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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心筋), 그리하여 막히다
이 문 열
괘종시계가 천천히 여섯 시를 알렸다. 텅 빈 사무실의 정적을 깊고 음울한 것으로 만드는 둔탁한 음향이었다. 이어 머뭇거리던 어둠이 낡은 배를 스며드는 물처럼 사무실 구석구석을 적셔 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늙은 계장마저 면구스러운 듯한 인사와 함께 돌아간 것은 벌써 삼십 분 전의 일이었다. 옆 사무실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꼼짝 않고 있었다. 그 침묵과 정지의 자세가 어찌나 견고했던지 이따금씩 피어오르는 손끝의 담배 연기마저도 무슨 파르스름한 실처럼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아도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염염(炎炎)한 사념, 특히 그 헝클어진 번우(煩憂)의 그림자 쪽이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뒤쪽 출입문이 열리고 한층 짙은 그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듯 불쑥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희끄무레한 긴 덧옷을 걸치고 무언가를 한 아름 안고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 사내의 접근은 너무도 느리고 조심스러운 것이어서 그 발짝 소리에 섞인, 요즈음엔 드문 구두 징과 시멘트 바닥이 어울려내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그 사내의 출현을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요?”
“주문하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쉰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이하게도 그 목소리는 길게길게 메아리가 되어 몇 번이고 사무실 벽을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는 원인 모를 섬뜩함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를 응시하며 더듬거렸다.
“주문이라고 언제 무슨…….”
그러다 그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책상 위에 가져온 물건 꾸러미를 내려놓고 그를 마주 보는 사내의 불길하고 우중충한 모습 때문이었다. 얼굴은 일견 평범하였지만 두 눈은 이상하게도 공허와 적막을 담고 있었고, 길게 구부러진 콧날은 완강한 침울로 빛과 생명을 부인하고 있었다. 흔히 보는 바바리코트마저도 뻣뻣하게 굳은 것 같은 그 사내의 사지에 삭아 가는 수의(壽衣)처럼 휘감겨 바람도 없는데 너풀거리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극단의 공포로까지 몰고 가지 않는 것은 그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낯익음 ― 이를테면 낡은 사진첩에서 빛바래고 변형된 자신의 옛 모습을 볼 때와 같은 일종의 친근감이었다.
“예, 선생님께서는 간밤 자정 무렵 저희 회사에 주문 전화를 내셨습니다.”
여전히 쉰 듯한, 그리고 길게 끄는 여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그의 알지 못한 불안과 당혹을 다시 자극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문뜩 떠오르는 의혹이 강했다.
“이상하오. 나는 분명 어젯밤 열 시쯤 집으로 돌아갔고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소.”
“물론 그렇게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간밤 몹시 취해 돌아오신 데다, 또 자리에 들기 전에 집에 있는 양주를 반 병이나 더 비우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잠드셨다고 주장하시는 그 시각은 기실 선생님께서 술로 기억을 상실하기 시작한 시각에 불과합니다.”
“그래 좋소. 그랬다 합시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네 회사는 무슨 회사요?”
“‘샘’과 ‘예흐림’ 합자회삽니다.”
“‘샘’, ‘예호림’? 외국인 회사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상호(商號)는 그렇지만 그분들을 직접 대한 적이 없어 국적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도시에 있는 지사(支杜)에 고용되었고 또 제가 하는 일이 보시는 바와 같이 보잘것없는 일이 돼 놔서요.”
“그럼 내가 주문한 건 무엇이오?”
“그것 역시도 저는 모릅니다. 여기 이렇게 가져오긴 했지만. 오직 제 임무는 배달뿐이니까요.”
“그래도 여기저기 배달하다 보면 대략은 알게 될 게 아니오?”
“물론 약간이야 알지요. 하지만 선생님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좋아요. 그 약간이라도 들어 봅시다.”
“제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정말 미미한 것뿐입니다. 즉 원래 이 상품은 이렇게 우아하게 포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다는 것, 이것을 이렇게 합성할 수 있게 한 것은 순전히 진보된 과학기술의 덕택이며, 또 이 상품은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정도지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상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상품 꾸러미를 훑어보던 그는 문득 그중의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그럼 이걸 끌러 보면 되겠구려, 어디 하나만 끌러 봅시다.”
