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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十月)은 時祀로 바쁜 계절이다. 답사 공고를 하고 신청을 받았지만, 호응이 예상보다 적었다. 많은 회원들이 시사와 겹쳐서 참가가 힘들다고 전화와 문자로 양해(諒解)를 구하였다. 박약회는 儒家의 맥(脈)을 이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이니,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실천인 時祀 참여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회원들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참가 인원이 적었지만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11월 18일 답사에 참가한 일행은 다섯이었다. 성서 용산역 5번 출구에 모인 우리 일행은 승용차를 타고 아침 8시 20분에 출발하였다. 답사 인원은 많으면 흥겹고, 적으면 편안하다. 승용차라는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순간에 느끼는 친밀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같은 회원이라도 답사를 같이 많이 다닌 사람에게는 더 각별한 정을 느낌은 인지상정이리라.
충절(忠節)의 마을, 묘골
맨 먼저 찾은 곳은 묘골의 육신사(六臣祠)였다. 모두가 여러 번 가본 곳이었지만, 성주(星州)를 답사하러 가면서 忠節을 상징하는 육신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홍살문을 지나니, 사육신(死六臣)의 충절을 새긴 육각형의 석주가 보인다. 서편 위에는 육신사가 있고, 동편 좀 떨어진 곳에는 태고정(太古亭)이 서 있다. 보물로 지정된 태고정은 한 건물에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공존하는 특이한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태고정에는 ‘一是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우리 일행은 태고정을 보면서, ‘一是’의 의미와 ‘樓’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은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니, ‘일시(一是)’는 충절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태고정(太古亭)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드님이신 박순(朴珣) 公의 묘소를 둘러본 우리는 삼가헌(三可軒)으로 갔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三可’는 선비의 덕목이라고 쓰여 있다. 여러 번 읽어보아도 뭔가 설명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와서『중용(中庸)』을 다시 살펴보니, ‘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라 쓰여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글의 방점은 뒷부분에 있다. 그렇다면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11대손인 삼가(三可) 박성수(朴聖洙)가 자신의 호를 ‘삼가’라 한 것은, 자신이 可均․可辭․可蹈를 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공자도 실행하기가 어렵다고 고백한 ‘중용(中庸)’을 이루려는 굳은 각오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삼가헌(三可軒)
삼가헌의 왼편에는 삼가헌의 별당인 하엽정(荷葉亭)이 있다. 늦가을이라 연못에는 붉은 연꽃과 푸른 잎은 없었지만,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정자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엽정의 난간(欄干)은 평난간(平欄干)인데, 아기자기한 것이 규수(閨秀)가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마 밑에는 ‘파산서당(巴山書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이 하엽정(荷葉亭)이 있던 이곳에는 파산서당(巴山書堂)이 있었다고 한다. 서당은 없어졌지만,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한 편액인 셈이다.
가실성당(佳室聖堂)
묘골을 나와 간 곳은 칠곡군 왜관에 있는 가실성당이다. 주차장에 내려 건물을 올려보니,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단아한 모습이다. 안내문을 보니, 르와벨 신부님이 설계를 하셨고, 투르뇌 신부님이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다. 1923년에 지어진 것으로, 대구․경북에서는 계산성당 다음으로 오래된 성당건물이라 한다. 흰 벽돌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 건물은 경건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유리창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이 눈에 띈다. 같이 간 어떤 분이 말하길, 이것이 가실성당을 대표하는 볼거리라고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구원을 얻으려는 신도들을 표현한 그림이 아닐까 싶은데, 성당에 다닌 적이 없는 나의 막연한 추측이다.
