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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노동자 짓누르는 천민자본주의 '진상질'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
서이초 교사의 자살사건 이후 교사들의 애도와 분노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에 최소 한두 번은 시달려온 경험이 있는 모든 교사들이 같은 처지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자살 사건이 그러한 것처럼 이 사건 역시 사회적 타살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요즘 언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사건 직전에 학교에 찾아와서 거세게 항의한 학부모가 가장 직접적인 가해자일 수 있다. 학교생활이 어떠냐는 동료 교사의 질문에 “작년보다 10배 정도 힘들다”고 답한 것으로 미루어 이 교사의 죽음은 학부모의 민원을 담임교사 혼자 감당해야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비극으로 보인다.
학생인권조례가 원인이 아니라는 통계적 증거
그런데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 10년 동안 교사의 자살사건은 100건이 넘는다고 한다. 모든 자살이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기인한 것은 아니겠지만, 각종 소송 사건으로 교사들의 자존감이 바닥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 동안 몇 시·도에서 도입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거부감을 가져온 보수 세력은 학생인권조례, 아동학대법에 원인이 있다고 연일 발언하면서 그쪽으로 책임을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시·도와 그렇지 않는 시·도 간에 교권침해 비율에서 의미있는 차이가 존재해야 한다. 김병욱 의원실 조사에 의하면 2016-2019년도에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대구 인천 울산에는 교권침해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결과가 있다. 요컨대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은 거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교사가 학부모의 ‘갑질’, 각종 악성민원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현재 조건에 있다는 데 대해 거의 모든 교사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학교장과 학교 운영위원회가 이런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이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주최 측 추산보다 훨씬 많은 교사들이 추모 항의집회에 모인 이유도 이처럼 혼자 어려운 일을 감당해온 교사들이 그렇게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공교육의 정상화는 바로 교사가 민원 해결사가 아닌 교육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학교장은 힘 있는 부모들의 항의에 대해 과연 교사들의 편을 들어 주었고,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했던가? 교육청은 학교폭력 사건 등에 대해 법률적 지원을 하는 정도를 넘어서 갈등해결의 장치 마련을 고민했던가? 교육의 반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왜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생긴 문제를 교사보고 책임지라고 한단 말인가?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는 교사 이전에 부모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하는 일이 아닌가?
20일 오후 초임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추모행사에서 추모객들이 헌화하고 있다. 2023.7.20. 연합뉴스
소비자 갑질에 노출된 다른 노동의 경우
교사들의 분노어린 요구사항을 듣다가 보면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이번 새내기 교사의 자살은 정말 교사들만의 일인가? 오직 교사들만 이런 진상 학부모의 갑질에 노출되어 있는가? 교사들은 직업으로서 정말 특수한 존재인가? 염천 더위에 카트를 끌다가 사망한 코스트코 노동자의 죽음은 이것과 무관한 것인가? 전화 고객의 갑질에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 콜센터 노동자의 자살은 이 일과 무관한가? 민원인과 환자의 무리한 요구나 갑질에 지쳐 아예 그 직을 떠난 간호사나 공무원의 처지는 이것과 무관한가? 교실에서 교과를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면 생활지도자로서 초등 교사는 이들 서비스 노동자와 유사한 처지에 있지 않나? 한국 노동자의 자살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높은 수준이며 그 자살 노동자 중에서 서비스 노동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물론 노동자들의 경우 상급자나 경영자의 무리한 지시나 실적의 압박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경우 진상 고객을 대하는 감정노동의 스트레스가 상급자의 실적 압박 이상으로 자신의 정신건강과 일터의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지 않나? 그렇다면 이런 고객의 폭언이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는 무조건 공손하게 응답하는 것이 맞을까? 무조건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야 회사가 매출을 많이 올릴 수 있고, 외부의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노동자의 존재는 어디에 있나? 고객은 무조건 왕이고, 노동자는 아무런 분노의 감정도 표시할 수 없는 존재인가? 그런 노동자에게 노동권, 인권은 도대체 있기나 한 것일까?