“안 됩니다. 저희 회사의 규칙은 상품을 선택하기 전에는 포장을 끄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워낙 한번 끌러 버리면 다시 수습할 수없는 것이 돼 놔서요. 꼭 보시려면 먼저 하나를 고르시고 이 수령증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럼 여기 있는 상품의 종류나 품질만이라도 소개해 줄 수 없소?”
“죄송합니다. 그것 역시도 산업 기밀에 속해 자세히는 말씀 드릴 수 없습니 다.”
“그럼 대강은 말할 수 있겠군.”
그러자 사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 있는 것은 대략 세 종류입니다. 방금 선생님이 집으신 것은 일반 소비자용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경 그 종류의 하나를 사 가게 될 테지만 당장 급한 선생님께서 쓰시기엔 불편할 겁니다.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요. 선생님 편에서 왼쪽에 있는 그 붉은 상자의 것은 지금이라도 바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질이 낮아 ― 쓰시기에 불편이 많으실 겁니다. 그런데 역시 선생님께 합당한 것은 그 오른편 검은 상자에 든 것일 겝니다. 이 나라에서 최근 들어 부쩍 수요가 는 것인데 그런대로 품위 있고 또 사용도 간편한 셈이지요.”
“그럼 당신네 제품은 이 셋뿐이오?”
“물론 더 있습니다. 실로 저희 회사의 상품은 다양한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수천, 아니 수만 종류가 넘지요. 예를 들면 지금 저희 본사(本杜)의 비밀 금고 안에 깊이 보관돼 있는 황금 상자에 든 것은 여러 세기 걸려서야 겨우 한두 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나 영웅들을 위한 것이지요. 지금은 수요가 없어 생산이 중단되고 이따금 모조품만 나오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어떤 것은 현대의 대량생산 체제에 힘입어 하롯저녁에 수십만 개를 만들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선생님과 별 관련이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가져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내의 상당히 자상스러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기이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정체 모를 상품들을 살피고 있었다. 정성스럽고도 맵시 있는 포장이었지만 왠지 그 주위를 맴도는 것은 그 사내의 첫인상에서와 같은 어떤 섬뜩함이어서 쉽게 선택의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보며 여전히 음산한 여운이긴 하지만 어딘가 은근해진 목소리로 사내가 권유했다.
“좋은 상품들입니다. 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편이지요. 거기다 값도 싼 셈입니다. 비록 저희 회사가 이 상품의 생산을 독점하고 있지만 터무니없이 값을 올리지는 않아요. 그리고 성의(誡意) ― 이 시대는 무엇이나 대량생산이라야 열을 올리지만 저희 회사는 선생님과 같은 개인 주문에도 결코 소홀히 대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성실한 기업이군…….”
그는 막연하게 대답했다.
“모르긴 해도 그것이 아마 오늘날의 저희 회사를 만들었을 겁니다. 듣기에는 남양 제도에서 북극의 빙산까지 그리고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중앙아시아의 오지에 이르기까지 저희 지사와 외판원(外販員)이 안 나가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대로 다소의 긍지와 자부마저 엿보이는 사내의 어조였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최초의 의문으로 돌아가 중얼거리듯 반문했다.
“그런데 ㅡ 아무래도 이상하오. 나는 도무지 그런 회사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회사에 무얼 주문한 기억은 더욱 없단 말이오. 그것도 술이 취해. 밤늦게, 또 전화 같은 것으로는.”
“저희 회사에는 착오란 게 없어요. 거기다가 제가 회사로부터 받은 정보는 틀림없습니다. 제가 처음 텅 빈 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께서는 과연 그들이 일러 준 대로 어떤 난파선의 고집스러운 선장처럼 홀로 앉아 계셨습니다. 그만큼 저희 회사는 정확하죠. 분명 무언가 선생님 쪽에 착오가 있을 겁니다.”
“아니야. 무언가 당신들은 내게 억지로 떠맡기려는 것 같아. 나는 절대로 알지도 못하는 회사에 내용도 모르는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소.”
