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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이오(伊吾)토벌(討伐)과 소륵(疏勒)수비(守備) (제2편)
○ 전회(前回) 1편에 이어, 2편으로 계속됩니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대왕(大王)들은,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토벌(討伐)하고, 뒤를 이어 “막북지대(漠北地帶)”를 정복(征服)하여, 왕조(王朝)의 위엄(威嚴)를 펼치고자 했으며, 이오로(伊吾盧)【‘합밀(哈密)’ 또는 ‘하미’이다.】와 소륵(疏勒)【카슈가르(Kashgar)=카스(喀什)’】등지(等地)를 토벌(討伐) 또는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에 대비(對備)하고자 하였는가?
이러한 질문(質問)은 바보스러운 이야기다. 나라(國)의 영토(領土)를 개척(開拓)하고, 영토(領土)를 수호(守護)하고, 약탈(掠奪)하는 외적(外敵)들을 방비(防備)하는 것은, 곧 나라(國)를 지켜, 백성(百姓)들을 보호(保護)하는 첫 번째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무(責務)를 소홀히 한 왕조(王朝) 또는 나라(國)들은, 이미 소멸(消滅)되어,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나라(國)를 지키는 일은, 가장 중요(重要)한 일이고, 그보다 더 중(重)한 일은 없다.
(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29년 4월 4일 丁卯 [1829년 청 도광(道光) 9년]조 기록(記錄)을 보면 :
《勅書,順付節使而來.奉天承運皇帝詔曰 : 칙서(勅書)가 절사(節使) 편에 순부(順付)되어 왔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가 조서(書詔)하기를 : 朕誕膺景祚,寅紹丕基.中略.而乃妄生逆焰狡起.戎心肆厥,披猖遂擾,莎車之四鎭,變由倉卒,且困疏勒之孤軍.特遣元戎,恭行天討.中略. : 짐(朕)은 크나큰 복조(福祚)를 이어받아, 거룩한 기업을 삼가 계승하였다. 중략(中略). 이에 역심(逆心)의 불꽃이 망령되이 생겨나고, 융심(戎心)이 교활하게 일어났다. 방자하게 날뛰어 마침내 사거(莎車)의 4개 진(鎭)에서 소요를 일으켰고, 변란이 창졸간에 생겨 또 소륵(疏勒)의 고군(孤軍)이 곤경에 빠졌다. 특별히 원수(元帥)를 파견하여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다. 중략(中略). 是役也,始自丙戌之夏,訖于戊子之春.雖地極邊陲,興師實逾萬里,而功成神速,蕆事甫閱兩年.中略. : 이 전쟁은 병술(丙戌)년 여름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자(戊子)년 봄에 끝났다. 비록 멀고 먼 변방으로 군사를 일으켜 실로 만리(萬里)를 넘게 내보내었으나, 공(功)을 이룸이 신기(神奇)스럽게 빨라서 전쟁을 끝내는데 겨우 두 해가 걸렸다. 중략(中略).》하였다.
◆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가 조선(朝鮮) 황제(皇帝)냐? 아니면 청(淸) 황제(皇帝)를 말하는 거냐? 하는 것인데, 조선(朝鮮) 황제(皇帝)가 바로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다. 【우리 카페에서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생략(省略)한다.】
➠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란 : 조서에 쓰는 황제(皇帝)의 자칭(自稱). 곧 천명(天命)에 따라 제운(帝運)을 계승(繼承)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양촌집 제24권 / 事大表箋類 / 賀元日表(원일(元日)을 축하하는 표) :《邈居侯服.常輸奉日之心.欣遇王正.倍祝齊天之壽.頒曆授時.致三陽之交泰.奉天承運.開萬世之大平.春滿乾坤.光增日月. : 멀리 후복(侯服)에 있어, 항상 받드는 마음을 보내고, 즐거이 봄 정월을 맞아, 특별히 하늘과 같이 오래 사시기를 빕니다. 책력을 나눠 하사하시고 삼양(三陽)의 교태(交泰)를 이루었고, 천운을 받들어 이으시매, 만세의 태평을 여시었으니, 봄은 하늘과 땅에 찼고 광채는 해와 달에 더하였습니다. 欽惟允文允武.乃聖乃神.蒞中國而撫四夷.柔遠能邇.建皇極而斂五福.發政施仁.中略. : 삼가 생각건대 문무를 겸하시고, 또 성스럽고 신기로우셨습니다. 중국에 군림하여 사이(四夷)를 어루만지시고, 먼 데나 가까운 데를 다 잘 보살폈으며, 황극(皇極)을 세워 오복(五福)을 거두시어, 어진 정사를 펴셨습니다. 