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일이라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라 불렀지만) 입학식 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입학식 며칠 전부터 가방을 메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학교 갈 날만 기다렸던 건 마치 오랜 전에 본 영화처럼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데, 정작 그날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3월 초, 날씨는 맑았던가. 바람이 불거나 춥지는 않았을까. 교장 선생님께서 뭔가 근엄한 말씀을 하셨을 텐데 안경을 쓰셨던가 아니면 머리가 벗겨지셨던가. 담임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는데, 목소리가 나긋나긋하셨나 카랑카랑하셨나. 그땐 얼른 학교에 가고 싶어 그리도 안달을 했었는데, 내 기억에 스스로가 살짝 배신당한 느낌이다.
입학식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쓸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는 건 전학 간 첫날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두어 달 쯤 지났을 때, 집이 이사를 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무척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반 아이들 앞에 서 있는데 교실이 너무 어두워 아이들 얼굴이 거의 안 보였던 것과 회색빛이 도는 시커먼 마룻바닥의 나무 무늬만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교실이 어두웠다고 기억하는 건, 그날 내 느낌에 대한 해석을 훗날 덧붙인 게 아닌가 싶다. 정서 경험에 대한 기억도 시각 이미지 못지않은 것 같다. 지금도 그날 생각만 하면 그때 마음 그대로 참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말하고 언제 웃는지 운동장은 어디로 가로질러 뛰는지, 남모르게 그리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찰하고 따라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넌 정말 특별해!』에 나오는 부엉이를 보면서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이가 전학 가서 겪었을 나름의 마음고생이 생각났다.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의 원제목은 ‘Cock-a-doodle-hooooooo!’로 닭의 울음소리와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섞어 놓은 의성어다. 표지 그림을 보면 암탉들 틈을 비집고 앉아 있는 부엉이 한 마리가 시선을 끈다. 만화풍의 가벼운 수채화 그림과 군데군데 말풍선을 써서 암탉들의 수다를 효과적으로 담은 것이 이야기에 걸맞은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표지를 넘기면 바로 면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부엉이 한 마리가 고개를 숙인 채 농장을 향해 힘겹게 걸어가는 장면이다. 비오는 달밤이 예사롭지는 않다. 길 잃은 부엉이는 다행히 따뜻한 헛간으로 들어가 잠이 든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라서 부엉이는 미처 그곳이 닭장인 줄 모르고 있다.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독자들은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 닭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부엉이와 암탉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암탉들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이 요상하게 생긴 부엉이가 혹시 수탉이 되어 줄 수는 없을까 하고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부엉이는 부엉이. 생김새부터가 닭하고는 완전히 다르니 낟알 쪼기든 흙 헤집기든 닭을 닭답게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본문 네 번째 펼친 면을 보면, 부엉이의 테스트 장면이 상중하 3개로 분할되어 나온다. 3가지 능력을 시험당하는 동안 부엉이의 반대편에 서는 닭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 맨 위는 한 마리, 가운데는 두 마리, 맨 아래 그림에는 닭 세 마리와 병아리 세 마리가 똘똘 뭉쳐 부엉이를 밀어내는 듯이 보인다. 반대편 닭의 수가 불어남에 따라 부엉이의 위기도 점점 고조된다.
오갈 데 없는 부엉이로서는 꼭 암탉들의 눈에 들어서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살 수가 있는데……. 그래서 부엉이는 있는 힘껏 수탉이 되는 법을 배우고 익힌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부엉이에게 수탉이 되는 법을 알려 준 암탉의 생김새다. 그 닭만 유일하게 온몸에 얼룩무늬가 있다. 짐작컨대 그 얼룩무늬 암탉 역시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꽤나 놀림 받지 않았을까. 부엉이를 감싸 안고 비밀을 말해 주는 얼룩무늬 암탉을 보면서, 동병상련이라고 제가 그 마음고생을 겪어 보았으니 부엉이를 도와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에서 좀 벗어나는 듯하지만, 우리말 번역은 수탉이 아니라 수평아리(cockerel)라고 되어 있는데, 생물학적으로야 완전히 다 자란 어른 닭이 아니니 수평아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문맥상으로는 ‘젊은 수탉’이거나 그냥 수탉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소속감은 인간 생존의 필수 요건이다. 가정이나 학교,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일은 곧 생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잘 모르는 동네로 이사를 가거나 전학을 가고, 심지어 인종과 문화가 완전히 다른 나라로 유학이나 이민을 가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말이 다르고 옷차림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먹는 것까지 다르다면 무리 중에서 튀는 존재가 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나 자신이 낯선 존재라면 혹시 조롱거리가 되거나 배척당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맨 먼저 시도하는 생존 전략이 바로 ‘같아지기’이다. 이 그림책의 부엉이도 닭처럼 먹고 닭처럼 걷고 닭처럼 울 수 있게 되어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자 한다. 성공한 듯 보이는 부엉이의 노력은 마지막 울음소리에서 물거품이 된다. 아무리 해도 ‘부엉’ 하는 울음소리만큼은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마치 몸 속 어딘가 숨어 있다가 급할 때면 튀어나오는 고향의 언어처럼.