“그럼 설명을 드려야겠군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어젯밤 열 시쯤 취해 돌아오신 선생님은 다시 지난 생신날 맏따님의 약혼자가 가져온 ‘죠니워커’를 반 나마 더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신 때가 열한 시 사십 분경. 거기 소파에 한동안 앉아 계시던 선생님은 전화를 내셨지요. 저희들은 이 시(市)와 협조하여 여러 가지 설비를 해 두었기 때문에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기만 하면 전화는 바로 스물네 시간 대기 중인 저희 판매국과 쉽게 연결됩니다. 주문서에 의하면 선생님의 전화는 정확히 영 시 사 분 십이 초에 걸려 왔습니다.”
“그래서 무얼 주문했다는 건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저희 상품이지요. 하지만 이 상품은 선생님께서 그토록 취하셔도 잠잘 수 없게 한 그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돌연 날카롭게 사내를 노려보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거짓이야. 그 일은 이 따위 너절한 상품 나부랭이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당신들은 분명 사기꾼이야. 아니면 무언가를 협박하러 왔거나…….”
사내는 태연했다.
“사실 고객 중에는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태반이죠. 일껏 주문하셔 놓고 배달을 가면 거부하는. 하지만 저희 회사는 그 점에는 관대하죠. 저희들은 순순히 물러납니다. 저희 사시(杜是)는 친절, 친절이죠. 어차피 그들은 모두 결국 저희들의 고객이 되고 말 거니까요.”
“그것 참 좋은 사시군. 그럼 그 충실한 사원답게 이만 가 보시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환기시키고 떠나겠습니다. 즉 선생님의 주문은 이것이 세 번째라는 것과 이번에 배달을 결정한 저희 판매국의 검토는 매우 신중한 것이었다는 점 말입니다.”
“뭐라고? 내가 언제 세 번씩이나 당신네 회사에 걸레 같은 상품을 주문했단 말이오?”
그러자 사내는 다소 비웃는 듯한 눈길로 그를 보더니 예의 그 수의(壽衣) 같은 코트 자락에서 낡은 장부 한 권을 꺼냈다.
“당연히 저희 배달원들은 이런 경우에 대비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 장부는 바로 그 교육이 제게 준비시킨 증거 서류의 하나지요. 저희 회사의 오래된 자료철에서 빼 온 고객 신상 카듭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바로 선생의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은 지난날의 주문이며 거기에 대한 저희 판매진의 결정까지도. 예를 들면 一 .”
그러면서 사내는 몇 장을 뒤적이더니 흘깃 그를 쳐다본 후 이죽거리듯 읽어 나갔다.
“1949년 그러니 선생이 ― 지금부터는 존경을 표시하는 일체의 보조어, 접미사, 격조사를 생략합니다. ---= 한 지방 수재(秀才)로 이 도시의 명문(名門) 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하고 있던 땝니다. 그해 구월 팔일 오후 네 시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로마법을 펴 놓고 있던 선생은 책상 아래로 옆자리 여학생의 손을 슬며시 잡습니다. 잡힌 그 손은 잠시 흠칫하며 빠져나가려다 이내 저항을 포기하고 선생에게 맡겨집니다. 그 손 임자의 기록은 따로 여기 있는데 ― 미인이군요. 또 상당히 재원(才媛)이고, 전공은 불문학. 선생보다 한 학년 아래인 2학년이고 장차는 파리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 남는 것이 꿈. 당신들이 가까워진 것은 그해 봄 창경원에 밤벚꽃놀이 때였고, 극장과 음악회에 각 두 번, 교정 밖에서 도합 열한 번 만났습니다만 손을 잡은 것은 그날이 처음입니다. 그것도 돌발적으로…….”
“정말 별난 기록도 있군.”
그는 비양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는 달리 지그시 감은 그의 눈언저리에는 야릇한 감회가 서려 있었다. 사내는 그런 그에 별로 개의함이 없이 계속해 읽어 나갔다.