중략(中略).》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년 2월 6일 乙未【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乙未.朝廷使臣禮部主事陸顒,鴻臚行人林士英,奉詔書來,設山棚結綵儺禮.上率百官,以朝服迎于郊,至議政府.以壽昌宮災,而時坐殿隘故也.宣詔.奉天承運皇帝詔曰 : 을미(乙未), 조정(朝廷) 사신(使臣) 예부주사(禮部主事) 육옹(陸顒)·홍려행인(鴻臚行人) 임사영(林士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니, 산붕(山棚)·결채(結綵)·나례(儺禮)를 베풀고,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교외에서 맞아, 의정부(議政府)에 이르렀으니, 수창궁(壽昌宮)이 불탔고, 시좌전(時坐殿)이 좁기 때문이었다. 조서를 선시(宣示)하니, 봉천승운(奉天承運) 황제의 조서에 이르기를…》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 2년 10월 12일 壬戌【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 壬戌.朝廷使臣都察院僉都御史兪士吉,鴻臚寺少卿汪泰,內史溫全ㆍ楊寧,奉詔書至,結山棚備儺禮軍威,上具冕服,率群臣迎于西郊,至闕宣詔.奉天承運皇帝詔曰: : 조정(朝廷) 사신 도찰원 첨도어사(都察院僉都御史) 유사길(兪士吉)·홍려시소경(鴻臚寺少卿) 왕태(汪泰), 내사(內史) 온전(溫全)·양영(楊寧)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므로, 산붕(山棚)을 맺고, 나례(儺禮)와 군위(軍威)를 갖추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서교(西郊)에 나가서 맞이하여 대궐에 이르러 조서를 선포하였다. 봉천(奉天)승운(承運) 황제(皇帝)가 조서(詔書)하기를…》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종(高宗)34년 정유(1,897) 9월 18일(갑진) 맑음 : 《奉天承運皇帝詔曰:朕惟,檀,箕以來,疆土分張,各據一隅,互相爭雄,及高麗時,呑竝馬韓,辰韓,弁韓,是謂統合三韓. : 봉천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가 조령을 내리기를 :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할되어 각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는 서로 자웅(雌雄)을 겨루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及我太祖龍興之初,輿圖以外,拓地益廣,北盡靺鞨之界,而齒革檿絲出焉,南收耽羅之國,而橘柚海錯貢焉. :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이외에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물로 받게 되었다. 幅員四千里,建一統之業,禮樂法度,祖述唐·虞,山河鞏固,垂裕我子孫萬世磐石之宗.中略. : 사천(四千)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해져서 우리 자손들에게 만세토록 무궁할 반석 같은 터전을 전해 주었다. 중략(中略).》하였다.
◆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 : 조서(詔書)에 쓰는 황제(皇帝)의 자칭(自稱). 곧 천명(天命)에 따라 제운(帝運)을 계승(繼承)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 명(明)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주원장(朱元璋) :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라고 하였다.
ⓑ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 :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라고 하였다. 【우리 카페(Cafe)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이므로 생략(省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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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朝鮮王朝實錄 / 성종(成宗) 22년 신해(1491) 7월 4일(무인) : 개성부 유수 유순ㆍ경기 관찰사 김제신 등에게 하서하여 북정 일정을 통지하다.
