를 알고 있었는데 당문 십절의 얼굴에 드리
운 검은 그림자를 읽었었는데...
아버지는 그 일과 상관없다. 엄가나 부가 중 일가에서 주도했
으리라. 어림없는 일...그 정도로 당문을 전복할 수 있다면,
아니 전복까지는 바라지 않고 독립만 바란다해도 어림없다. 백
년 전 칠가를 칠때의 당문이 아니다. 그들은 급격히 성장했고
지금은 구파일방의 반열에 올라서려 발버둥치고 있다.
'구파일방! 그래. 구파일방이야!'
수많은 별들 중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별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별은 희망이라는 빛을 뿜어 냈다.
'구파일방의 무공을 얻는다면...'
천하무적일 것 같은 당문도 구파일방에는 한 수 접어 주는 처
지다. 왜일까? 그들의 독술로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있기 때
문 아닐까? 그힘이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단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당문을 너무 높게만 생각했다. 하늘이 있음에도 보
지 못했다.
'구파일방의 힘을 얻어야 하는데...'
생각은 좋았지만 방법이 없다. 문하제자로 들어가는 일도 까다
롭지만 어느 세월에 고절한 무학을 익힌단 말인가. 설혹 무학
을 익히더라도 혼자 힘으로 당문을 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수란 요원하기만 했다.
'일단 부딪쳐 보자. 그러다보면 길이 보이겠지.'
단비하는 계류에 몸을 담갔다.
어제 내린 비로 물이 불어 몸을 담그기에 적당했다.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 냈다. 새로 태어난다 생각하고 마음속
의 절은 때도 씻어 냈다. 오랜 시간 동안 정성껏 닦았다. 그리
고 옷을 깨끗이 빨아 널었다.
휘이잉...!
후텁지근한 열기를 몰아내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새로 태어나는 거야. 새로...'
아버지가 죽은 슬픔도 억눌렀다. 복수에 대한 갈망도 묻었다.
그 대신 깊고 서늘한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 * *
경산현(京山縣).
호북성 최중심으로 드넓은 평야로 둘러싸인 현이다. 지형적인
요건으로 인해 문물의 교역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장소무(張素懋)는 낮 동안 늘어지게 잠자고 해질녘에야 일어났
다. 그가 하는 일의 특성상 낮과 밤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여느날처럼 저녁을 아침삼아 먹었다. 요즘들어 몸이 전
같지 않게 묵직하지만 처자식은 그런 점에는 관심도 없이 재잘
거리면서 찧고 까불었다.
그는 묵묵히 밥한 공기를 후딱 먹어 치웠다.
이런 조그만 평화에 자족하며 살아 온 인생, 새삼스럽게 짜증
이나 염증이 날 리가 없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마재(馬載), 그
인간 때문임은 두말할 여지도 없었다.
마재의 아버지 마전(馬田)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 마전은 장소무를 친동생같이 아꼈고 모든 지원을 아낌
없이 베풀었다. 그런 점을 늘 고맙게 생각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마재가 태어났을 때는 천하에 귀하다는 장백산(長白山) 대호피
(大虎皮)를 선물로 가져 가기도 했다. 그 대호피는 아직도 마
재가 깔고 앉아 있다. 마재가 철이 들면서부터는 철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귀한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는 언제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주는 만큼 확실히 돌아왔고 이익을 따지자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모든 사정은 마전이 급사하면서부터 바뀌었다.
마재는 지난 인간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다.
철저한 상인이랄까? 인정보다는 이익을 앞세웠고, 당연히 그의
주위에는 은자로 세상을 평가하는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장소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자를 벌어 들이려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했다.
전구자(轉口子:중계업자), 경산현 모든 사람이 전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술에 능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재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 방법은 확실한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 뿐이었
다.
"약초(藥草) 전구(轉口)를 맡아야 하는데..."
가볍게 흘린 말을 들었는지 내자(內子)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주류(酒類) 전구(轉口)를 맡자 마재의 원유회(園
遊會)를 찾아가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느 날부터인가 내자가 그를 쳐다보는 눈길은 소가 닭 보
는 듯했다.
"다녀오리다."
"흥! 다녀오든지 말든지..."
'이걸 그냥...'
울화가 치밀고 손이 올라가는걸 꾹 눌러 참으며 몸을 일으켰
다. 약초 전구를 할 때는 누구 못지않게 잘 살았지만 주류 전
구는 이익의 대부분을 원유회에서 관리했다. 말이 전구자이지,
포차자(심부름꾼)나 다름없는 일을 하는 마당에서 풍족한 살림
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자의 돌변한 태도도 따지고 보면 다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
아닌가 약초 전구만 맡게 되면...
후텁지근한 열기는 넓이 백 장에 이르는 원유회에도 마찬가지
였다. 온갖 산물이 그득한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약초 더미였다. 내일 새벽, 약재상들에게 전구
되고 점심 무렵이면 각 의원(醫院)에 배달되리라.
눈에 익은 전구자들이 약초를 점검하고 있었다.
약초를 모르는 의원은 없다. 때문에 건조 상태나 품질을 정확
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받을수 있는 최고의 값을 받아내야
한다. 자신처럼 인정에 끌려 적당한 값으로 넘기면 주류 전구
나 하는 팔자로 전락 될 것이다.
