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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의 믿음(눅7:1-10)-2020.2.23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감동 시대입니다. 사업이나 장사를 성공하려면 고객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감동은 사람을 움직이고 소비자를 움직이는 최고의 마케팅입니다. 그래서 기업마다 감동으로 승부합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에 약합니다. 감동은 때와 장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에게나 다 통합니다. 감동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없습니다. 사람은 감동으로 자기 존재감을 확고히 하고, 기대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감동은 부드러우나 그 파워는 엄청납니다.
때문에 감동은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요즘 TV프로그램에 음악에 관한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시청자들은 노래에 열광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저는 볼 때마다 세상 노래를 들으면서도 저렇게 감동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양하며 저런 감동을 받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보통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감동시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기는 감동을 잘 받으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에 인색합니다.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은 잘 감동시키는 데 반하여 자기 스스로 감동받는 것에 인색합니다.
사람은 감동을 잘 주고 잘 받아야 합니다. 감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감동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킨 최고의 선물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를 각 방향에서 감동케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감동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동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연출하는 것은 절대 위험합니다. 때로 연출된 감동도 일시적인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생명력이 없습니다. 또한 거짓된 감동은 영혼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진정한 감동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런 감동은 영혼을 소생하는 힘이 됩니다. 감동도 전염됩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영적인 감동에 민감해야 합니다. 주님은 감동에 민감하셨습니다. 주님은 작은 행위나 믿음에도 큰 감동을 받으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받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작은 언행에도 큰 감동을 받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에 감동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성도들의 작은 배려와 관심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누가 묻지도 않지만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한 송이의 꽃을 가지고도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어떤 이는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작은 감동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짐을 벗고 상처를 치유 받습니다. 대수롭지 않는 웃음이나 친절, 칭찬이나 포옹, 눈물에도 격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감동에 목말라 합니다. 어쩌면 감동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감동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군대 장교인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케 한 이야기입니다. 감동하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 대단한 감동입니다.
(1) 사람은 누구나 감동과 감정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이 있고, 감동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동과 감정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감동은 각 사람이 소유한 감정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청결제요, 순환시켜주는 촉매제입니다. 그래서 감동은 객관적인 성향이 강하고, 감정은 주관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문제는 사람에 따라 감동에 민감한 자가 있고, 감정에 민감한 자가 있습니다.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감동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감정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감정이 무조건 나쁘다는 부정적인 편견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좋은 감정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동은 비교적 기복이 없고 일관성이 있는 반면에 감정은 기복이 크고 변화가 무쌍하여 일관성이 없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보다는 감동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안정적이며 매력적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감동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동으로 일하는 것과 감정으로 일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행심사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의 기준에서 보면, 감동은 영적인 힘이요, 감정은 자기 주관적인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감동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성령의 감동, 말씀의 감동, 기도의 감동, 찬양의 감동, 설교의 감동, 혹은 예배의 감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사실 믿음생활은 감동생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동을 잘 받고, 하나님을 잘 감동시키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감동을 잘 받고 잘 주는 것도 좋은 사람이지요.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는 감동모드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감동 지수가 높은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 카네기공대에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추적한 결과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불과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85%는 인간관계였다는 통계입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좋은 인간관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감동에서 나옵니다. 감정은 힘이 없지만, 감동은 사람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에너지가 나옵니다. 감정은 일방통행이나 감동은 쌍방통행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감정으로 하지 말고 감동으로 해야 합니다.
특히 주의 일은 성령의 감동으로 해야 합니다. 감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좌우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주변 환경이나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변화가 무쌍합니다.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사람의 감정은 럭비공과 같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미안하지만 주의 일군도 감정일군이 있고, 감동일군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일군은 주로 입으로 일을 하고, 감동일군은 마음으로 일합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감동모드를 확장하고, 감동의 볼륨을 높이며, 감동의 코드를 극대화시켜야 합니다.
(2) 주님의 감동을 받은 자가 주님을 감동케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먼저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먼저 주님을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감동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시다니요!!!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선물하신 최고의 감동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복음으로 감동시키셨고, 복음으로 나를 감동케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보다 더 큰 감동은 없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복음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감동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복음의 감동만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감동은 복음을 영접하는데 가장 필요한 관문이요, 필수적인 은혜입니다. 감동을 받아야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복음의 감동을 받은 자가 모두 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인 아닐지라도 복음의 감동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절대 복음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려면 먼저 복음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의 감동은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하며,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요, 복음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이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물론 복음의 전체보다는 부분적인 것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때문에 무조건 복음의 감동을 받았다고 모두 다 복음을 영접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 감동수준에서 영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의 감동을 받아야 복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관심을 가지며, 복음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복음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복음을 믿고 영접한 확신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복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사람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는 복음의 감동을 받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경멸하고,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을 증오합니다. 그래서 상호 배타적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우호적일 뿐만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4절). 그는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이 믿는 종교를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5절).
그런데 그에게 있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방문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백부장의 간청을 들어주심이 합당하다고 간구합니다. 백부장은 복음에 대해 열린 자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였고, 복음의 능력을 믿는 자였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로마제국의 자존심도 없었고 체통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긍휼한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신다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6절)고 정중히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예의가 있고 품위가 있는지 모릅니다. ‘주여’라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부터가 다릅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보통 고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장교가 젊은 유대인에게 그런 고백을 하다니요!!! 사실 당시 유대인들마저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대단한 고백이었던 셈이지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이 얼마나 우리를 감동케 하는지 아십니까? 그의 고백은 주님을 감동시켜드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보십시오(7-8절).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까요? 백부장은 말씀을 믿었습니다. 말씀으로 하인이 고침 받을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3) 우리의 작은 감동에도 주님은 큰 감동으로 보상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언행심사나 믿음에 크게 감동하십니다. 사실 주님 보시기에 볼품없는 믿음이지만 주님은 크게 감동하십니다. 주님은 감동도 잘 받으시고 감동도 잘 주시는 분이십니다. 감동에 약하시고 감동에 인색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성경에는 주님이 감동하시는 장면들이 몇 번 나옵니다. 하지만 솔직히 주님 편에서 그다지 감동할만한 행실이나 믿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크게 감동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던 베드로를 향해 감동하시던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연보궤에 두 렙돈을 집어넣는 과부를 보시고 감동하시던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느니라,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21:1-4).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애원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긍휼을 구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감동하시던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함께 죽어가던 한편 강도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감동하시던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주님은 우리의 작은 말이나 행동,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감동을 숨기지 아니하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은 우리가 주님을 감동케 하면 주님은 더 큰 감동으로 우리를 보상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감동케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고, 성도 역시 주님을 감동케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 것으로 감동을 받고 살면 안됩니다. 세상은 우리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어떤 감동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소생케 하는 감동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감동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공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감동을 받는 일에 민감하고 주님을 감동케 하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절대 자신의 감정으로 교회 일을 하거나 믿음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감정은 하나님의 감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물론 각자에게 주어진 감정을 잘 다스리고 통제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담는 거룩한 처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감정은 죽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살 때 믿음생활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삶이 행복하고 윤택해집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당신의 감동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감동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사는 것은 결국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자기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복음으로 사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벅찬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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