《敎開城府留守柳洵,京畿觀察使金悌臣,江原道觀察使金礪石,忠淸道觀察使洪興,兵馬節度使曺淑沂,全羅道觀察使金克儉,兵馬節度使辛鑄,慶尙道觀察使鄭崇祖,左道兵馬節度使河叔溥,右道兵馬節度使曺克治,永安南道節度使卞宗仁,北道節度使成俊曰 :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유순(柳洵),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김제신(金悌臣), 강원도 관찰사 김여석(金礪石), 충청도 관찰사 홍흥(洪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숙기(曹淑沂), 전라도 관찰사 김극검(金克儉), 병마절도사 신주(辛鑄), 경상도 관찰사 정숭조(鄭崇祖), 좌도 병마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하숙부(河叔溥), 우도 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 조극치(曹克治),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변종인(卞宗仁),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 성준(成俊)에게 하서(下書)하기를 : 偃武修文, 雖帝王之盛德; 禁暴除亂, 乃聖人之義兵, 若稽往猷, 可徵簡策。 蠻荊爲讎, 周宣有(菜芑)〔采芑〕 之師; 頡利憑陵, 唐宗有漠北之討, 粤我祖宗, 亦事武功, 己亥之東征、癸丑之西伐、庚辰之北征, 是豈窮兵而黷武? 皆爲生民之害、社稷之憂, 不可得已者. : 무기(武器)를 창고에 넣어 두고 학문을 닦아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것은 비록 제왕(帝王)의 성덕(盛德)이기는 하나, 포악(暴惡)을 금지시키고 난당(亂黨)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성인(聖人)의 의병(義兵)이니 지난 시대의 계책을 상고한다면 간책(簡策)에서 증거할 수가 있다. 만형(蠻荊)이 원수가 되니 주(周)나라 선왕(宣王)에게 채기(采芑)의 군대가 있었고 힐리(頡利)가 업신여기니 당(唐)나라 태종(太宗)에게 막북(漠北)의 토벌(討伐)이 있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도 또한 무공(武功)을 힘쓰셨으니, 기해년에는 동방(東方)정벌(征伐)이 있었고, 계축년에는 서방(西方)정벌(征伐)이 있었으며, 경진 년에도 정벌(征伐)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무력(武力)을 남용(濫用)한 것이었겠는가? 모두가 백성에게 해독이 되고 사직(社稷)에 근심이 되므로 마지못해서 한 것이다. 予自纉承基構, 誕脩文敎, 豈欲興兵動衆, 專耀武威? 交隣事大, 罔不盡心, 至於夷虜之接於我境者, 無間彼此, 撫以恩信。 顧玆北虜稔惡, 背恩負施, 去年犯我撫夷堡, 以爲鼠竊狗偸, 不足與較, 置而不問; 今年又犯造山堡, 殺害我鎭將, 虔劉我人民, 搶奪我頭畜, 邊城之人, 日夜切齒, 咸思一擧, 薄示威靈。 予念此而不討, 國非其國, 以我堂堂之兵威, 寧堪受屈於小醜? 宜興問罪之擧, 亟行干紀之誅。 以許琮爲都元帥, 成俊、李季仝副之, 今年十月率兵二萬, 眞擣窟突, 勦殲乃已, 今送兵符合驗。: 내가 기업(基業)을 계승함으로부터 문교(文敎)를 크게 밝혔으니, 어찌 군사를 일으키고 군대를 동원(動員)하여 오로지 무위(武威)만을 과시(誇示)하려고 하겠는가? 교린(交隣)하고 사대(事大)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오랑캐가 우리 국경(國境)에 인접(隣接)해 있는 것에 있어서도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이 은혜와 신의(信義)로써 무마(撫摩)했는데도 도리어 이 북쪽 오랑캐는 악한 일을 쌓아서 은혜를 저버리고서 지난해에 우리의 무이보(撫夷堡)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좀도둑은 대적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내버려 두고 문죄(問罪)하지 않았는데, 금년에 또 조산보(造山堡)를 침범하여 우리의 진장(鎭將)을 살해하고, 우리의 백성을 죽이고 우리의 가축(家畜)을 빼앗아갔다. 그러므로 변성(邊城)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이를 갈면서 모두가 한 번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위광(威光)을 잠시 보이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하건대, 이같이 하는데도 토벌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당당(堂堂)한 군대의 위세(威勢)로써 어찌 보잘것 없는 오랑캐에게 굴욕(屈辱)받는 것을 견딜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죄를 묻는 군대를 일으켜 법을 범한 자에게 대한 형벌을 빨리 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성준(成俊)과 이계동(李季仝)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금년 10월에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바로 그 굴혈(窟穴)을 공격하여 무찔러 없애버리고야 말겠다. 