교권과 노동권은 함께 지켜내야 할 집단적 권리
교사의 교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서 위로부터의 부당한 압력이나 요구 뿐 아니라 학생이나 학부모의 무례한 요구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권은 특권이 아니고, 사회적 진공에서 행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학생의 배울 원리를 존중해주고, 만약 학생들이 전혀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학생들의 학습환경 즉 가정의 형편과 공부할 조건이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교권과 학생인권이 충돌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두 개의 권리는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존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더 높은 가치에 종속된다. 그래서 교사는 교권만 주장해서도 안 된다. 교사는 관료화된 학교 지배구조 하에서는 분명히 약자이고, 일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교육노동이라는 특수한 일에서 일정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교권과 노동권은 교사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집단적 권리이고 함께 지켜내야 하는 일이다.
여기서 노동권을 침해당하는 노동자들, 교권을 침해당한 교사들이 자살로 이르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그런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하며, 동료들과 그것을 전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상의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동료가 있거나, 그것을 도와주는 상급자나 조직이 있을 경우 자살 사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 학교 민주화운동 과정이나 거친 노동억압 상황에서 지금보다 교권 침해, 노동권 침해가 훨씬 심했지만, 교사나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생각하지 않고 교육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어려움에 맞서 함께 싸워줄 동료가 있었고 조직이 있었고, 쉴 수 있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개인이 해결하도록 가르치고, 갈등이 생기면 오직 소송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오늘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자살이 빈발한다. 즉 이번 교사의 자살은 지금 청년들이 너무나 익숙해 있는 개인화된 사회, 더 이상 연대니 운동이니 집단행동이니 하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청년들의 막다른 골목에서의 ‘선택’이다.
교사와 노동자를 짓누르는 천민자본주의의 ‘진상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한국의 학부모들, 특히 자식의 성적향상에만 사활을 거는 한국의 학부모, 특히 유력한 학부모의 모습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와의 관계에서 학부모는 약자 즉 ‘을’인 경우가 많다. 사실 학교와 교사로부터 피해를 입은 학부모가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진상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이 더 심해졌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모든 사회관계가 금전적 교환 관계로 변하고, 기업의 이윤 보장과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제공이 지고의 선으로 변한 사회 환경, 이런 조건에서 서비스 노동의 감정노동화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 물론 보통 시민들 중에서도 세상일에 부대끼다 얻은 스트레스를 이러한 만만한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면서 화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지위를 과시해보지 못했던 졸부들이 이런 갑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나 교사가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고 만만하게 보는 한국 권력층의 비뚤어진 특권의식이 이런 ‘진상질’의 주 원인이다. 즉 갑질이란 더불어사는 세상에 대한 감성과 공감능력이 없는 ‘잘난 사람들’의 위세다.
이번 서이초 사건 역시 경상도나 전라도 벽지의 학부모가 교사들을 괴롭혀서 생긴 것이 아니라 법조인 등 유력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초동에서 일어났으며, 자살한 교사는 20대 중반의 여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학교나 교사를 자식 출세를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세상의 풍조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국의 시험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갖는 몰상식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는 내 자식이 중하면 남의 자식도 중하다는 기본 상식이 없는 학부모들이 너무 많다. 교사가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이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시대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젊은 여성 교사를 더욱 무시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들이 서이초등학교 교사 추모 및 재발 방지 대책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3.7.25. 연합뉴스
시험능력주의 극복만이 대안
결국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있고, 그 바다 속 얼음덩어리 안에서는 오늘도 당장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수많은 교사들, 가정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사교육비 지출에 고통 받는 학부모들, 학폭에 신음하거나 성적 때문에 우울증 치료를 받는 아이들의 고통이 계속된다. 모두가 이런 사회와 교육제도의 피해자다.
이러한 악성 민원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교사의 개인정보는 보호되어야 하고, 민원은 학교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툭하면 학교와 교사에게 소송을 거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교사 개인이 소송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학교가 소송의 전쟁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아동학대법이 남용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결국 지금 거리에 나온 교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공교육의 정상화가 답이다. 교사나 학교는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공교육을 정상화할 것인가? 학교가 평가와 성적발급 기관이고 교사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도구 기능을 하는 한 공교육의 정상화가 가능할까? 내가 한국의 교육과 사회를 설명하는데 동원했던 개념인 ‘시험능력주의’의 거대한 장벽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서이초 교사는 누가, 왜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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