“그해 시월 육일 저녁 여덟 시쯤 당신들은 혜화동의 한 찻집에 나란히 앉아 있숨니다. 그녀는 『어린 왕자』를 원문으로 읽어 주고 있고 선생은 취해 듣고 있습니다. 열 시쯤 그녀의 집 앞에서 헤어졌군요. 당신들이 처음 키스한 날.”
거기서 다시 무표정을 회복한 그는 분명스레 사내의 말을 중단시켰다.
“도대체 그 케케묵은 일들이 어떻단 말이오? 그게 이 우중충한 물건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곧 알게 될 겁니다. 선생의 주문 중 적어도 두 번은 그 케케묵은 일과 연관이 있으니까요.”
“무슨 말이요? 어떻게…….”
“그러니 그냥 들으세요. 그해 십이월 첫 일요일 오후 당신들은 수락산 기슭에 있습니다. 도회에서 자란 그녀에게 선생은 ‘고향의 가을’을 선사합니다. ‘고향의 가을’은 몇 가지 단풍과 익은 야생 열매로 엮은 일종의 화환에 선생이 붙인 멋스러운 이름이지요. 결국 당신들은 그날 서울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낯선 농가에서의 하릇밤. 별은 빛나고 바람은 맑았습니다……. 다시 그해 겨울방학, 당신들이 함께한 동해변의 하루. 그날 갑작스러운 폭풍우와 눈보라는 당신들의 불행한 앞날을 암시한 것이나 아니었던지요. 그 속을 지친 나래로 떠돌다가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간 그 작은 물새들은 바로 그 후의 당신들이 아니었던지요…….”
“시적(詩的)이군. 하지만 나는 몹시 피로하오. 좀 간단히 할 수는 없소?”
그는 정말로 지친 듯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몇 장 넘겨 1950년 팔월. 선생은 일등병으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돼 있습니다. 그때 저희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요. 철야 작업으로 생산에 임했지만 수요를 충분히 채우지 못했고, 그나마 더러는 형편없는 조악품이 함부로 배달된 시기였습니다. 그때 있었던 착오는 저희 찬란한 사사(杜史)의 한 커다란 오점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다시 몇 장 넘겨 ― 시월. 선생은 중대의 몇 안 되는 생존자의 한 사람으로 삼팔선을 돌파하고 있숨니다. 계급은 하사. 벌써 그 여자의 소식은 사 개월째 두절돼 있고 ― 십이월. 선생은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계급은 일등중사. 장교가 되기를 권유받고 있으나 거절했군요.”
“좀 더 간단히 할 수는 없소? 그 구질구질한 인사 기록은 도무지 내게 긴한 것이 못 되니 말이오.”
“그럼 더 넘기지요. 1953년 삼월 선생은 금화(金花) 부근에서 입은 부상 덕분에 회복과 더불어 열흘간의 휴가를 나왔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지만 1·4 후퇴 때와 마찬가지로 몇 개의 포탄에 팬 웅덩이와 잿더미뿐입니다. 그 열흘의 거의 전부를 선생은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헤맵니다. 그녀를 찾으려는 거였지요. 그러나 귀대 전일에야 겨우 대구 어디선가 그녀를 보았다는 풍문을 들을 뿐입니다. 대구를 뒤지며 보낸 연말 휴가. 하지만 아직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그래, 나는 제대 후에야 그녀를 만났지.”
“맞습니다. 1954년 구월이죠. 실업자로 서울 거리를 헤매던 선생은 정말 우연히도 그녀를 만납니다. 남대문 시장 입구에서 장바구니를 든 식모애와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그녀는 이미 결혼했던 겁니다. 그것도 부역한 오빠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사십이 넘은 특무 대장에게 후처로 간 것이지요. 하지만 선생이 체험한 전쟁의 비참은 그녀에 대한 선생의 애집(愛執)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사실 바로 그 전날 밤까지도 거리를 메운 밤의 여인들을 헤치고 걸으면서 그렇게라도 그녀가 살아 있기만을 선생은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까? 선생은 무턱 대고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함께 멀리 달아나자고. 너무 늦었지요. 그녀에게는 이미 그 남편으로부터 헤어날 길이 없는 몇 개의 사슬이 있었습니다. 돌 지난 아들이 있었고, 삼 년 가까운 부부로서의 결합이 그것이었습니다. 또 그런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그녀가 남편으로 하여 누릴 수 있었던 풍요와 안락의 기억 또한 무시 못 할 것이었지요. 선생이
지루해하시니까 생략합니다만 이 서류의 후반은 그때 선생이 느낀 절망과 분노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또 그 무렵은 그녀의 일 외에도 선생이 한껏 비참할 때였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은 결딴나고 선생은 부랑자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계셨지요.”
