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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안식일교회 교인분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답변하신 내용인데요,
아래 사실이 맞는 것인지요? 그분도 아직은 교회역사에 관해 부분적으로 알고
계신 것 같고 출교 문제에 관해서 더 확실한 자료를 찾고 계신 중이긴 합니다.
[1914년 당시 세계 재림교인은 140000명 정도 였는데요 대부분이 미국에 잇었고
유럽지역은 선교된지도 얼마 안되엇고 신자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상태였는데
전쟁에 입대한 숫자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
소수였겠지요 문제가 있었다면 그 소수만을 출교하지 유럽 전체신자 4000명을 왜
모두 출교 하겠습니까 . 개혁파의 과장된 주장이지요
그일로 당시 유럽 지회장 이던 콘라디 목사를 잘못된 행정을 하였다고 해임 시켰으며
당사자 들에게 사과하고 돌아 오기를 호소 하였다고 합니다
그중에 많은분들이 돌아 왔는데 소수의 무리가 끝내 거절하고 조직을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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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잘 질문하셨습니다^^
많은 sda성도님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독일지역 국한문제 정도로 생각해 버리지요
많은분들이 돌아왔다 ? 그것은 거짓말이고요.
그사건은 교회가 하나님께 배도한 사건이지,,무슨 군 징집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위탁받은 안식일을 세상앞에서 (사단앞에서)짓밟고 포기한 배교 사건입니다
미국대총회도 그것을 알았고 부 대총회장 콘라디에게 일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자료가 있지요
대총회도 결국 관여된 셈이지요
고로 하나님은 1888기별이후 자기 백성들을 율법으로 시험한 최후사건입니다
1)1888년에는 기별로 시험했고
2)1914년에는 이제는 위탁한 안식일율법을 얼마나 잘 고수하는가? 믿음을
시험한 사건이라봅니다
(이런 것은 영적으로 분별하여야 합니다)
1888년당시 의의 기별의 빛을 본 sda교회는 거절하므로서
흔들림이 일어날 당위성과 여건은 조성되었는데..
(빛의 배도는 항상 그후 내부 분리를 초래함)
그러나 그때 당장 sda에서 촛대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참고 인내 하셨으며
고로 그때 무슨 개혁운동이 생긴것이 아니고
그 최종분리로는 둘째시험이 있었던 1914년에 전쟁을 통하여
본교단이 소수 안식일 개혁을 외치는 무리를 교회밖으로 밀어낸것입니다
개혁운동교회는 별도의 개혁운동교인이 만들어 낸것이 아니라
교단이 밀어내므로 저절로 생긴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한교회안에서 1)핍박을 감수하면서 진리를 높이려는자와,
2)진리보다는 핍박이 두려워 교회 행정을 따르는 자들과의;
두무리로 분리된 사건입니다
고로 그때 그무리 즉 개혁운동의 선구자들은
소위 8째교회가 아니라 일곱째안의 남은무리가 되는 이치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이후 쫓겨난 그소수 sda무리가 전쟁이 끝나고
감옥에서 풀려나와서,,교회에 가보니 자기들은 모두 출교를 당한것을
알고 대총회장과 면담하고 면담을 두 차례이상 했으나
최종적으로 개인은 잘못을 일부 인정했으나
교회의 배도사건은 교단 공개적으로 인정할수 없다!고하고
전쟁참가도 양심의 자유주장과
당시 입장에서 당연성이다?고 주장하게 되므로 ,,,
결국 우리가 교회적으로 회개하고 다시 연합하자는
소수 개혁무리의 요구를 (전체무리앞에서 교회체면 때문에)
반영하지않고 듣지 않으려고하고 대총회강당 입구에서
17명 개혁무리 대표자들을 문전박대 하므로
(최종 면담 불가 장소:1922년 샌프란시스코 대총회 강당)
어쩔수 없이 그 소수 무리가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려고
쫓겨난 자들을 유럽전체에서 수소문하고
모임을 하게된 것이 개혁운동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모임이 된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늦게사 안 많은 안식일교인들도 전세계에서 동조 협력하여
이제는 교단이 되었음)
당시 이들은 교단에 할말이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사58;1)(계18:2)
이렇게 해서 드디어 이땅에 일곱째교회시대의 남은무리의
실상이 나타난셈입니다
그들이 오늘날 저희 개혁운동 ims 교회의 선구자들입니다
순전히 배운대로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하다가,,,즉 전쟁 참가안한다고