지금 병부(兵符)를 보내니, 합해 조사하라. 京畿南陽、水原、陽城、振威、龍仁、安山、陰竹、驪州、利川、砥平、楊根、加平、永平、抱川、楊州、廣州、果川、衿川、竹山、陽智、麻田、漣川、仁川等官軍士, 九月初二日發程, 同月二十四日到吉城 ; 경기(京畿)의 남양(南陽)ㆍ수원(水原)ㆍ양성(陽城)ㆍ진위(振威)ㆍ용인(龍仁)ㆍ안산(安山)ㆍ음죽(陰竹)ㆍ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지평(砥平)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영평(永平)ㆍ포천(抱川)ㆍ양주(楊州)ㆍ광주(廣州)ㆍ과천(果川)ㆍ금천(衿川)ㆍ죽산(竹山)ㆍ양지(陽智)ㆍ마전(麻田)ㆍ연천(漣川)ㆍ인천(仁川)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2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開城府軍士, 九月初三日發程, 同月二十四日到吉城 ; 개성부(開城府)의 군사는 9월 초 3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4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忠淸道 舒川、林川、韓山、鴻山、恩津、尼山、連山、扶餘、石城、鎭岑、定山、藍浦、泰安、瑞山、沔川、唐津、牙山、平澤、稷山、天安、新昌、全義、木川、保寧、結城、洪州、大興、德山、禮山、海美、溫陽等官軍士, 八月二十三日發程, 九月二十三日到吉城 ; 충청도(忠淸道)의 서천(舒川)ㆍ임천(林川)ㆍ한산(韓山)ㆍ홍산(鴻山)ㆍ은진(恩津)ㆍ이산(尼山)ㆍ연산(連山)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ㆍ진잠(鎭岑)ㆍ정산(定山)ㆍ남포(藍浦)ㆍ태안(泰安)ㆍ서산(瑞山)ㆍ면천(沔川)ㆍ당진(唐津)ㆍ아산(牙山)ㆍ평택(平澤)ㆍ직산(稷山)ㆍ천안(天安)ㆍ신창(新昌)ㆍ전의(全義)ㆍ목천(木川)ㆍ보령(保寧)ㆍ결성(結城)ㆍ홍주(洪州)ㆍ대흥(大興)ㆍ덕산(德山)ㆍ예산(禮山)ㆍ해미(海美)ㆍ온양(溫陽)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3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3일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公州、懷德、黃澗、永同、靑山、沃川、燕歧、淸州、文義、延豐、槐山、淸安、報恩、懷仁、鎭川等官軍士, 八月二十日發程, 九月二十二日到吉城 ; 공주(公州)ㆍ회덕(懷德)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청산(靑山)ㆍ옥천(沃川)ㆍ연기(燕岐)ㆍ청주(淸州)ㆍ문의(文義)ㆍ연풍(延豐)ㆍ괴산(槐山)ㆍ청안(淸安)ㆍ보은(報恩)ㆍ회인(懷仁)ㆍ진천(鎭川)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0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2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丹陽、堤川、永春、淸風、忠州、陰城等官軍士, 八月二十二日發程, 九月二十三日到吉城 ; 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영춘(永春)ㆍ청풍(淸風)ㆍ충주(忠州)ㆍ음성(陰城)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22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3일에 길성에 도착하도록 하고, 江原道 原州、寧越、平昌、旌善、橫城、春川、麟蹄、狼川、洪川、金化、伊川、楊口、淮陽、金城、安峽、鐵原、平康等官軍士, 九月初八日發程, 同月二十五日到吉城 ; 강원도(江原道)의 원주(原州)ㆍ영월(寧越)ㆍ평창(平昌)ㆍ정선(旌善)ㆍ횡성(橫城)ㆍ춘천(春川)ㆍ인제(麟蹄)ㆍ낭천(狼川)ㆍ홍천(洪川)ㆍ김화(金化)ㆍ이천(伊川)ㆍ양구(楊口)ㆍ회양(淮陽)ㆍ금성(金城)ㆍ안협(安峽)ㆍ철원(鐵原)ㆍ평강(平康)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8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5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平海、蔚珍、三陟、江陵、襄陽、杆城、高城、通川、歙谷等官軍士, 九月初四日發程, 同月二十一日到吉城 ; 평해(平海)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강릉(江陵)ㆍ양양(襄陽)ㆍ간성(枰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ㆍ흡곡(歙谷) 등의 고을의 군사는 9월 초 4일에 길을 떠나서, 같은 달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全羅道 