“그래서?”
“선생은 첫 번째 주문을 한 겁니다. 그 당시로는 다소 흔해 빠진 것이기는 하지만 휴전과 함께 한숨을 돌린 저희 회사의 판매진은 선생의 주문을 신중히 검토했습니다. 그때 선생은 겨우 스물일곱이었고 저희 상품의 가장 강력한 구매 동기(購買動機)가 되는 선생의 절망이란 것도 어딘가 충동적이고 못 미더운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토의의 결과는 선생의 주문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온당한 판단이었지요…….”
“음 ― 그것이었소? 이제 이 상품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겠소. 그런데 그 판단이 온당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그는 전율보다는 어떤 곤혹을 느끼며 조용히 물었다. 사내는 여전히 삭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격정이란 항상 덧없는 것이니까요. 얼마간을 독주(毒酒)로 보낸 선생은 곧 모든 것을 회복합니다. 우연히 미군 부대에 취직한 선생은 곧 상당한 돈을 모았고 그 덕택으로 아름답고 현숙한 부인까지 얻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옛날 그녀 일로 가슴 아파하셨지만, 대체로 선생은 단란한 가정과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셨습니다. 때로 그 성급했던 주문을 자조(自嘲) 하기까지 하며.”
“당신네 회사는 정말 감탄할 만큼 정보 체제가 잘 발달돼 있군. 그럼 두 번째는 언제였소?”
사내는 조금도 성가신 기색 없이 몇 장을 더 넘기더니 여전히 성실하고 침 착하게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첫 번째 주문으로부터 꼭 구 년 후군요. 선생께서 군속으로 몸담고 있던 미군 부대가 본국으로 돌아간 지 일 년 만이었습니다. 선생은 그간 모아 두었던 돈으로 이것저것 사업을 벌였지만 모조리 실패였지요. 결국 선생은 마지막 남았던 집까지 날리고 변두리 단칸방으로 밀려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위로. 두 아이 외에 부인은 그때 임신 중이었고, 한 분 노모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었지요.”
“그런 때가 있었지…….”
“그 어느 날입니다. 허기진 배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만난 옛 친구의 소주 몇 잔에 취해 돌아온 선생은 돌연 저희 회사에 주문 편지를 내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가족들의 것까지 함께.”
“그랬던가.”
“다시 말하지만 저희 회사엔 착오란 게 없어요. 선생은 분명 단체 주문을 한 겁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우수한 정보망은 벌써 선생에 관해 여러 가지를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즉 오래잖아 선생은 장교로 남았다 혁명에 가담해 고위 관료로 진출하게 된 옛 전우(戰友) 하나를 만날 것이며, 그 친구는 선생에게 비록 촉탁이긴 하지만 정부 부처의 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리라는 것, 그리고 선생의 당면한 곤궁은 처족(妻族)의 배려로 넘기게 되리라는 것 등을 말입니다. 거기다가 또 선생의 주문은 자신의 것을 제외하면 하자(瑕疵) 투성이였습니다. 선생은 표현대리(表見代理)에 불과했던 겁니다. 다시 저희 판매진의 결정은 선생의 주문을 배수(拜受)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주름지는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고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래도 ― 그때 당신들은 내 주문에 응하는 게 옳았소.”
“아니지요. 비록 늦게 그리고 임시직으로 출발했지 만, 관리로서의 선생은 곧 남다른 행운을 누리셨습니다. 더구나 선생이 마지막으로 적(籍)을 두었던 그 대학은 명문이었고, 그 선배, 동창회 연줄은 언제나 선생을 그 부서의 소위 노른자위에 앉게 해 주었습니다. 결국 ― 저희 판매진의 결정은 현명했던 겁니다.”
