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을 답사는 하는 중에 박진 장군의 묘가 보여 찾아 올라 갔다. 처음에는 박진 장군이 경상 좌병사 인줄 몰랐지만
사진 작업을 하던 중에 검색하여 보니 임진왜란 때의 인물로 많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 났다.
박진 장군이 언제 좌병사 되었는지 기록은 아래와 같다.
경상좌도 절도사 박진(朴晉---선조 26년 계사(1593) 1월 11일(병인)
위의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한창 일때 좌병사 임명되었다.
이때는 전쟁시기에 병사를 통제할 사람이 필요 하기에 무인의 집안이고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에
임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김해에 있는 김해김씨 말고 일본인 김해김씨의 시조인 사야가가 박진 장군을 만나고서 귀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력을 보면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 벼슬을 지냈다.
초기의 밀양성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영천성에서 의병 주도로 벌어진 영천성 전투를 지원하여 승전을 거두었고 이후 왜적 111명의 수급을 베어 왕에게 올렸으며,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 159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순천부사, 그 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냈다.
경상도에서 좌도 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는 것이 특이한 이력이고, 특히 경주성 2차 2차전투의 승리는 임진왜란 전생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금의 경주성은 일제강점기때 허물어져 길이 만들어 졌지만 아마 경주성 전투에서 패한 쪽바리 놈들이 열받아서 빨리 무너뜨린
것으로도 생각된다.
박진 장군의 임진왜란 때의 활약을 보면 아래와 같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우병사 학봉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진주(晉州)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부사 박진은 군(郡) 내 병사 3백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 나갔다.
당시 성을 빠져 나온 경상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의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박진의 군사는 제1선에, 이각의 병사는 제2선에 배치했다
위의 기록외에 많은 것이 있지만 애석한 것은 말년이 허무하게 돌아 가셨다.
1597년 1월 원균이 이순신의 군관을 내쫓은 것을 보고하였다.
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17]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명나라 장수에게 두들겨 맞고 난뒤에 조정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조선의 장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하였으니 조선 정부의 무능함을 보고 있다..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다.
국가가 힘이 없으니 나라를 지킨 장군이 다른 나라 장군에서 맞아서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사후에 벼슬이 무슨 소용이 있느나 이 못난 선조임금아 너도 두들겨 맞아 죽어 봐라``~~
아쉬운 마음과 충정이 살아 있는 박진 장군의 묘를 두고 다시 정발 장군 묘로 간다.
경상좌도 병마사 박진 장군이여 편히 쉬소서``
밀교문화연구원
벽라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