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생긴 씨앗 하나
文 熙 鳳
대파를 심어 놓은 한 구석에 호박 싹 두 개가 나란히 솟아올랐었다. 작년의 일이다. 그냥 뽑아버리기도 아깝고 하여 자라는 줄기를 가장자리로 뻗도록 도와주었다. 작은 뽕나무로 올라가도록 방향을 틀어주었다.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았어도 잘 자랐다. 신경을 써서 심은 호박보다 이 호박들에게서 많은 수확을 했다. 예상치 않은 소득을 올린 셈이다.
그렇다. 어느 샌가 저절로 주머니가 터져서 씨알을 땅속에 묻은 못 생긴 씨앗 하나가 거송을 만들어낸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했다. 온 세상을 간질이는 달콤한 소리들도 선산을 지키는 소나무 곁에서 숨바꼭질하면서 놀고 있다. 기어이 숨어 지내던 꽃씨들을 불러낸다. 마지막엔 흙으로 돌아가면서도 자상함을 연출한다. 보잘 것없는 것이라 가벼이 여기던 것들이 크게 소용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라도 모으면 큰 자산이 된다. 작은 것들은 조금씩 찾아온다. 일원짜리가 열 개 모이면 십원이 되고, 십원짜리가 열 개 모이면 백원이 되는 이치와 같다. ‘일원짜리 그깟 것 뭣에 쓸꼬?’ 하는 생각은 버릴 일이다.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은 로또 1등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우매한 일이다. 돈도 땀 흘려 벌어야 그 소중한 가치를 안다.
배 고픈 시절이 있었다. 보릿고개에 허기진 배를 안고 아이들은 깜부기를 빼들고 입이 새까맣도록 빨았고, 논두렁 잔디밭에 막 올라오는 삘기를 뽑아 단맛을 즐기기도 했다.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나에게 크게 소용될 줄이야.
깊숙하게 박힌 작은 구멍도 바람맛을 느낄 수 있고, 시간 흐른 뒤 그곳에도 햇볕 들 날 있는 법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고,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다. 울음 바다를 이루던 풀벌레조차 깊은 잠에 들었는가 고적하기 그지없는 시각이다. 이 시각에도 못 생긴 씨앗 하나 큰 일을 위해 잠을 설친다.
청명한 날에만 꽃이 피는 건 아니다. 그 씨앗 하나가 녹색이다가 초록이다가 황금색으로 바꾸어 놓는다. 서둘지 말라 이른다. 나도 처음에는 바람에 날려온 개망초 작은 씨앗이었지 않은가. 꽃은 허구가 없다. 잡초는 쉬 무성하지만 자학하지는 않는다. 길가의 개나리가 노란 꽃잎을 활짝 열어 봄을 알린다. 나에게도 그런 봄이 있었다. 가슴속에 희망이라는 푯말 하나씩 박아놓고 사니 호사스런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는 목화송이처럼 행복했다. 쇠똥구리가 지구를 굴린다. 그 조그만 쇠똥구리가 엉청난 크기의 지구를 굴린다. 별 하나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씨앗 하나 심었다. 숲길에서 마주친 물푸레나무가 반갑게 인사한다. 허공에 조금씩 초록꿈이 자라기 시작했다. 온 산을 뒤덮는 거송을 만드는 것도 처음에는 바람에 휘날려 여기저기를 떠돌던 작고 못 생긴 씨앗 하나였다. 왕실에 진상되었다는 공주 미나리는 어땠는가? 수줍어 수줍어 동경으로 청춘을 물들이는 진달래의 탄생은 어떠했는가?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바위가 뚫리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오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과 끊임없는 노력이 함께 했다. 희망을 마시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끝없는 망망대해의 처음은 이름 없는 계곡의 돌 틈에서 생겨난 작고 힘없는 물줄기였다.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세상의 모든 시작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 작고 하찮은 것들로 인해 모든 위대한 것들이 탄생한다.
박제 되어 있는 새는 날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오늘도 유리창 밖만 내다보고 있지만 보잘것없는 것 같아 오랫동안 모른 척 했었는데 동양란이 홀로 자라 지란처럼 꽃대 올려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 하찮은 것들이지만 사랑을 불어넣어주니 한라산 소나무와 함께 살까 설악산 참나무와 함께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땅속에 있다가 겨우 삼일 남짓 생을 구가하다가 마치는 매미가 들려주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애처롭지만 못 생긴 씨앗 하나가 보여주는 삶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생명을 잉태한 3월의 봄은 만삭이다. 땅 위에 살짝 모습 보여주는 푸른 생명들, 언젠가는 큰일 해낼 꿈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단다. 그로 인해 사월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야무진 씨알로 태어나 기름진 땅에 뿌려져 좋은 일기 속에 자라는 영광을 얻는다면야 더 바랄 게 있을까마는 평생을 들국화처럼 살다간 민초들의 삶은 위대하고 존경스럽다.
사람의 손은 거의 직선을 만들지만 자연의 손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