이때쯤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실내는 아주 어두워 그들의 존재는 이따금 그가 세차게 빨아 대는 담뱃불로 겨우 감지될 정도였다.
사내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거의 기계적으로 잇대어 담배를 태워 오고 있었다. 꺼뜨려서는 안 되는 무슨 신성한 불처럼. 한참의 침묵 후에 그는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째서 내 주문을 받아들였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이런 용단을 내릴 수 있었소?”
“정말로 몰라서 물으십니까?”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당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듣고 확인하고 싶소.”
이번에는 사내도 약간 성가심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노련한 배달원이었다. 사내는 새로운 서류철 하나를 꺼내더니 참을성있게 물었다.
“어디부텁니까? 어느 부분이 궁금하신가요?”
“처음부터…… 속속들이 다 ― .”
그러자 사내는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꺼낸 서류철을 넘겼다. 빠각거리는 소리로 보아 그 서류철은 비교적 질 좋은 종이로 최근 만들어진 것인 모양이었다. 사내는 여전히 쉰 듯하고 길게 끄는 여운을 가진 목소리로 읽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막힘 없이 읽어 나가는 사내가 왠지 그에게는 이상스럽거나 놀랍지 않았다.
“발단은 오 년 전의 어느 날에 있습니다. 그때껏 청백한 관리였던 선생은 그날 밤 업자들과의 달갑잖은 술자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납니다. 선생께서 최초의 주문을 내게 한 그 여자, 오래 잊고 있었던 선생의 옛 상처…… 청운동의 어느 비밀 요정이었는데, 이미 사십을 넘었지만 선생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의 소위 ‘얼굴마담’이었지요…….”
“…….”
“그녀의 남편은 그 당당하던 위세도 소용이 없이 그녀가 채 삼십 대도 벗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자식들과 홀로 풍상을 겪던 그녀는 그곳으로까지 흘러왔던 것입니다. 연민, 연민이지요.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입니까? 누가 그 농염한 사십대의 요정 마담에게서 이십 년 전의 이지적인 불문학도(佛文學徒)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쓸쓸한 이야깁니다…….”
다시 세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그가 쓰게 웃었다.
“정말 당신들은 모르는 게 없군.”
“사업이니까요. 하여튼 ― 그날 그녀를 대하게 된 선생의 눈에는 남모르게 눈물이 고였다고 이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격렬했던 분노와 원한도 세월의 비바람 앞에서는 무력 했던 게지요. 선생이 그 밤 그녀에게서 본 것은 오직 인생의 우수와 허무였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당신들이 머무는 곳에는 어김없이 찾아들며, 때로 그것들은 당신들을 너무 일찍 저희들의 고객이 되도록 설득하는 폐단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 밤 선생에게서처럼 그렇게 명백히 인식되는 일은 드물지요. 그리하여 그것들은 선생을 그 한밤 그녀와 통음(痛飮)으로 지새게 합니다·…….”
그는 거기서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담배를 빨았다. 사내는 계속했다.
“그런데 나쁜 것은 그다음 그런 선생의 감상이 돌연 그녀에 대한 분별 없는 애정으로 재생된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십 대의 비련(悲戀)에 대한 추억과 사십 대의 욕정이 야합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당신들은 밀회를 거듭하고 그날로부터 선생이 애써 쌓아 올린 관리로서의 기반은 침식되기 시작합니다. 선생은 그녀와의 비용이 많이 드는 밀회를 위해 그때껏 외면해 오던 관료의 고질적인 병폐 ― 부정부패 ― 와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원래 그런 것은 발전하기 마련이지요. 선생의 수회(收賄) 액수는 점차 커져 갔고 횟수도 잦아졌습니다. 그때는 마침 이 나라가 해외로 한창 발돋움하던 무렵이라 선생의 직위는 많은 업자들의 매수 대상이기도 했지요. 특히 자기의 요정을 갖고 싶어 하는 그녀의 희망을 들어주기 위해 선생이 × ×물산과 한 거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을까?”
불쑥 그가 물었다.
