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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통력이 왜 안 생기는가? -
1) 신통력이란?
신통력은, 보통 상식의 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없는 것을 통(通)이라고 합니다. 이 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흔히 여섯가지를 말합니다.
*> 천안통 :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능력을 말함. *> 천이통 :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능력을 말함. *> 신족통 : 공간에 걸림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함. *> 타심통 :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능력을 말함. *> 숙명통 : 자기뿐 아니라 6도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의 전생, 금생, 후생 일을 다 아는 능력을 말함.
여기까지는 소승의 단계로 성문, 연각 등의 경지에서 가지는 능력으로 이 단계까지만 올라도 다시는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누진통 : 번뇌마상이 완전히 끊어진 자리로 비로소 부처의 경지에 오른 것 입니다.
2) 신통력이 나타나는 경지란?
조계종의 종조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지으신 '수심결'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옵니다.
문) 스님께서는 성품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진실로 성품을 보았다면 곧 성인이어서 응당 신통변화를 나타내므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어쌔서 오늘날(당시:고려시대)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까?
답) 그대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말라, 정(正)과 사(邪)를 가리지 못하면, 이는 미혹한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마음은 무력하고 도리어 분수 조차 없는 자는 다 그대가 의심한 바에 떨어진다.
도를 배우지만 선후(先後)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지만 근본과 지말(枝末)을 가리지 못하는 자는 거짓된 견해를 가진 자요, 진실한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자신만 잘못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도 잘못되게 하나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대개 도에 들어 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돈수는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 보면 이미 여러 생에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아서 점점 익혀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곧 깨달아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이것 역시 깨달은 후에 닦는 근기이다. -중략-
말한바 신통변화는 깨달음을 의지해 수행하고 점점 익혀서 나타나는 것이요, 깨달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경에 이르기를
'이치로는 돈오이어서 개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녹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시에 제해지지 않으므로 차례차례로 제해진다.'
그러므로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치를 깊이 밝혀 말씀하시기를.
'어름 언 못이 순전히 물임을 알지 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았지만 법의 힘을 빌려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야 물이 흐르고 물을 끌어대야 손을 씻는 작용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한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 고 하였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깨달음을 얻었는데 더 닦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제가 말씀 드린것처럼 간화선을 통한 깨달음으로는 자신의 표층의 성품밖에 보지 못하므로 선정을 통한 지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경을 보던지 부처님께서는 선정의 힘을 통한 지혜를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계를 지키지 않는 선정은 모래를 쪄서 밥을 하는 것과 같으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온 법계에 두루하게 자재한 성품으로 6신통을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면 선정의 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기존의 참선법으로 하면 될까요?
우리에게 엄청난 수행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참스승으로 남으신 성철스님의 행장을 살펴 봅시다. (성철스님은 위에서 말한 지눌스님의 돈오점수를 배척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하시어 돈점논쟁을 야기하셨습니다. 조계종의 종조문제까지 비화되게 돈점논쟁을 하시게 된 배경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3) 성철스님의 행장
성철스님께서는 26세에 출가하시어 출가 3년 만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견성하셨습니다. 즉,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이 주장하신 돈오돈수에 의하면 담박 깨쳤으므로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니까요.
그럼, 깨달음을 얻은 뒤의 성철스님의 행장을 살펴 봅시다.
스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뒤 오히려 8년 동안 장좌불와를 하시면서 그 전보다 더욱 더 용맹정진하셨습니다. 즉 조계종의 스님으로서, 지눌스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그런 경지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무려 8년 동안이나 장좌불와하시면서 엄청난 수행을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계사 성전암에다 철조망을 두르고 무려 10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 하시면서 경전공부에 몰두하셨습니다.
즉 선(禪), 교(敎) 양면으로 보통 사람은 감히 흉내도 못낼 정도로 엄청난 수행을 하신 것입니다. 분명 깨달음을 얻으시고 오도송까지 읊으신 스님께서 무슨 연유로 그처럼 견성하시기 전보다 더 열심히 수행을 하셨을까요?
돈오점수라는 조계종의 종풍에 충실하셨기 때문이고, 진짜 석가모니 부처님같은 6신통이 구족한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그렇게 치열하게 수행하셨건만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시자, 후학들을 위해서 돈오돈수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즉 내가 이처럼 열심히 수행을 했는데도 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위신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로 보아 견성한 뒤에 닦아서 신통묘용이 나타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시고 돈오돈수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후학들이 스님처럼 고생하지 않게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러한 일들이 생기게 된 연유는 기존의 간화선의 수행법이 잘못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눌스님의 견해나 성철스님이 내리신 결론은 다 옳습니다. 즉 잘못된 수행법으로 수행하도록 내버려둔 기존의 조사들의 잘못이 클 뿐입니다.
분명 깨달음의 경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경지여야 합니다. 성불(成佛)이라는 말을 쓰려면 말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간화선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분명 더 닦아야 합니다. 자기 성품에 훈습된 과거의 모습도 보지 못하는데 어디서 감히 부처운운, 깨달음 운운 한다는 말입니까?
앞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위신력을 보여 주지 못하면 깨달음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간화선을 통한 조사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진짜 부처의 지위에 오르려면 잘못된 수행법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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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구르는 하루 하루 의 시작에 건안하시기를 기원하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보디삿트와 ( midong0205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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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각 카페에 올라있는 글이고,메일로도 여러카페(돈오점수카페)에서 발송되어 온 것입니다.이 글에 대한 반론을 위 글에 씁니다.제글에 부족한 점이나 알려주실 내용있으시면 메일이나 전화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질이님 조사어록 많은 사이트 좀 갈쳐 주세요(아무래도 보조어록을 다른 조사어록으로 수정해야 하지 싶어요)
제글은 876번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