자기교회에서 쫓겨난 무리들이지요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것은 무슨 시중의 인간적 그런 분파운동이 아니라
성경과 예언의신에 나타난
모든 남은무리의 공통성이고 예언의 성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상하게, 그런식으로 진리의 주축무리를
골라내시고 셋째천사기별이 계속 전진하도록 섭리하신것입니다
(성경주석 4권1151)
이 마지막 시대에 불의가 범람하여 많은사람의 사랑이 식어질때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할 한 백성을 소유하실것인데
그들은 불의에대한 견책자로 나타날것이다'
이것이 이시대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이유없는 일종의 분파가 아니라, 더욱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섭리로 <계18장천사를 대표하는 무리>가 드디어
탄생한것인데,,,, 이것은 기성안식일교회는 깨닫지 못하고
막연히 일개 개혁분파?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시 sda도 지성소에서 1888년에 하늘 기별을 거절하므로 교회내의 흔들림의
계기가 왔었는데 그 흔들림이 결정적으로 분리로 나타난 사건은 1914년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전쟁을 통하여 교회의 믿음을 시험한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총을 들겠다고 교단이 굴복할때
전부 징집거부하면 사단이 승리했겠지요?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없을까요?
유럽전체에서 약4,000명이 죽음을 무릎쓰고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대로
율법을 높였던것입니다
당시 안식일교신문에 약2%가 출교 당했다고 했고
약4,000명이 되는 셈입니다
전쟁은 독일을 주축으로 시작하여 유럽전체에서 일어난전쟁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당시 전세계 교인수가 약144,000명이였습니다
유럽에 교인수는 약33,000명이상이였습니다
(자서전p.307)
"1914년에는 유럽의 신자 수가 3만 3천을 상회했는데, 이 숫자는 그가 유럽에
체류할 당시 전세계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 신도의 총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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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해서 섭리적으로 또 예언대로
교회가 분리되고 두무리가 된 이치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높이는 무리에게 촛대가 자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수무리에게 촛대를 넘기는 것이지요
그런 교회 최종 시험사건이 1914년이 된것입니다
교회행정이 세상정부에 굴복하면 끝난것 아닙니까?
그것이 보통 일인가요?
초대교회 산헤드린회원 무리가 잘못하니 어떻게 되든가요?
스테반 죽인것이 그저 어느 산헤드린 한명 개인의 죄인데
왜 그것가지고 유대인전체 490년 은혜시기 끝으로 잡을까요?
너무하지 않을까요/
전번에 만난 유대교인이 그런말을 저에게 하더군요
전체 유대교의 죄가 아니다 라고 하더군요
역시 마찬가지로
개혁운동의 넷째천사 기별운동을
어떤분은 그저 독일교회 행정절차 잘못정도로 해서 태어난 정도로
보는 식입니다
항상 큰무리의 교회는 암흑에 빠지고 빛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로 1888년 배도로,,,, 교회는 분리(흔들림)를 초래하게 되고
그 결정적 분리의 계기는 1914년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운동은 그런영향의 결과로 탄생 된것입니다
교회의 앞길에 대해 화잇선지자는
많은 힌트를 주시고 경고와 호소는 누차 말씀 하셨고요
1)1895년- 촛대는 옮기어졌고 빛은 꺼졌다. (RH1895, 6, 16)
2)개혁운동 탄생 불가피했다(사건들47)
3)모교회는 진노의 첫째대상 (겔9:5-8)
4)명목상의 재림신도들에게서 나오라“(초기261)
5)교회안에 분열이 있을것(2기별113)
6)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함(마9;17)
7)세째천사와 협력하는 그천사의 지도하에 사업이 전진함(tm300)
8)다른사람이 그기별을 일으킴을 받았다(쟁투458)
9) 개혁운동은 마지막까지 계속될것(살아353)
등등 너무 많아 다 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1844년당시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져보면 미국 어느구석의 포크랜드지방의 개인 윌리암밀러가 외치는
재림기별에 반대했다고 종교개혁자들이 많았던 개신교전체가 죄가 되고
촛대를 갑자기 옮겼다면
하나님은 너무 하시지 않았나요?