“물론 경찰이나 검찰은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생에 대한 내사(內査)가 시작된 이상은 그들도 조만간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까? ― 그럴 테지…….”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선생이 회복한 것은 실패했던 옛사랑이 아니라 끊어졌던 그녀와의 악연(惡緣)이었습니다. 선생이 차지한 것은 겨우 아무래도 죽을 수 없었던 그녀의 천한 몸과 추억 속에서 터무니없이 미화된 영혼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던 겁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의 망나니 특무 대장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생명을 구걸하며 몸을 맡길 때 선생의 그녀는 이미 죽었던 겁니다……. 이 년 전이지요. 무엇 때문인가 선생이 얼마간 그녀를 찾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요정을 처분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선생은 흥신소에 의뢰해 그녀의 행방을 찾아냈습니다만 오히려 찾지 않느니만 못했지요. 선생보다 십 년이나 젊은 남자와 어울린 그녀는 시내 복판에다 버젓이 요정을 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남자는 선생에게는 치명적이 될 권력기관의 사람 ― 그녀에게 들었음에 분명한 선생의 약점으로 분노하여 달려간 선생을 간단히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차라리 허탈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허탈은 선생을 무절제하고 맹목적인 탐락(貪樂)으로 몰아갑니다. 선생은 전보다 더 서슴없이 부정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앞뒤 없이 술과 여자 속에 흥청댑니다.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나이도 부인과 자녀들의 애소(哀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선생에게도 더 이상 손을 벌릴 수 없는 고객이 늘어 가고 서정쇄신의 바람은 새로운 수입원(收入源)을 봉쇄해 버렸습니다. 메울 길 없는 빚이 몇 배씩 불어나고 악랄한 옛 고객들은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점차 선생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선생의 지위 부근에서는 끊임없이 잡음이 있었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내사(內査)도 몇 번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 한계를 느낀 선생은 선생대로 얼마 전부터 단판 승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 번의 큰 부정으로 선생의 전 재산보다 더 많은 부채를 해결하고 직위에서 물러날 작정이었지요. 그리고 그런 선생의 성급한 결정이야말로 이번 주문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어. 사실 나는 단념했던 거요.”
그는 우울하게 말했다.
“아니지요. 지금 와서 따져 봐야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까지도 수습은 가능했습니다. 이번 일은 확실히 무모했습니다……. 선생은 전부터 돈을 받고 하는 수입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습니다. 현대 산업의 역기능 ― 공해(公害)의 수입이지요. 그러나 선생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막연히 유해하리라는 정도일 뿐 이제 밝혀진 것처럼 태워도 안 되고, 땅에 묻을 수도, 물에 버릴 수도 공중에 날릴 수도 없는 그런 지독한 것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야.”
“그러나 선생이 설령 그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됐지요. 선생의 부정을 냄새 맡고 그걸 속속들이 알아낸 유령 수입업자의 일단이 선생을 위협해 온 것입니다. 결국 선생은 기대에 비해 형편없는 금액으로 그들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무엇인가를 재생해 쓸 수 있다고 했는데.”
“핑계에 불과하죠. 처음부터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원래 그 물건은 재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걸. 그들이 노리는 건 저쪽에 쥐어 주는 몇 푼의 달러 ― 자기들 국내 처리 비용의 삼 분의 일도 안 되는 톤당 십 달러 내외 ― 그 자체였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그들이 받은 몇 배를 들여 그 산업 쓰레기를 처분해야 할 겁니다.”
“그들 중 몇몇은 찾아간 걸로 아는데?”
“그들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으니까요.”
“무슨 이유?”
“두 가집니다. 하나는 폐유 속에 다른 물건을 집어넣어 들였기 때문인데 대체로 부피 적고 상할 염려 없는 귀금속류였지요. 그리고 다른 한 이유는 당국이 알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으로, 최근 잦은 담수어의 원인 모를 떼죽음이나 연안의 돌연한 오염 중에 일부는 그들 솜씨지요.”
“수사는 누구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소?”
“수출한 나라의 양심적인 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국회에서 떠들고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 나라에도 알려진 거지요. 물론 수입품의 이유 없는 방치나 조잡한 용기(容器)에서 흘러나온 그 물건의 악취가 벌써부터 당국의 후각을 자극하고는 있었지만.”
