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준 孫昌俊(1899 ~ 미상)】 " 27결사대 대원 을사5적 및 정미7적 처단시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출신이다. 1920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22세인 것으로 보아 1899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만주로 이주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도구(三道溝) 대사탄(大沙灘)에 거주하였다. 이곳에서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건너와 이상룡(李相龍)·이회영(李會榮) 등과 독립군기지 개척에 노력한 이탁(李鐸)을 만났다. 이후 이탁이 주도하여 결성한 ‘27결사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27결사대’는 이탁이 의열투쟁을 목표로 1919년 초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조직이었다. 설립 당시 이탁과 안경식(安景植)·주병웅(朱秉雄)·김용우(金容友)·이종욱(李鍾郁)·이해삼(李海三)·차병제(車秉濟)·박기한(朴基寒)·이인식(李仁植)·박기제(朴基濟)·박진태(朴鎭台) 등 27명이 만들었다 하여 이런 명칭이 붙여졌다. 결사대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종 국장일에 의거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의거 목표는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이완용(李完用)·임선준(任善準)·고영희(高永喜)·이병무(李秉武)·조중응(趙重應)·이재곤(李載崐)·송병준(宋秉畯) 등 을사5적, 정미7적에 드는 매국노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3개조로 나뉜 결사대의 일원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19년 2월 24일 만주를 출발하여 26일 새벽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은 같은 해 3월 3일 고종 국장 행렬을 따르는 매국노들을 권총으로 저격해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국장이 끝난 3월 15일에야 권총 6정과 수백발의 탄환을 입수했기 때문에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동료 결사대원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차병제와 함께 3월 31일 효자동 김중환(金重煥), 4월 15일 무교동 박홍일(朴泓鎰), 4월 20일 인사동 한봉취(韓鳳翠) 등 부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군자금 620원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이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어 5월 5일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0년 8월 25일 예심을 마친 후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 해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살인 예비죄, 강도죄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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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준 재판 보도(『동아일보』 1921. 3. 4)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