지금도 개신교는 1844년 그때 자기들의 촛대가
안식일교회로 옮겼다는 것을 믿는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단시기파의 운동사건으로 볼 정도이지요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합니다
고로 각자 깨달음이 다르므로 믿음도 다르게 될것입니다
안식일교안에서 목회자들에게 개혁운동이 맞는가? 물어보고 아무리 배워도
해답은 똑같을 것입니다
장로교에가서 안식교가 진리교회인가? 물어봐도 다 똑같은 대답일것입니다
그분들도 모르니 그곳에 그대로 있는것 아닙니까..
그들에게 묻는 자체가 잘못된것이지요
**
예를들어 같은 성경을 봐도 한사람은 장로교에 있고
한사람은 안식일교회로 가고 그런것입니다
1)1888년에는 기별로 시험했고 -(교회가 실패함)
2)또 그후 1914년에는 세상앞에서 위탁한 안식일로
시험했지만-- (스테반처럼 죽이려거나 성도들 쫓아냄(약4,000명)-( 또 교회가 실패함)
***
1888년에 진리가 거절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인내하시고
그후 1914년에는 제차 교회를 안식일로 시험한것입니다
고대 유대인교회도 동일한 시험을 받고 촛대가 뺏겼지요
1914년당시 신문을 참고하세요
(퀠른신문, 1915. 9. 21.)
“전쟁이 돌발한 뒤 재림교인들 사이에서는 분열이 있었다. 대다수는 전쟁동안은
원칙을 무효로 하길 원했던 한편 나머지는 전쟁의 시기에도 안식일의 신성함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원래의 믿음의 정당성을 선포한자들을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
( 재림교회지(Christliche Hausfreund), 1915. 9)
“그리스도인은 한손엔 정부의 칼을 그리고 다른 손엔 성령의 검을 동시에 들 수 없다.
오직 배교의 회중이나 또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원칙에서 벗어나 정부의 권세에
굴복한 자들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원칙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성도에게 주어진 믿음을 위해 분투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며
여섯째 계명에 따라 그의 동료 인간을 죽이지 못한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라고 말씀하시며 칼을 치우라는 예수의 명령에
복종한다. 확고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거슬러 행동하여 영원한
구원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복음을 위해 죽기를 택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
(대총회 회장, A. G. 다니엘스, 프리덴사우에서, 1920. 7, 청문회 의사록, 33-38).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이 주제는 미국에서 철저히 연구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 스스로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각 시민이 정부 앞에서 자신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입장을 취하도록
허락해야한다. 우리는 정부 앞에서 우리의 입장에 대해 어떤 정해진 제한과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게 해야 한다.
미국의 형제들은 유럽의 형제들과 같은 절제 있고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나라의 형제들과 같은 방책을 따랐다.”**
- 독일 재림교 잡지(Zionswaechter, 함부르크), 1916. 3. 6 참조
“Curierul Misionar Bucuresti” 3호, 1916(루마니아). 이 결의는 승인되었으며
독일의 모든 합회에서 공표되었다)“남부 독일합회의 대표자들은 전쟁의 때 군복무에
대해 사업을 맡은 지도부의 관점과 동의한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그것을 정부의 명령에
따르는 시민의 의무로 간주한다. 베드로전서(2 : 13, 14)와 로마서(13 : 4, 5)에서
언급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에 따라 정부는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총회 위원회 또한 이 관점을 숙고하였고 이 문제에 관한
1915년 11월의 총회중 유럽에서 지도를 맡고 있는 형제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주하였으며 그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세계의 여러 국가에 있는 형제들은
각기 법률상의 결정을 따르는 데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다.”
(L,R 콘라디, "시온의 파수꾼" 1914.년 11월18일 )
"최고의 권위로부터 지도를 받은 후에 유럽에 있는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독일 조간신문- 퀘른리히 제이팅>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재림신자들 가운데 분리가
생기게 되었다 .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교인들중
다수는 필요하다면 강제라도 ,기본적인 가르침들을 곁으로
버려두기를 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토요일(안식일)의 거룩성을 이런 비상시에
지켜야 할까고 질문하였다
반대하는 부류의 사람은 마침내 그들의 믿음의 기본원칙들을
고수하는 자들의 단체들로부터 불화를 일으켰다 "
*************
안식일을 포기하고 군대가지않는다고 그렇게 배워왔던 신실한 성도들을 자신의 교회가
내쫓았으니 이사건이 어찌 보통일입니까?