“그래,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소?”
“누구 말입니까? 그 수입업자들? 그들은 대부분 벌써 오래전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 중 상당히 큰 업체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재빨리 뻬내 처리해 버린 축입니다. 재처리해서 유익하게 사용했다고 우길 테지만, 글쎄요……. 그리고 그 나머지는 기껏 전세 건물에 임대 전화와 체불된 임금이 전부인 유령 회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에 빼낼 수 있는 대로 빼내 멀리 사라져 버렸지요.”
“그들이 이왕에 사라져 버렸다면 오히려 내겐 잘된 일 아니오? 직무상의 착오란 있을 수 있는 거니까. 기껏해야 면직밖에 더 되겠소?”
“안일한 판단입니다. 그들이 가 봐야 어디겠습니까? 늦든 이르든 그들 중 일부는 잡힐 것이고, 또 그 사람은 몇 푼이라도 선생에게 뇌물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상상과는 달리 그들은 이제 선생의 부정(不正)에 매달릴 겁니다. 이런 경우 급한 것은 선생 쪽이고 그래서 선생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으로 이 일을 무마해 주리라는 이상한 미신이 그들에게 있으니까요.”
“어리석은 사람들…….”
“그러나 일은 너무도 엄중히 확대되어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일을 무마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선생은 형사소추(刑事訴追)를 면하지 못할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소. 하지만 대단한 건 아닐 거요. 한두 번 소란스러운 재판만 거치면 기소유예나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겠지. 못되어도 병보석 정도는. 적어도 나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누구 못지않게 충실한 공무원으로 이 나라에 봉사해 왔으니까.”
“혹 그렇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더 있단 말이오?”
“몰수와 부채만으로도 선생은 파산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찾기에는 선생은 너무 늙었고 의지해야 할 아드님은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지요. 거기다가.”
“거기다가 ― .”
“지금 약혼 중인 맏따님은 아마도 파혼당할 겁니다. 원래가 선생에게는 좀 과분한 혼처였죠. 이제 결정적인 구실이 생겨 준 셈입니다. 그리고 뒤를 이을 추문(醜聞), 추문…….”
“…….”
“머지않아 선생의 부정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면 기자들은 그 이 면을 추적하겠지요. 무절제한 사생활이 드러나고 어지러운 여성 편력이 지상에 공개될 겁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낼 판에, 각 주간지들은 선생의 추문을 도색(桃色)으로 처리해 몇 번이고 우려먹을 겁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나이에 있는 아드님이 진실로 염려됩니다…….”
“그렇겠지…….”
여기서 그는 망연히 거리의 불빛으로 훤한 창틀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잠시 그런 그를 무감각하게 살펴보더니 이내 빈정거림과 득의가 묘하게 혼합된 억양으로 말했다.
“이제 저희 판매부의 결정이 온당했다는 걸 믿으실 줄 압니다. 자 선택을 하시지요.”
그러나 그는 상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막연하게 대꾸했다.
“아무거나…….”
“그래도 ― .”
“글쎄 상관없소. 수령증이나 이리 내시오. 서명을 해 드릴 테니.”
그러자 사내는 못 이긴 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되는대로 서명했다.
“그럼 저희가 권하고 싶던 걸로 남겨 두고 가겠습니다. 부디 만족하시길 빕니다.”
사내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돌아서더니 출구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 나갔다.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비로소 그 사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그 음산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떤 낯익음이 느껴지던 이유도.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는 그 사내를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의 상품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미처 그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사내는 짙은 어둠 속으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부지런한 청소부에 의해 의자에 앉은 채 숨져 있는 그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 밤 거기서 일어난 것은 오랜 억압자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영혼과 애써 그것을 잡아 두려고 하는 육체간의 피투성이 싸움이나 아니었던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의사가 짧은 검시(檢屍) 끝에 그의 사인(死因) 란에 적어 넣은 글은 이런 것이었다.
“심근경색(心筋梗塞)…….”
(1979년)
2016년 11월 3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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