가실성당(佳室聖堂)
그러나 성당 안에 들어간 그 순간, 나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뭔가를 느낀다. 옛날 훈련소 시절, 빵을 먹기 위해 성당을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느끼는 이 경건함은 무엇일까? 특정 종교를 믿지도 않는데, 솟아오르는 이 신심(信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보니, 붉은 감 몇 개를 매단 감나무가 철제(鐵製) 지주(支柱)에 의지하여 힘겹게 서 있다. 감나무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몸통은 콘크리트 색깔의 흙으로 덮어 보강을 해 놓았는데,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는 노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동방사지 7층 석탑(東方寺址 7層 石塔)
성주읍 예산리에 있는 동방사지 7층 석탑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석탑의 상륜부는 없어지고, 찰주(刹柱)만 남아 있었지만, 다른 부분은 온전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사각의 7층탑인데, 1층 탑신에는 감실(龕室)이 있었고 안에는 불상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탱주와 우주, 옥개받침을 보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탑의 조성 연대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탑의 위치를 기준으로 삼아 당시 사찰 건물의 위치가 어디일까를 가늠하기도 하였다. 또 월정사 8각9층 석탑,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비교하면서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방사지 7층 석탑(東方寺址 7層 石塔)
답사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사물을 보는 눈이 다름을 알게 된다. 혼자 가서는 볼 수 없는 것을 같이 가면 볼 수 있고, 혼자 가서는 알 수 없는 것을 같이 가면 알게 된다. 논어에 나오는 ‘익자삼우(益者三友)’의 의미가 답사에서 만큼 빨리 실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한강선생 묘소(寒岡先生 墓所)
영남 유림에서 ‘老先生’이라 부르며 존모(尊慕)하는 퇴계의 학문은 한강(寒岡)을 거쳐 근기 남인(近畿 南人)으로 이어진다. 근기 남인에서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 나와 실학을 꽃피웠으니,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한강의 위치는 우뚝하다.
퇴계와 남명에게 모두 배운 한강의 학문은 그 범위가 넓어 측량하기 힘들다. 특히 예학에 밝았다고 전해지지만, 영가지(永嘉誌) 등 많은 읍지(邑誌)를 간행하고, 역사와 성리학(性理學)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이 있음으로 한강은 대구와 성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되었다.
성주읍 금산리에 위치한 한강 묘소 참배는 처음이었다. 넓은 묘역은 잘 관리되고 있었다. 이 마을이 고향인 백송현 선생님은 이곳에서 뛰놀던 어릴 적 추억을 말씀하신다. 한강 묘소를 향해 올라가다 보니, 어떤 비석의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징사지애선생정공묘도비(徵士芝厓先生鄭公墓道碑)’라 쓰여 있었는데, ‘徵士’가 무엇인지를 두고 대화가 이어진다. 어떤 분은 ‘처사(處士)’와 같은 의미로 보아, 조정에서 불러도 벼슬하러 나가지 않은 선비라 설명한다. 그런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징사(徵士)’는 학덕(學德)과 절행(節行)이 뛰어나서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조정에 나오는 선비였다. ‘芝厓 先生’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서 올라가니, 맨 위에 한강 선생 묘소가 있다. 묘소를 살핀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묘비(墓碑)로 모였다. 묘비(墓碑)를 보니, 맨 오른쪽에 ‘정부인 증정경부인광주이씨합부(貞夫人 贈貞敬夫人光州李氏合祔)’이라 쓰여 있고, 그 다음에 ‘조선국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으로 시작되는 긴 관직명이 적혀있다. 부인이 오른쪽에 적혀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비석의 뒷면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니, 뒷면에는 증자헌대부○조판서(贈資憲大夫○曹判書)인데, 앞면은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이다. 한강 선생이 영의정으로 다시 추증되면서, 기존 비석의 뒷면에 글자를 새로 새기고 비석을 돌려서 세운 것이다. 앞뒷면 모두에 역사를 담고 있으니 비석의 가치는 배가(倍加) 된다.
선생의 묘소 앞에 서 있는 망주석(望柱石)은 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밑 부분이 부서져 내렸다. 찬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 종아리를 드러낸 사람을 보는 마음이 이러할까?
人情이 넘치는 점심식사
한강 묘소를 참배한 우리 일행은 좀 이르지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백송현 선생님은 보신탕을 추천하셨지만, 드시지 못하는 분이 계셔서 소고기 전골을 먹었다. 깨끗하게 꾸며진 식당에 들어가니, 주인이 햇볕이 잘 드는 창가로 안내한다. 소고기 전골에 막걸리를 곁들였다. 운전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맛만 보았는데, 맛이 좋아 입맛을 다시게 한다.
식사를 끝낸 후 답사회비를 걷으려 하였는데, 집에 경사가 있었던 이창선 선생님이 점심값을 내셨다. 이에 성주가 고향인 백송현 선생님은 난감해 하시다가, 식사비 대신 차량 기름 값을 주신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성주이씨 오현재(梧峴齋)로 향했다. 오현재에는 당일 시사(時祀)에 참례하기 위해 모인 성주이씨 가문의 사람들로 붐볐다. 오현재 마당에서 왼쪽 산을 올려다보니, 도포를 갖추어 입고 선대의 묘소에 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런 날 여기저기를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은 예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오현재를 나와 동강선생(東岡先生) 묘소로 향했다.
