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경남 하동의 최참판이 살았다는 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그 토굴이 있다. 암주는 늘 참판 집 일부를 옮겨온 것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빤질빤질 윤이 나도록 닦아놓은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 다락방에 앉으면 멀리 섬진강이 보였다. 특히 밀물 때면 강줄기가 더욱 선명했다. 한 켠엔 군청 공무원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그 옛날 최참판 댁 고택 사진이 흑백사진으로 조그맣게 걸려있다.
한때 이 암자의 서쪽 채 맨 끝방은 나의 장서각이었다. 그 도반의 배려로 책을 의탁해 두었던 곳이다. 나에게는 사고(史庫)였던 셈이다. 이즈음도 정족산 사고, 오대산 사고를 들를 때마다 그 집이 함께 생각났다.
그 암주는 집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 동쪽의 고방채는 미닫이문까지 옛것을 그대로 두고 안에 방을 들여 옛 운치를 잃지 않도록 배려했다. 안채와 고방채, 행랑채가 ‘ㄷ’자를 이룬 채 옮겨온 이후로도 수십 년이 흘렀으니 지방문화재감은 충분히 될 것 같다. 암주는 직접 여기저기 여유있는 절에 가서 기와도 얻어오고, 문짝 역시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있는 목수를 불러 새로 짜맞춘 탓에 아귀가 잘 맞아 들를 때마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죽림정사’라는 현판을 만들어 선물했다.
글씨는 합천 인근에서 가장 명필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시는 송월(淞月) 스님의 작품이다. 그 때 처음으로 글씨를 받으러 가보았다. 용건을 말씀 드리자 ‘명필은 백리 안에서 백년 만에 난다’는 말을 자랑하시듯 늘어놓았다. ‘죽림정사(竹林精寺)’ 넉 자를 받았는데 대자(大字)라 한 자 당 수월찮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그것도 옆방에 같이 사니까 인정으로 최소한 받은 것이라는 말씀도 빠뜨리지 않았다. 인근의 서각하는 이에게 맡겼다. 그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중생심을 미리 헤아리고, 뒤편에 ‘증(贈) 아무개’라고 끌로 내 이름자를 새겨주었다.
송월 스님의 스승은 금강산 장안사 대강백 혼해 스님이시다. 태백산 금봉암 고우 스님은 상주 남장사에서 스님께 『원각경』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공주 학림사 대원 스님은 선어록과 『금강경』 강의를 듣다가 “깨달은 사람에게도 인과가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대답했다가 오백생 동안 여우 몸을 받았다”는 백장 선사의 ‘인과불락(因果不落)’ 공안에 막혀있을 때, 스님의 “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에 발심하여 선방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전강(田岡) 선사의 회상에서 수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 집도 고풍스런 양반집이라 푸근해 만족스럽지만 더 좋은 건 뒷란의 대나무 밭이다. 집이름도 거기에 걸맞게 ‘죽림정사(竹林精寺)’라고 이름붙였던 것 같다. 본래 인도의 죽림정사는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가란타(迦蘭陀) 장자의 죽림원(竹林園)에 지어드린 최초의 가람으로 위치 선정에 무척이나 고민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멀지 않아 왕래하기 편하고, 법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가기 편안한 곳이며, 낮에도 번잡하지 않고 밤에는 시끄럽지 않은 한가로운 곳으로 선정에 들기 알맞은 곳이어야 할 것이다.”
죽림은 청백가풍(淸白家風)을 떠올리게 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대나무 숲 속에서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竹林七賢)은 만화가 채지충에 의해 대중화된 『세설신어(世說新語)』 속에서 그들의 삶의 단편을 알게 해준다. 논산 강경읍 황산리에는 율곡과 퇴계 등 6명의 위패를 모신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있고, 서울 가회동에는 사찰생태연구소 대표인 김재일 법사가 머물고 있는 죽림헌(竹林軒)도 있다. 장수의 용성(龍城) 선사의 생가를 복원한 절 이름도 죽림정사이다.
송나라 야보(冶父) 선사의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라는 시에서 보듯, 더불어 대나무 숲 속의 정사(精舍)는 선사들의 수행공간 그 자체였다. 조선 죽림칠현 분위기의 매월당 김시습은 당시 의지하던 선지식인 조계산 준상인(峻上人)을 이렇게 찬탄했다.
요식오사진면목(要識吾師眞面目) 우리 스승 참모습을 알려고 한다면 죽림서반석교동(竹林西畔石橋東) 대숲 서쪽 언저리 돌다리의 동쪽일세.
________________________ 원철 스님 _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재정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써왔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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