이것은 1888년기별을 거절한 교회의 믿음이 드디어 세상밖으로도 드러낸 사건입니다
1888년기별을 거절한 교회의 열매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후 복음을 전하는 성도마저 (스테반을)
잡아 죽였던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은혜기간이 드디어 끝난것 처럼 역시 영적
유대인인 기성안식일교단의 운명도 드디어 1914년의 사건으로 진리교회의 촛대가
옮겨진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1기별386)
"남은 교회는 유대인들이 경험한 바와 같은 흡사한 경험을 치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1차 세계대전당시 기성SDA는 안식일을 포기한다는 공문을 3번이나 정부에 발송하고
징집을 반대하는 신실한 자기 성도들을 출교하였던 당시의 전세계 신도수는
약 144,000명 정도이였을때의 사건입니다
그당시 사건이 난 유럽은 신도수 약 33,000명정도로서 매우 큰 비중의 입장일때 였다는 것을
성도님들은 아셔야합니다.
지금은 벌겻아닌숫자이지만
그당시는 144,000명에서 4,000명 비율은 크지요
예를들어 한국 안식일교회가 현재 전체신도수 약15만명입니다
그중에 약4,000명을 출교시킨다고 생각해 보세요
현재 부산의 안식일교회 전체 신도수가 약10,000명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약50%를 출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현재 안식일교회 대구 교인들이 약5,000명정도 인줄압니다
그 도시 전체 교인수를, 교단이 성도들을 모두 출교하여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보통 사건이 될까요?
당시 그 배도를 주관한분은 당시 대총회 부대회장이고 유럽지회장이던 ,,
콘라디 목사였습니다
콘라디 개인이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대총회와 일부 상의 되었고 유럽지회장과임원들과도 서로 상의한 사건이지요
콘라디목사가 그이후 교회를 나갔다고 하더라도
당시 그사건은 그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교단이름으로 자행하고
부대총회장 인 자신과 유럽 목회자 임원들이 성도들에게 자행한 것입니다
고로 교단의 죄인것입니다
당시 독일뿐만아니라 유럽전체의 sda 지도자및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전쟁에 참가하라고 지시하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당시 독일에만도 전쟁에 참가하지않을려는 개혁자들이 2500명이였습니다
유럽전체는 약4,000명이고요
징집에 참가하지않으려는 자들은 교회에서도 출교당했고
고발당하여 정부에 잡혀가서 10명중 한명꼴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기 때문에 5명중 1명꼴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드디어 2명중 1명꼴로 사형을 당하다가 전쟁끝난후 살아 남은자들은
병신이 된사람도 있었고 풀려났으며 많은 경우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부인들이 진리를 전했지요
즉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1888년에 주어진 의의기별의 목적이였습니다
이엄청난 순교의 기록은
오직 역사와 하늘에 기록한 기록책에 있을뿐입니다
sda 교단의 과오는 향후 하늘책이 증거할것이며 그러한 율법 포기의 위기때에
율법을 위한 개혁사업이 진행될때마다 사단은 광분하여
그순수한 개혁사업을 광신주의로 몰거나 인간적 분파 개혁으로 몰아 붙이기 위해
오늘날까지 일해 왔음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튼 1914년당시 무슨 개혁운동교회가 그때부터 있는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안식일교회안에서 진리선택문제로 분리가 일어나, 두무리가 된셈입니다
이것을 깊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고로 참된 개혁운동교회는 인간의 힘으로 분파하고 그렇게 생긴 교회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당시의 교회의 기본원칙은 무엇이였는가?
아래 화잇여사의 글에서 이미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1증언 p.361)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
그리고
192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총회장에 출교당한 개혁운동 대표자들을 보냈었는데
당시 대총회장 다니엘스는 출교당한 개혁운동무리들의 입장을 대표자 회중앞에
내 놓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절당하므로서 고로 4년동안 찾아가고 우리의 의무와 할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분명한 노선으로 복음사업을 이행하며 표준을 높이고,
우리들이야말로,세째천사기별 의 곧은진리를 전하기위해 따로 조직을 하는것외에
또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이후 개혁운동이 세천사기별대로 그대로 믿는 조직이 드디어
이땅에 저절로 세워지게 된것입니다
읽어주신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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