동강선생 묘소(東岡先生 墓所)
동강(東岡)은 한강과 함께 성주지역에서 ‘양강(兩岡)’이라 불리던 대학자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명(南冥) 선생은 자신이 평생 몸에 지녔던 경의검(敬義劍)은 내암 정인홍에게, 성성자(惺惺子)는 동강 김우옹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유추해 본다면, 남명 사상의 진수를 이어받은 사람은 내암과 동강이라 볼 수 있다.
동강 선생 묘소에 오르면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을 생각한다. 동강(東岡)의 13대손인 심산 김창숙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데, 내게는 얼마 전에 읽은 제중매성산이씨부문(祭仲妹星山李氏婦文)을 쓰신 분으로 각인(刻印)되어 있다. 이글은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이 남편을 여윈 여동생의 대상(大祥) 때 심산이 지은 제문인데, 애절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어 읽는 사람을 눈물짓게 하는 명문이다. 이글을 읽으면서 나는 옛날 반가(班家)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동강의 묘소에 가니, 먼저 신도비가 우리를 반긴다.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의 모습이 재미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둥근 몸체에 비해 다리와 발톱은 크기가 너무 작아 거대한 몸통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다. 앞에서 본 거북의 머리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무서운 모습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니, 툭 튀어나온 동그란 두 눈과 벌름거리는 듯한 콧구멍, 그리고 콧구멍을 갖춘 거북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박하다. 도동서원 사당 계단에서 사당을 지키고 있던 서수(瑞獸)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동강 신도비
동강의 묘소에는 묘 앞에 오래된 비석이 서 있다. 좀 전에 보았던 한강 묘소에는 묘비(墓碑)가 오른쪽 앞에 있었다. 퇴계 묘소에도 그러했는데, 여기서는 묘비가 묘 정면에 서 있다. 그러고 보니,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의 묘비의 위치도 동강 묘소와 같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묘비는 묘 왼쪽 앞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질서와 형식을 중시하는 유가(儒家)지만, 묘비의 위치에 대한 정해진 것은 없는 모양이다.
배설(裵楔) 장군의 신도비 앞에서
2014년 여름에 개봉된 영화 ‘명량’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배설 장군이다. 영화 속에서 배설 장군은 말투나 행동이 뒷골목 양아치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이에 장군의 후손들이 영화 제작진을 상대로 소송까지 하면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배설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한방 교수님의 안내에 따라 대가면에 위치한 성주배씨(星州裵氏) 서암공파(書巖公派) 집성촌에 들어가니, 최근에 세운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배설 장군의 윗대이신 서암공의 신도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시던 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신다. 인사를 나눠보니, 배설 장군의 후손이 되시는 배관호라는 분이었다. 우리가 박약회(博約會) 회원이라니, 반가워하시면서 자신도 성주 박약회에서 활동을 하셨다고 하신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배설장군으로 옮겨간다. 후손의 입장에서는 억울함이 많을 것이니, 하고 싶은 말도 많음은 당연하다. 조용히 설명하시는 배관호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설 장군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마을을 떠나면서 류선동 선생님은 ‘행동거지에서 양반 티가 난다’고 말씀하신다.
칠천량 해전(漆川梁 海戰)에서 조선 수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주요 지휘관은 거의 전사하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편제를 유지한 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던 장수가 배설(裵楔)이었다. 이것은 배설이란 인물이 어떤 장수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만약 배설이 부하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장수였다면, 조선 수군은 칠전량 해전에서 몰살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명량해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칠천량에서 후퇴한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배설은 군수물자가 일본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산도 본영을 불태운다. 그리고 혹시나 있을 일본 수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휘하 군선을 이끌고 남해에서 일본 수군의 활동을 견제하고 있었다.
칠천량 패전 후, 조정에서는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이때 살아있었던 유일한 장수가 배설이었는데, 처벌하지 못하였다. 배설을 처벌한다면, 남해는 일본군에게 넘겨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에게 배멀미를 이유로 병가를 낸 이후 배설의 행적에 대해서도 논란의 소지는 많다. 배관호씨는 당시 배설 장군이 경상도 일대 일본군의 상황을 파악하여 이순신에게 알려주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배설 장군은 정말 탈영하였을까?
