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쓰는나의 참회록(懺悔錄)
나의 어린 시절(時節)의 소년(少年) 지게꾼
(세 번째 이야기)
글 조 처음
내 어린 시절(時節)에는 참으로 불우(不遇)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 세끼를 먹기 어려워 굶주림에 처해 있었습니다.
가끔가다 아버지의 주정(酒酲) 때문에 고초를 격어야 했습니다.
당시(當時)에 우리 가족(家族)이 먹는 것은 매 끼 마다 보리밥에다
저녁이면 멀건 죽을 쑤는데 쌀을 약간 넣고 나물을 많이 넣어 먹습니다.
매일 한 끼는 아침에는 된장찌개에다 보리밥을 먹는데
먹는 그 순간(瞬間)은 참으로 행복(幸福)했습니다.
여름부터 가을 까지는 근근이 먹을 것이 해결(解決)되는데
추운겨울이 지나고 봄이 깊어 가면
보리가 수확(收穫)될 때까지 배고픔이라는 것은
말로 다 형용(形容)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손수 산전(山田) 이곳저곳을 개간(開墾)해서
그 곳에다 감자와 보리 및 옥수수를 심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세월(歲月)을 보냈고
어머니는 자식(子息)들을 먹여야 하기에 한겨울에는
쉬지 않고 촌촌(村村) 골골 다니면서 행상(行商)을 했습니다.
저녁이면 술에 찌들어 들어 온 아버지의 주정(酒酲)이
시작(始作) 되면 새벽 술이 깰 때 까지 이어 졌습니다.
우리 오남(五男妹)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모두 아버지를 피해 어디로인가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전날처럼 술에 취하여 주정(酒酊)이 심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간곳없이 살아 지셨습니다.
그 무렵에 막내 고모부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시다가
우리 집 헛간에다 목을 매시고 매달린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를 구해 내셨는데 그 때 고모부가 오시지 않으셨으면
그 무렵에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은 큰형은 미리 친구(親舊)네 집으로 가고
누나는 개울가로 동생(同生) 둘을 데리고 아버지를 피해서 나가고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주정(酒酲)을 지키면서 받아야 했습니다.
나는 어린 마음에서 어머니에게 폭력(暴力)을 써서
어머니가 잘못되실까봐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의 주정(酒酊)을 받아 가면서 어머니를 지켜야 했습니다.
술에 취하여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지금 생각(生角)해도 신기(身氣)하게도 절대로 어머니에게
폭력(暴力)은 휘두르지 않니 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집안이 조용해집니다.
아버지는 잠에 떨어져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이 드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안 드실 때는 그렇게 좋으신 분이 없으셨습니다.
주위(周圍) 사람들도 그렇게 좋으신 분이 술만 드시면 낭패(狼狽)라고 하면서
위로(慰勞)와 걱정을 해 주셨습니다.
저렇게 좋은 사람을 술이 사람을 망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날이면 집안의 분위기(雰圍氣)는
긴장(緊張)되고 폭풍전야(暴風前夜) 같은 날이 됩니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生角)을 하면 눈물이 저절로 쏟아집니다.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는 자식(子息) 걱정에 한시라도
마음을 놓지 않으신 우리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 하면
불효(不孝)한 이 자식(子息)을 용서(容恕) 하실까 하고 울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瞬間)에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울고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 중에 우리 어머니처럼 고생(苦生) 많이 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신 분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의 생애(生涯)에 자식(子息)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셨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나는 지금의 초등학교(初等學校)의 전신(全身)인
국민학교(國民學校) 6학년(學年)이 되었습니다.
졸업(卒業)을 하고 남들은 중학교(中學校)에 진학(進學)을 하는데
나는 집안 형편(形便)이 어려워 진학(進學)을 하지 못하고
더 이상 진학 하는 것을 포기(抛棄)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떼를 썼지만 가난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중학교(中學校)는 의무교육(義務敎育)이지만
당시(當時)에는 초중고(初中高) 모두가 매월(每月)
사친회비(師親會費)라는 것을 지불(支佛)해야 했습니다.
