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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선생은 올해 스승의 날에는 각별한 꼬마 제자 명호로부터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생화가 조화보다 비싸고 더 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꼬마제자가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작은 손을 놀려 애써 만들었을 걸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생화는 며칠 있으면 시들어 버리지만,
종이로 만든 조화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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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선생은 가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두 해 전에 모 단체의 주선으로 청각장애 아동 명호를 만났다.
흔히들 한 가지 신체적 장애가 있으면
다른 신체적 기능뿐만 아니라 지적, 정서적 면도 모두 열등하리리라고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명호가 하나의 신체장애가 있을 뿐 머리 회전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지능검사 등을 통해 명호의 뛰어난 자질을 파악하게 한 후
주어진 조건에서 가능한 나름대로의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제도권 교육에 회의를 느끼는 부모들이 관심 갖는 대안 교육은 책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각종 체험활동이다.
이를 흉내 내어 D선생은 명호와 기본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나름대로 가까이 있는 도서관과 다양한 형태의 박물관을 찾아 자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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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도서관이라고 하면 각종 책을 보관하고 대출받아 읽는 곳, 또는 시험공부를 목표를 한 독서실,
값은 싸지만 한결같게 맛없는 구내식당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즘 도서관은 진화를 거듭하여 개가식 서가이어서 마음대로 책을 고르며 빼어 볼 수 있는 건 기본이고,
문서 작업하거나 정보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와 각종 영상 자료를 갖춘 디지털 열람실,
각종 문화강좌와 정기적인 영화상영 등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대부분의 도서관 1층에는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아예 이를 특화시킨 어린이 도서관이 동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개의 방을 만들어 엄마가 책을 읽어 줄 수도 있고, 때로는 잠재울 수도 있다.
놀이터를 연상케 밝은 색상의 열람실에서 아이들은 다양하게 배치된 책상에 앉아 읽기도 하지만,
책장에 기대거나 바닥에 엎드리거나 눕는 등 갖가지 자세를 취하면서도
눈은 책에 고정시킨 채 몰두하고 있는 모습들이 그렇게 예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선호하는 만화가 주류인데, 관련 전문가들의 감수까지 거쳐 그 내용들이 충실하였고,
삽화와 그림도 호기심을 끌기도 충분한 양질의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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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체험의 꽃’이라고 하는 박물관도 그렇다.
개인적인 수집을 바탕으로 다양한 박물관들이 곳곳이 건립되었는데,
서울에는 170개, 경기도에는 114곳 등 전국적으로는 1,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종류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고 단순한 관람 위주에서 벗어난 체험 활동도 개발되어 있더라.
틀에 박힌 교과과목에 식상한 젊은 부모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독서모임과 더불어 견학활동이 활발한 건 바람직한 일이다.
명호는 자신의 세계에는 엄마 아빠만 들어 있을 뿐 그 누구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열어 D선생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몰라요’, ‘못해요’를 반복하며 어디를 데려 가고 한쪽 구석에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매사에 지나치게 당당하고 자신이 넘쳐 겁이 없음을 오히려 걱정해야 될 입장이 되어 버렸다.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장봉도 갯벌 체험, 과천 국립과학관, 항공우주 박물관,
행신어린이도서관 등 반복하여 자주 가는 곳도 생겨났다.
워낙 화목한 가정이라 부모가 아이에게 담뿍 준 관심과 사랑은 삶의 고비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될 것이고,
독서를 생활화하여 목표의식을 고취하고 방향을 설정하였으니,
청소년기에 성장통을 겪겠지만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어려움을 딛고 성큼 일어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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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니까 주변에서는 D선생을 ‘1004’라고도 한다지만, 막상 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D선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퇴직으로 아직 5년은 더 할 수 있는데 억울하다는 자괴감으로 가득했었다.
글쓰기 모임, 공공단체 봉사활동 등을 통해 모색하였으나,
이도 생각만큼 순수하지 않더라는 실망감이 교차하여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다가
가까운 친구를 만나면 한없이 이야기를 쏟아 내는 등 밸런스의 붕괴를 스스로 인지하기도 했다.
어차피 이제는 고정된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도서관, 박물관, 등산, 근교 여행을 즐기며 만족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고 계획 짜서 함께 즐길 수 있어 좋다며
오히려 꼬마 친구와의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더라고도 했다.
책 읽고 글쓰기를 지도하면서 꾀피우는 꼬마친구에게 시위 삼아 ‘사랑의 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더니
“에이, 선생님은 날 사랑하잖아요. 안 때릴 걸 뭐.” 하면서 만지작거리더라고 하면서,
“이제는 컸다고 아예 내 머리 위에서 논다.”고 말하는 내내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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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종교를 주제로 사람살이의 갖가지 단상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쓴 책『이브라힘 할아버지와 코란에 핀 꽃』은
10대 초반의 외톨이 유대인 소년 모모가 구멍가게 주인 이브라힘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세상살이의 지혜를 터득해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발전적으로 변화되는 소년과 더불어
무력하고 외롭던 할아버지의 생활에도 서서히 윤기가 도는 장면도 곳곳에 그려 넣고 있다.
오래전에 읽은 이 책 내용이 떠오른 걸 무슨 이유일까?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날들을 함께 한 꼬마친구와의 인연을 각별하게 여긴다.
아마도 명호가 만들어 선물한 종이 카네이션을 어느 꽃다발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며
오랫동안 D선생의 책상 한 자리를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201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