결국 암탉들에게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 하던 부엉이는 마지막 순간에 닭이 되기를 포기하고 이렇게 외친다. “난 부엉이야! 닭이 아니야. 부엉이는 닭이 아니라고.” 이 장면에서 닭들은 나오지 않고 화난 듯 보이는 부엉이만 한쪽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부엉이가 정면으로 독자를 바라보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접 대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자와의 비교 없이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는 부엉이는 어리고 약하게만 보이던 이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키도 부쩍 자란 것 같고(거의 책 높이와 같다.) 폭발할 듯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부엉이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수탉은 새벽에 울지만 부엉이는 달밤에 운다. 닭은 낟알을 쪼아 먹지만 부엉이가 먹는 것은 생쥐다! 부엉이의 먹이를 밝힐 때 작가들은 부엉이의 말을 빌리는 대신 작은 에피소드를 삽입한다. 부엉이가 낟알 대신 무얼 먹는지 말하려는 찰나 닭장에 생쥐가 나타나 아수라장이 되는데, 그때 부엉이가 휙 날아가서는 그 생쥐를 낚아채 먹어 버리는 것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부엉이가 어떤 존재인지 생생하게 밝혀지는 대목이다. 이제 암탉들은 부엉이를 자신들을 지켜 주는 수탉으로 받아들이고 영웅으로 떠받든다. 뒷면지 그림은 시간대만 다를 뿐 앞면지와 동일한 농장 풍경이다. 어느 맑은 날, 부엉이가 리더이자 보호자로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암탉들과 병아리들이 졸졸 좇아가고 있는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통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너무도 다른 부엉이와 닭들이 어울려 사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수탉이 되려다 깊이 좌절한 부엉이는 쫓겨날지 모르면서도 결국 제 본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엉이가 부엉이다움을 보이자 그간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꼭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부엉이와 닭만큼의 거리도 안 되는 아주 사소한 차이로, 예컨대 피부가 남달리 희거나 검다고, 또는 부모님 중 한 분이 안 계셔서, 아니면 달리기를 잘 못해서 놀림감이 되거나 무시당하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어느 사회, 어느 문화에서나 남과 다른 것은 뭔가 불온하고 위협적이라 여겨지는데, 특히 우리 사회는 반만 년 역사를 지닌 단일 민족을 강조하며 그 정도가 좀 더 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단적인 예로, 현재 우리나라 총인구의 2%가 외국인이라 하니 이미 다름을 다양성이란 말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싶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기저에는 실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 없음 혹은 부정이 깔려 있을 때가 많다. 요컨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자아에 대한 긍정이며, 이는 나와 너의 다름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한다.
자존감과 ‘튀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 그림책 작가로 레오 리오니가 있다. 『프레데릭』, 『새앙쥐와 태엽쥐』, 『티코와 황금 날개』, 『으뜸헤엄이』 등 리오니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이며 낙천적이다. 이들 주인공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혹은 함께 살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1963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으뜸헤엄이Swimmy』는 특히 자신과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낙관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의 주인공 으뜸헤엄이는 빨간 물고기 떼 중에서 유일하게 새까만 물고기로 헤엄 실력도 다른 물고기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바다 속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던 으뜸헤엄이는 어느 날 사나운 다랑어의 공격으로 혼자만 겨우 살아남는다. 외톨이가 된 으뜸헤엄이는 몹시 슬퍼하며 홀로 헤엄쳐 다니다가 바다 속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무지갯빛 해파리, 우아하게 움직이는 가재와 보이지 않는 실에 꿰인 듯 줄지어 가고 있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 사탕 바위에서 자라는 물풀 숲,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몸이 기다란 장어, 분홍빛 야자나무를 닮은 말미잘 등등. 리오니는 프린팅 기법을 이용한 수채화로 바다 속 풍경을 신비스럽게 연출해 내는데, 이 책은 1964년 칼데콧 영예상에 선정되었다.
으뜸헤엄이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과 슬픔을 겪지만 삶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통해 성장함으로써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오니의 말 그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모험과 아름다움, 그리고 물론 새로운 문제들도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장관”이며(BookRags.com의 레오 리오니 항목 중에서 재인용.)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라면 고통과 좌절 앞에서도 다시 일어나 이같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몇 달 동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무섭고 끔찍한 범죄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 이런 세상에 어른으로 사는 게 참으로 무기력하고 참담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그래도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으뜸헤엄이가 형제자매들을 모두 잃은 뒤 슬픔에 잠겨 어두운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으뜸헤엄이처럼 느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으뜸헤엄이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열린 마음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으뜸헤엄이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은 이처럼 아주 작고 연약한 물고기조차 고난으로부터 삶을 지키는 법을 배워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빨간 물고기 떼를 발견한 으뜸헤엄이는 반가워하며 함께 세상 구경을 다니자고 권한다.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힐까 봐 어두운 구석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물고기 떼에게 으뜸헤엄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다 함께 모여서 한 마리의 아주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친다. 남들과는 달리 혼자만 새까만 으뜸헤엄이는 맨 마지막으로 제게 꼭 어울리게, 거대한 물고기의 눈이 된다. 이처럼 리오니는 『으뜸헤엄이』를 통해서 세상과 자기 삶에 대해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면서, 달라서 외톨이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깨어 있는 존재로서의 주체적인 선택이라면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은 각 개인의 다양한 선택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삶까지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예술가의 삶일 것이다. 리오니는 어느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으뜸헤엄이에 비유하면서 “그저 예술가가 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예술가는 때가 되면 자신이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술가는 몸이 아니라 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BookRags.com의 레오 리오니 항목 중에서 재인용.) 레오 리오니는 예술가로 표현했지만, 이것을 직업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우리가 다 다르면, 세상은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