당시(當時)의 초등학교(國民學校)는 월사금(月謝金)이라 했다가
문교부(文敎部)의 정책(政策)에 따라 다시
사친회비(師親會費)로 변경(變更)되고 또다시 바뀌고
그 후에는 육성회비(育成會費)라는 명목(名目)으로 그 이름이 바뀌고
수업료(授業料)가 한 달이라도 밀리면 수업(受業)하는 도중(途中)에
수업료(授業料)가 밀린 사람을 일일이 호명(呼名)해서
앞으로 불러 낸 다음 집으로 뒤돌려 보냈습니다.
담임선생(擔任先生)이 집에 가서 돈 가져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심하게 독촉(督促)을 했습니다.
돈이 없어 가난했던 우리 집에서는 한두 달이 밀리는 것이
보통이고 모든 사람 중에 내가 매일 같이 밥 먹듯이 밀리니
불려 나가서 어린 나는 하루의 삶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친구(親舊)들은 모두 중학교(中學校)에 입학(入學)을 했는데
나와 우리 집안과 비슷한 아이들이 몇이 있었는데 그들과
우리 몇 사람만 진학(進學)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형은 장남(長男)이라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努力)으로
고등학교(高等學校)를 졸업(卒業)을 했습니다.
형이 졸업(卒業)을 했으니 이제 직장(職場)을 구하면
돈이 생기고 할 테니까? 너는 일 년 쉬었다가
내년에 중학교(中學校)에 들어가라고
나를 달래시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믿고 일 년을 기다리기로 결심(決心)을 했습니다.
14살에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시장(市場)에서 지게를 사 오셨습니다.
너는 놀지 말고 내일부터 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울타리를 같이 한 이웃집의 아저씨가 계셨는데
아저씨 따라 땔나무를 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저씨 보고 내일부터 우리 아들 데리고 산에 갈 때
같이 가서 땔나무를 해 오라고 부탁(付託)을 했습니다.
그 당시(當時)에는 모든 가정(家庭)이 연료(燃料)가 부족(不足)해서
나무로 불을 지펴서 난방(煖房)과 취사(炊事)를 해결(解決) 했습니다.
지게와 낫을 등에 짊어지고 옆집 아저씨를 따라
땔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형(兄)은 취직(就職)이 되지 않고 매일(每日) 같이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놀면서 시간(時間)만 허비(虛費) 했습니다.
형은 장남(長男)이고 종손(宗孫)이라 일을 시키지 않니 했습니다.
나는 형이 취직(就職)이 되면 중학교(中學校)에 진학(進學)이 되는
욕심(慾心)으로 아버지에게 아무 항변(抗辯)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해 겨울에 형에게 군(軍) 징집영장(徵集令狀)이 나왔습니다.
형(兄)은 취직(就職)도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다가
군대(軍隊)에 입대(入隊) 하여 군대(軍隊)에 가 버렸습니다.
이제 중학교(中學校)는 물 건너 간 것 같았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배움의 꿈을 놓지 아니 했습니다.
배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산에 가도 나는 책을 읽었습니다.
형이 첫 휴가(休暇)를 왔는데 군대(軍隊)에서 책을 많이 얻어 왔습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그곳에는 참고서(參考書)와 한국문학(韓國文學)과
세계문학(世界文學)과 소설책(小說冊)을 한보따리 가져 왔습니다.
형은 책을 구해다 주시면서 내가 제대(除隊) 할 때 까지 이 책을 일고
어디 가지 말고 꾹 참고 집안을 돕고
내가 제대(除隊) 할 때 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3년을 지게를 지고 산에서 땔나무를 했습니다.
그 무렵에 중학교(中學校)에 진학(進學)한 아이들은 만나면
모두 외면(外面)을 하고 대화(對話)와 만나기를 거부(拒否) 했습니다.
그 설움을 안 당해 본 사람은 그 심정(心情)을 알 길이 없겠지요?
글이 너무 길군요?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 가야 갰습니다.
늦은 밤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祈禱) 해 주시고
위로의 댓글을 부탁(付託)드립니다.
모두 좋은 날 되시고 주님의 꿈꾸십시오!
할렐루야 감사(感謝) 합니다.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