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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옥·조경지씨 부부(오른쪽부터)가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석인들 틈에 서 있다. / 한영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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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68번지. 봄볕이 짱짱하다. 웃는 얼굴로 손님을 반기는 원숭이 석상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마당에 들어서자 석인(石人)들이 즐비하다.
극단 자유 대표로, 연출가로 40년간 무대를 지켜온 김정옥(金正鈺) 전 문예진흥원장이 지은 박물관 ‘얼굴’은 15일 개관을 앞두고 내부 정돈이 한창이다.
“문무관(文武官)석·동자석 같은 석인, 목(木)인형, 도자인형, 얼굴 모양의 와당(瓦當)을 36년 모았더니 500점이 넘네요. 이 앞마당이 무대고 석인들은 다 배우고 광대입니다.”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 ‘무엇이 될꼬 하니’ ‘피의 결혼’ 등 다양한 작품에서 한국적인 소리와 표정, 색깔을 추구해온 김씨는 평생 인간의 ‘얼굴’에 관심을 두어왔다.
70평 정도 되는 김씨의 ‘야외 무대’ 한복판에는 여기저기 (석인이 사라진) 받침돌만 외롭게 박혀 있다. 쓰러져 있거나 목이 잘려나간 채 반쯤 누워 있는 석인들도 보인다. 마당 둘레에는 검은 이끼가 끼고 상처가 나고 얼굴의 형체마저 희미해진 다양한 종류의 석인들이 고요히 서 있다.
김씨는 “석공(石工)과 흘러간 시간과 바람과 눈비의 합작품들”이라며 “서양 석조각과 달리 우리 민중처럼 석질도 질박하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민간에서 굴러다니던 불상. ‘민불(民佛)’이라고 이름도 지었다. 부인 조경자(曺京子)씨는 “코를 갈아먹으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 때문에 코가 잘려나간 게 많다”고 거든다.
김씨 부부의 집에 석인이 처음 들어온 건 1967년. 목기, 그림, 가구 등 우리 미술품을 수집하던 김씨는 서울 동교동 길가에 버려져 있던 1m 크기의 평범한 문관석 한 쌍을 우연히 발견하고 수레에 실어 화곡동 집으로 옮겨 왔다. 그때부터 다양한 표정의 석인들이 집 안팎을 채웠다. 석인이 비싸지 않던 시절이라지만 한달에 하나 꼴로 사들일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남편의 돌수집을 조씨까지 환영했던 건 아니다. “남들은 집 키워 이사가는 재미에 산다는데, 난 저 돌덩이들 때문에 집이 터져나가는 바람에 잔뜩 웅크리고 살았다”고 나온다. “크지도 않은 집에 옛 가구와 그림들이 쌓여 곰팡이가 피는 바람에 앓기도 많이 앓았죠.”
1997년 광주로 내려온 부부는 “수집품들을 사람들과 함께 즐기자”고 의기투합, 지난해 봄부터 본격적으로 박물관 개관을 준비해 왔다. 야외 전시장과 실내 전시장을 합쳐 150평짜리 박물관을 짓고 100년 넘은 기와집을 전남 강진에서 옮겨다 놨다. 목각인형과 그림, 도자기 등으로 채워진 실내 전시장은 진열대 밑에 바퀴가 달려 있어 뚝딱하면 작은 무대가 생기고, 반대쪽 계단은 100석짜리 객석으로 변신한다.
김씨가 “석인은 물을 뿌리야 표정과 세월이 되살아난다”며 석인의 얼굴을 씻어주자, 옆에 있던 조씨가 “박물관은 우리 김 선생 놀이터예요” 한다. 김씨는 “여기서 과거(석인들)와 사람들의 만남을 연출하고 싶다”고 했다. 월·화요일은 휴관한다. (031)765-3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