한강(寒岡) 선생을 모신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도착하여 우측을 보니, 한강 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원래 한강 선생의 신도비는 갓말마을 창평산에 조성된 묘소 부근에 있었으나, 나중에 한강 선생의 묘소를 성주읍 금산리의 인현산으로 이장하면서 회연서원 경내로 옮겨졌다.
이한방 교수님의 말처럼 나는 석조물에 눈길이 자주 간다. 한강 선생의 신도비를 짊어지고 있는 귀부(龜趺)를 보니, 성주 지역의 신도비는 분위기가 비슷하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큰 몸통,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짧은 다리와 발톱, 크게 과장된 입과 눈, 코의 모습이 대동소이하다.
회연서원 안으로 들어가니 처마 밑에 ‘檜淵書院(회연서원)’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강당에는 중앙에는 ‘景晦堂(경회당)’, 좌우에는 전서로 쓴 글 현판이 걸려있다. 다가가 보니, 전서(篆書) 글씨 밑에 작은 글씨로 ‘望雲庵(망운암)’, ‘玉雪軒(옥설헌)’이라 적혀 있다. 현판 ‘옥설헌’ 밑에는 분정기가 붙어 있는데, 도산서원의 경우처럼 분헌관(分獻官)이 보인다. 그리고 같은 종이 왼편에 별사집사분정(別祠執事分定)도 적혀있다.
회연 서원 강당 앞에서
강당의 기문(記文)을 보고 있으니, 문화유산 해설사께서 다가온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내를 받아 숭모각(崇慕閣)으로 갔다.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과 교지(敎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회연급문록을 보면서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미수(眉叟)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찬 시기가 다른 두 급문록이 있었는데, 펼쳐진 급문록의 첫 페이지에는 여헌의 이름이 가장 앞에 있었다.
한강 종택(寒岡 宗宅)을 둘러보며
마지막 답사지인 한강 종택으로 차를 몰았다. 멀리서 보니, 규모가 꽤 큰 기와집이 보인다. 저기가 한강종택이려니 했는데, 한강종택은 그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솟을 대문이 아니라, 접이식으로 된 신식 대문이었다. 대문이 잠겨 있어 담장 밖에서 종택을 살피니, 중년의 여자분이 문을 열어주신다. 알고 보니 종녀(宗女)였는데, 친절하게 안내와 설명을 해 주셨다. 대대적으로 보수한 안채는 새로 지은 집과 같았다. 팔작지붕의 사랑채는 규모가 적은 편이었다. 종택의 우측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뚝한 그 모습이 한강(寒岡)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종택을 보고 나오다 보니, 이창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한방 교수님은 아마 누님 집에 가신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나이가 들수록 혈육의 정은 더욱 애틋해지는 법이니, 누님이 사는 동네에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마을에는 이창선 선생님의 매제(妹弟)가 되시는 분이 내려와 살고 계셨다. 집에 들어가서 차를 같이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날이 어두워진다. 우리 일행은 답사를 마무리하고 대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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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장희 원장님의 말씀에 따라 관련 자료를 올립니다.
용경에 의하면, 규룡은 용들의 우두머리로 아홉자식을 두었다.
- 출처 : 『중국길상도안』, 노자키 세이킨 지음 | 변영섭 외 옮김
용의 아홉 자식 중 첫째, 둘째, 셋째는 답사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 비희(贔屭) : 패하(覇下)라고도 함.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를 좋아함.
- 이문(螭吻) : 잘 삼키고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여 지붕의 용마루에 조각하면 화재를 예방한다고 함. 험한 곳을 좋아하여 사찰이나 궁궐의 대들보 단청의 용으로 추측
- 포뢰(浦牢) : 용처럼 생겼으며, 울기를 좋아하고 고래를 두려워함.
비희는 비신을 짊어지고 있는 용이고, 포뢰는 범종 머리에 조각된 용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범종을 때리는 나무는 고래의 모습으로 조각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떤 책을 보니, 인도의 용은 용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중국의 용은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라 하더군요. 등용문 이야기는 중국 용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잉어가 용이 되는 것이니까요.
잉어가 황하에서 가장 물살이 센 협곡인 삼문협을 거슬러 올라 가면(용문을 통과하면)
용이 된다고 하지요. 그 거센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砥柱中流巖이고
수양산 백이숙제의 百世淸風과 함께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