靈巖、務安、咸平、珍原、長城、同福、和順、綾城、南平、光山、潭陽、淳昌、昌平、玉果等官軍士, 八月十二日發程, 九月十八日到吉城 ; 전라도(全羅道)의 영암(靈巖)ㆍ무안(務安)ㆍ함평(咸平)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ㆍ동복(同福)ㆍ화순(和順)ㆍ능성(綾城)ㆍ남평(南平)ㆍ광산(光山)ㆍ담양(潭陽)ㆍ순창(淳昌)ㆍ창평(昌平)ㆍ옥과(玉果)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2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8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茂朱、雲峯、長水、鎭安、龍澤、錦山、珍山、高山、南原、任實、求禮、谷城等官軍士, 八月初九日發程, 九月十八日到吉城 ; 무주(茂朱)ㆍ운봉(雲峯)ㆍ장수(長水)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고산(高山)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구례(求禮)ㆍ곡성(谷城)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초 9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8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茂長、興德、古阜、全州、礪山、靈光、高敞、井邑、扶安、金堤、萬頃、沃溝、臨陂、咸悅、龍安、益山、泰仁、金溝等官軍士, 八月十四日發程, 九月十九日到吉城 ; 무장(茂長)ㆍ흥덕(興德)ㆍ고부(古阜)ㆍ전주(全州)ㆍ여산(礪山)ㆍ영광(靈光)ㆍ고창(高敞)ㆍ정읍(井邑)ㆍ부안(扶安)ㆍ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ㆍ임피(臨陂)ㆍ함열(咸悅)ㆍ용안(龍安)ㆍ익산(益山)ㆍ태인(泰仁)ㆍ금구(金溝)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4일에 길을 떠나서 9월 19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慶尙道 咸陽、山陰、丹城、安陰、晋州、居昌、陜川、三嘉、草溪、宜寧、知禮、咸安、咸昌、尙州、聞慶、昌原、漆原、靈山、昌寧、玄風、高靈、星州、開寧、金山、金海、善山、龍宮等官軍士, 八月十五日發程, 九月二十日到吉城 ; 경상도(慶尙道)의 함양(咸陽)ㆍ산음(山陰)ㆍ단성(丹城)ㆍ안음(安陰)ㆍ진주(晉州)ㆍ거창(居昌)ㆍ합천(陜川)ㆍ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의령(宜寧)ㆍ지례(知禮)ㆍ함안(咸安)ㆍ함창(咸昌)ㆍ상주(尙州)ㆍ문경(聞慶)ㆍ창원(昌原)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고령(高靈)ㆍ성주(星州)ㆍ개령(開寧)ㆍ금산(金山)ㆍ김해(金海)ㆍ선산(善山)ㆍ용궁(龍宮) 등 고을의 군사는 8월 15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0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慶州、興海、彦陽、淸河、寧海、永川、盈德、新寧、河陽、密陽、淸道、慶山、仁同、大丘等官軍士, 八月十七日發程, 九月二十一日到吉城 ; 경주(慶州)ㆍ흥해(興海)ㆍ언양(彦陽)ㆍ청하(淸河)ㆍ영해(寧海)ㆍ영천(永川)ㆍ영덕(盈德)ㆍ신녕(新寧)ㆍ하양(河陽)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인동(仁同)ㆍ대구(大丘) 등의 고을의 군사는 8월 17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安東、眞寶、靑松、豐基、榮川、奉化、禮安、義城、醴泉、義興、軍威、比安等官軍士, 八月十六日發程, 九月二十一日到吉城。: 안동(安東)ㆍ진보(眞寶)ㆍ청송(靑松)ㆍ풍기(豊基)ㆍ영천(榮川)ㆍ봉화(奉化)ㆍ예안(禮安)ㆍ의성(義城)ㆍ예천(醴泉)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 등 고을의 군사는 8월 16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永安道軍士發程日時, 則聽都元帥許琮節度。: 영안도(永安道) 군사의 길을 떠날 일시(日時)는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절도(節度)를 듣도록 하라. 噫! 兵旣出而有名, 師當直而爲壯, 執訊獲醜, 予一人豈欲逞憤於伊吾, 息馬休戈, 使邊氓庶幾按堵於朔野. :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사람이 어찌 〈이오(伊吾)〉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방 백성을 북방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 1597~1673)】집’ 제7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40수 : 행적을 기록하고 회포를 서술하여 북평사로 있는 박덕일, 길응에게 주다.(記 行 述 懷 贈 北 評 事 朴 德 一, 吉 應) 에서도,〈有 志 馳 伊 吾 : 이오(伊吾)에서 말 내달릴 뜻을 머금네.〉하였다.
