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佛經)의 서문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본문을 서술하는 서문에서 경의 대의(大意)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말들이 있다.
일례로 <아함경>에서는 잘 듣고 사유하라는 의미로
“체청(諦聽) 선사(善思)”라는 말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불법을 잘 듣고 그 의미를 깊이 사유하라는 의미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란 말로
불법(佛法)은 해오(解悟)가 아닌 증오(證悟)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경> 제2품 선현계청품을 보면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이라 했다.
<선호념(善護念)>이란 구가 법을 청하는 서문에 나와 있다.
<금강경육조대사구결(金剛經六祖大師口訣)>에서는
이를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바르게 호념(護念) 하시고
바르게 부족하십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호념(護念)에 대한 별도 해설이 나와 있지 않다.
대개의 해설서는 이를 풀어서
「여래는 모든 보살이 늘 진여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신체에 이상이 없도록 잘 보살펴주시고
진여의 불도와 불법을 모든 보살에게 잘 부탁하여 맡기는 것이니….」
라는 식으로 풀어서 설명한 경우도 있다.
<선호념(善護念)>의 념(念)은 대승경전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살펴보자.
<선호념(善護念)은 글자 그대로만 풀이하면
자신의 마음을 잘 살핀다는 뜻이고,
<선부촉(善付囑)>은 잘 맡긴다, 위촉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善> 은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로
<잘한다> 등의 <잘>의 의미로 이는 곧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 또는 의지를 잘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일념(一念)을 시간적으로 보면 호흡 한번 하는 사이를 의미한다.
경전에 의하면 일념에는 팔만사천법문이 들어 있다고 한다.
념(念)은 4가지로 분류되는데 念身, 念受, 念心, 念法을 말한다.
신(身), 수(受), 심(心), 법(法)에 대한 법리가
념(念)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는 의미다.
이를 보면 佛法 공부에서 가장 어려움은
선호념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금강경>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의한
「云何降伏其心(운하항복기심)」 이 주 테마다.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수행법은 경전마다 다양하게 많지만
사념처(四念處)의 수행방법이 가장 많이 알려진 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이 사념(思念)을 구역(舊譯)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 했고
신역(新譯)에서는 사념주(四念住)라 했다.
사념처관(四念處觀)과 같은 의미다.
처(處)와 주(住)의 의미를 살펴보면 주(住)는 머물다,
집착한다는 의미이고, 처(處)는 경지, 경계를 의미한다.
처(處)는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경계는 마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념처(四念處)라는 것은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이다.
⓵신념처(身念處)는 부모에게 받은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觀)하는 것
즉 관신부정(觀身不淨)
⓶수념처(受念處)는 우리 마음에 락(樂)이라고 하는 음행(淫行),
자녀, 재물 등을 보고 낙(樂)이라고 하는 것은 참 낙(樂)이 아니고
모두 고락(苦樂)이라고 관하는 것 관수시고(觀受是苦)이고,
⓷심념처(心念處)는 우리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變化) 생멸(生滅)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
즉 관심무상(觀心無常)이고
⓸법념처(法念處)는 위의 셋을 제하고
다른 만물에 대하여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가 없으며
또 나에게 속한 모든 물건을 나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도
모두 일정한 소유자가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하는 것으로
즉 관법무아(觀法無我)을 말한다.
이 사념처관(四念處觀)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순서로 관하는 것을 별상념처관(別相念處觀)이라 하고,
총합(總合)하여 관하는 것을 총상념처관(總相念處觀)이라 한다.
선호념(善護念)의 염(念)을 대승의 교리와
사념처(四念處)와 연계하여 해석한다면
무상대도(無上大道)의 길로 나아가는 길은
곧 사념처(四念處)을 바르게 잘 수지(受持)하여라 하는 의미이며,
선부촉(善付屬)은 사념처의 수행은 무상대도의 길
곧 반야(般若)를 증취(證就) 하는 길이니
이 반야에 의지하여 구경(究竟)에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라는 의미로
이를 잘 수지하여 위촉한다는 의미를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般若)는 무엇인가?
반야(般若)는 범어로 프라즈나(prajna)이며,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말한다.
보통 말하는 판단 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 짓기 위하여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며,
달리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한다.