"잘 있었나?"
장소무는 이욱(李旭)에게 다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응? 응..."
이욱은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일에 열중했다.
"요즘은 어떤 약재가 잘 나가나? 응, 이건 황기(黃耆) 아냐?
역시 한 여름에는 황기가 최고지. 일곤(一困)에 족히 은 닷
냥은 받겠는걸."
"...!"
이욱은 상대할 틈이 없는 듯이 부지런히 약초를 점검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엄연했다. 자신을 전구의 세계
로 이끌어 준 선배이기에 욕지거리가 나갈 걸 참을 뿐이지 다
른 사람 같으면...
"나 가네. 한여름에는 예기치 못하게 소나기가 오니까 젖지 않
도록 신경 쓰게."
장소무는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우마차를 향해 발걸음
을 돌렸다. 뱃속에서 아침으로 먹은 저녁이 쓴 물이 되어 올라
왔다. 등뒤로 쏟아지는 멸시의 눈길, '미친놈'이라고 퍼부어대
는 욕지거리.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피부에 와 닿았다.
'약초 전구를 다시 맡아야 돼, 약초 전구를...'
망원객잔(望遠客殘)에 들어선 장소무는 먼지가 가득 쌓인 탁자
를 보면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곰팡내 같은
묘한 악취도 비윗장을 건드렸다.
회계대에서 꾸벅꾸벅 졸던 주인은 졸린 눈을 비비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막 어르신. 아, 왜 이제야 오십니까요!"
"에잉!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라. 이거 쉰내가 나서...에잉!"
장소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코를 움켜 쥐었다.
생선 썩는 냄새 같기도하고 고린내 같기도 한 냄새가 주인의
몸에서 물씬 풍겨 나온 까닭이다.
"헐헐힐 늙으면 다 그런 거죠. 뭐."
주인은 앞니가 두 개밖에 남지 않아 잇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입을 벌리고 실실 웃었다.
"왜? 오늘은 술좀 들여 놓으려고?"
막충은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잔이래야 탁자 네
개 방 두 칸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칸은 주인 영감쟁이가 쓰
다가 손님이 몰려들면 객방으로도 활용했다. 그러나 방 두 칸
이 다 차는 일은 일 년 열두 달 중 하루 이틀에 불과했다.
그러니 팔리는 술이 있을 까닭이 있는가.
'헐헐헐! 저기를 보십시오. 술귀신, 술귀신 하지만 저런 술귀
신은 처음 봤습니다요. 독한 화주(火酒)만 벌써 세 단지째입니
다요 마시는 꼴로 봐서 앞으로 두 단지는 더 비울 것 같은데
술이 다 떨어졌지 뭡니까. 한 달 만에 맞이한 손님인데 호박이
덩클째 굴러온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다. 이런 곳에서 마신 술이라면 꼭 얹히기 십상이었
다. 늙어 죽지 못한 칠십줄 홀아비가 유일한 생계 유지로 운영
하는 객잔. 먼지가 수북한 탁자와 비윗장 틀리는 냄새를 맡고
는 술 마실 용기가 나지 않으니까. 그나마 화주 세 단지도 넉
달 전에 들여놓은 거였다.
비윗살 강한 손님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돌리던 장소무는 벼
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눈
만 깜빡이다가 황급히 두손으로 눈을 비볐다.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아닌가. 칠 일 전인가? 원유회주 마재
가 보거든 급히 연락하라며 보여 준 용모파기(容貌把記)와 똑
같은 인물이 자신의 눈에 띄다니, 그림을 보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말았는데.
'해, 행운이다.!'
아마 사천 당문에서 사례한다고 했지? 그런 인물을 고해 준다
면 약초 전구를 맡는 일쯤은 여반장이나 다름없다. 장소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바라지 않았다. 꼭 약초 전구를 맡는 것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대, 대도객잔(大道客殘)은 너 혼자 가거라."
그 말에 술통을 짊어지던 조진문(趙振文)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제는 셈까지 나보고 하라는 소리요?"
일개 포차자가 전구자에게 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
나 주류 전구는 별볼일없는 늙은이나 하는 일이기에 어느 포차
자나 마음껏 할말을 했다.
"세, 셈은 안해도 좋네. 달라는 대로 수, 술이나 주고 오게."
말까지 더듬거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더라. 어느때보다도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마음으로는 침착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약초 전구가 손에 굴
러 떨어진다는 생각만하면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누구를 바보 멍충이로 아나..."
짊어지던 술통을 내려놓으며 눈을 부라리던 조진문은 자신의
손에 쥐어 주는 동전 닷문을 보자 입을 헤벌쑥 벌렸다.
"급한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동전 닷문이면 한건 포차한 공전(工錢)이었다. 이런 돈은 두꺼
비가 파리 잡아먹듯 낼름 삼켜야한다. 아무 부담이 없는 금전
이니까.
"그, 그럼 나 가네."
그 말에 조진문은 허리를 깍듯이 굽히면서 평소에 하지 않던
인사까지 꾸벅 했다. 그러나 취기에 몽롱하게 풀린 눈길이 그
들을 쳐다보고 있음은 정녕 몰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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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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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함니다.
즐독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