➊ 동방(東方)정벌(征伐) : 동방정벌(東方征伐)이란 곧 대마도(對馬島) 토벌(討伐)을 말하는 것으로
첫 번째는, 1389년(高麗 昌王 1년) 2월 박위(朴葳)에게 전함(戰艦) 백여 척과 1만여 명의 군사(軍士)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征伐)하였다.
두 번째는, 1,396년 12월 3일 태조(太祖)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를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세 번째는, 세종(世宗) 1년인 1,419년 6월,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에 나섰다. 병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1,419년의 대마도(對馬島)토벌(討伐)은,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방정벌(東方征伐)이란 말은, 그 뜻대로, “동(東)쪽 땅을 토벌(討伐)했다”는 것이다. 고려(高麗) 때부터 3번의 토벌(討伐)이 있었는데, 이 모두를 말하기를,〈동방정벌(東方征伐)〉이라고 하였고, 세종(世宗) 때는 기해(己亥)년에 동(東)쪽을 정벌(征伐)했다고 하여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이마두(利瑪竇),1552~1610)’의 1,602년판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 당시에 이런 세밀한 지도를 어떻게 그렸을까? 불가사의(不可思議)다.
위의 두 가지 지도(地圖)를 보면서 대마도(對馬島)의 방위(方位)를 생각해 보자. 대마도(對馬島)가 어떻게 동방(東方)이 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서울인 한성부(漢城府) 또는 옛 구도(舊都) 개성부(開城府) 또는 동경(東京)이었다는 경주(慶州), 서경(西京)이었다는 평양(平壤), 그 어디에서 보아도 대마도(對馬島)는 남방(南方)이면 남방(南方)이지, 동방(東方)이 될 수 없다. 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의 방위개념(方位槪念)으로 보아도,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뚜렷하게 구분(區分)했었다.
위의 지도(地圖)는 21세기가 아닌 16세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하는데, 동방(東方)과 남방(南方)을 보자. 이러한 방위(方位)가 동방(東方)이라고 한다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방위(方位)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야만족(野蠻族)일 뿐이다. 그러나 남면(南面)은 무엇이고, 북면(北面)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당시(當時)의 선인(先人)들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정확(正確)하게 알고 있었다.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와 대마도(對馬島)는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과 대마도(對馬島)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➋ 계축년(癸丑年) 서방(西方)정벌(征伐) :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 이만주(李滿住)를 토벌(討伐)한 것을 말한다.
서방(西方)은 한성부(漢城府)의 서(西)쪽 방향(方向)을 말하는 것으로, 한성부(漢城府)에서 약 100리쯤 가면 강화도(江華島)와 바다(海)에 임(臨)한다. 그렇다면 여진족(女眞族) 이만주(李滿住)는 해적(海賊)이었다는 말일까?
건주위(建州衛)는 심양(瀋陽)이 그 중심(中心)이고, 반도(半島) 북방(北方) “만주(滿洲)”를 일컫는 말과 같다. 건주위(建州衛)는 명(明)나라 초부터 존재(存在)했고, 이곳은 후금(後金)이 선 곳이다.
홀라온【忽剌溫 : 홀온(忽溫)】: 계곡집(谿谷集)에서는 : 영북(嶺北)의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했는데, 홀온(忽溫)은 홀라온(忽剌溫)을 가리킨다.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던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어피달자(魚皮㺚子)라고도 한다.
올량합(兀良哈) : 오량해(烏粱海)이다. 가장 큰 부족(部族)인데, 여진족(女眞族)이다.