이 반야의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확립된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도 ‘ 빨리어‘panna’를 소리대로
적어 반야(般若)’라 했다.
반야의‘반(般)’은 접두어‘pan’을 음사한 것인데,
그 의미는 능동적으로 앞서간다는 것이고,
‘야(若)’는‘na’를 음사한 말로 해(慧) 즉 앎이라는 의미이다.
경전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주석을 단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작업이다.
경문을 해석하여 번역하는 것도 그렇고,
자귀(字句)를 번역하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해석하기 곤난한 것은
원문을 그대로 음사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반야> 라는 구가 바로 대표적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선종(禪宗)이 흥성할 때 학문이 뛰어난
한 재가(在家) 거사(居士)가
「사익경(思益經)」을 주해할 뜻이 있어
남양충(南陽忠) 국사를 만나러 갔다.
남양충국사는 “좋지요! 학문도 뛰어나니 경전을 주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나서 제자를 시켜 맑은 물 한 사발을 떠오게 하여
그 속에다 쌀 일곱 톨을 집어놓고 다시 사발 위에다
젓가락을 걸쳐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거사에게
“내가 지금 무얼 하려고 하는지 알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거사가 모른다고 하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뜻도 알지 못하면서 부처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자기 생각대로 번역하고 주해할 겁니까?” 라고 했다고 한다.
불교 경전을 공부할 때
「阿含十二 方等八 二十一年般若談 法華涅槃共八年 華嚴最初三七日」
이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암기하기 쉽게
가사로 만든 것으로 글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敎相)을 분류하여 해석하는 것(判釋)을 의미한다.
부처님이 설하신 아함경은 12년, 방등경은 8년,
법화 열반경은 각각 8년이 걸렸고,
화엄은 21일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야경을 설함에는 21년이 걸렸다.
<금강경>은 반야경에 속한다.
21년 동안 설하신 반야경은 한역(漢譯)된 경전만 해도 42종에 이르며
〈8천송반야경 八千頌般若經〉·〈2만5천송반야경 二萬五千頌般若經〉·
〈10만송반야경 十萬頌般若經〉이 있고,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경 金剛般若經〉·
〈반야심경 般若心經〉 등이 있다.
그만큼 부처님의 교리를 전하는 경전 중에서도
반야경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야(般若)라고 하는 이 지혜에는 3종류가 있다.
실상반야(實相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문자반야(文字般若)로 이를 삼종 반야라 부른다.
실상반야는 반야의 이체(理體)로서
본래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것,
즉 모든 허망한 상(相)을 떠난 반야의 참된 성품을 말한다.
관조반야는 실상(實相)을 관조하는 참된 지혜이며,
문자반야는 그 실상을 설명하는 글자로 된 반야를 뜻한다.
문자반야를 방편반야(方便般若)라고도 한다.
천태종에서는 삼종 반야를 공(空)‧가(假)‧중(中)과 연결시켜
공(空)은 관조반야로서 일체지(一切智)와 같고,
가(假)는 방편반야로서 도종지(道種智)와 같고,
중(中)은 실상반야로서 일체종지(一切種智)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삼종 반야는 법상종(法相宗)에 이르면
경계반야(境界般若)와 권속반야(眷屬般若)를 추가하여
오종 반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실상반야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진리이며,
관조반야를 통하여 체득되는 궁극이다.
이 다섯 종의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을 지닌 것이 금강반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회자하는 금강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이를 약칭하여 <금강경>으로 회자하고 있다.
구마라집은 중국의 요진(姚秦) 즉 후진(後秦) 시대에
요흥(姚興) 임금의 초청을 받고 서울인 장안에서 들어가
13년간 불경 300여 권을 번역한 삼장법사인데
그가 번역한 <금강경>을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의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내용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하여
독송하기에도 편하게 32품으로 각각 명칭을 달아 놓은 것이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 최대 목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한다.
이는 불도를 수행하는 보살은 위로는 불교의 지혜인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고통받는 다양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두 가지 이익,
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각각 대응된다.
금강경에서 말한 「선호념(善護念) 선부촉(善付屬)」의 의미를
대승불교의 최대 목표인 이것과 연계해 보면
<상구보리(上求菩提)>는 곧 선호념(善護念)으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은 선부촉(善付屬)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