➠ 반도(半島) 압록강(鴨綠江) 이북(以北) 땅과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 땅이 서방(西方) 땅일까? 묻기조차 거북스러운 유치한 이야기다.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이지, 서방지대(西方地帶)가 될 수 없는 곳이다.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서방지대(西方地帶)라고 하는 것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광기(狂氣)’, 그 자체(自體)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고, 여진족(女眞族) 역시(亦是)도, 엣 고전(古典)에서 말한바와 같이 서방(西方) 땅에 있었다는 것을 무지(無知)한 현대(現代)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➌ 경진년(庚辰年) 정벌(征伐) : 모련위(毛憐衛) 야인(野人) 정벌을 말하는데, 모련위(毛憐衛)란, 명(明)나라가 여진(女眞)을 누르기 위하여 설치한 위(衛)로써, 1405년 여진의 올량합(兀良哈)이 명(明)나라의 초무(招撫)에 응하여 입조(入朝)하자 설치하였는데,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는 건주위(建州衛)에 있는 것과 두만강 밖에 있는 것으로 2분되었으며, 명나라와의 관계도 조공(朝貢)과 이반(離叛)을 되풀이하였다. 이곳의 여진족(女眞族)이 조선(朝鮮)을 자주 침범(侵犯)하자, 1460년(세조 6)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이를 치게 했는데, 이것을 경진(庚辰)정벌(征伐)이라고 한다.
위의 글 내용(內容) 역시(亦是), ➋와 같은 ‘서방(西方)정벌(征伐)’로써, 올량합(兀良哈)인 여진족(女眞族)을 토벌(討伐)한 것이다.
올량합(兀良哈)은 오량해(烏粱海)로, 영북(嶺北)【당노산맥(唐努山脈) 북(北)쪽으로 당록(唐麓)이라고도 한다.】에 살던 종족(種族)으로 이들이 바로 여진족(女眞族)인데, 이들은 외몽고(外蒙古) 서부(西部)와 금산(金山), 준갈이(準喝爾), 러시아(Russia) 땅에 살던 자(者)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자(者)들을 “반도(半島) 땅의 북(北)쪽에 있었다.”고 한다면…바로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만들어지게 된다.〉이게 바로 역사(歷史) 왜곡(歪曲)이요, 조작(造作)이다.
➍〈이오로(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푼다.〉 여기서 말하는 이오로(伊吾盧)는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하미【옥문관(玉門關)의 북(北)쪽에 있는, 합밀(哈密) 곧 이오(伊吾)릏 말한다.】를 말한다.
위의 여러 기록(記錄)들을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고, 사막(沙漠)을 지나 막북(漠北)까지도 정벌(征伐)과 토벌(討伐)을 했다는 것은 「이오로(伊吾盧)」 역시(亦是)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정벌(征伐)과 토벌(討伐) 영역(領域)에 포함(包含)되고도 남는 일이다.
〈소륵(疏勒)을 수비(守備)하고, 이오로(伊吾盧)를 정벌(征伐)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실(史實)이다. 축소(縮小)지향적(指向的)인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전매특허(專賣特許)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만의 특허(特許) 만료(滿了)일도 한 참 지났다고 보아진다.
좀 더 민족적(民族的)이고, 조선인(朝鮮人)의 후인(後人)들을 위한, 후손(後孫)들에 의한, 자주적(自主的)인 한국사(韓國史)가 필요(必要)할 때다.
2018년 05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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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테오 리치가 그렸다는 본문 속의 지도를 보면, 오늘날의 한국사 또는 동양사랄까.....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모습이다.
이건 당시에 마테로 리치가 그린 것이 아니고, 그의 이름을 차용한 옛 지도를 모방한 그림일 뿐이다.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지방은 고대로부터 朝鮮(조선 : 통칭) 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조선의 영토였다.
이는 소위 대륙측에서 말하는 정사(正史)라는 고전의 기록속에 분명 있는 말이다.
또한 정사외 또 다른 기록속에 또한 존재한다.
세계사는 조선사를 빼 놓고,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 얘기는 근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조선 영토에 대한 우리 카페의 주장에 대한 논거는 선인들이 기록해 놓은 고전에서 찾아내고 있는 거다.
위의 주장에 대한 논거(論據) 곧 대륙측 기록를 제시하려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조선사를 빼 놓고는 세계의 고대사를 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사 속에 조선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조선사속에 세계의 고대사가 있는 것을 제 책에서 증명하고 연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