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중국에서 신부 서품을 받고 첫 발을 디딘 곳이 익산 망성면의 화산천주교회다. 이곳은 나바위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곳이어서 최근에는 아예 명칭을 나바위성당으로 고쳐서 부른다. 김대건신부는 이곳에서 잠시 머문 뒤, 서울로 가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잡혀 순교를 하게 된다.
이곳은 강경과 익산의 접경지다. 이 말은 강경을 사이에 두고 금강이 흐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곳에 중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을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다만 현재는 화산천주교회가 있는 곳이 강가에서 그래도 1km정도는 떨어져 있는데, 그 때는 물이 여기 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문제만 남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정말로 믿어진다. 왜냐면 화산천주교회가 있는 동산과 금강의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온통 논 뿐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물이 들어왔을 것이 당연스럽기 때문이다.
산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배를 대고 밧줄을 묶어두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말은 과장된 말이다. 그 바위에 배를 매어 놓았다면 물위로 올라온 육지가 아주 적은 양, 즉 산꼭대기까지 물이 찾었다는 말이니 배에서 내려 다른 곳을 갈 데가 없었을 것이기에 그 말에는 수긍을 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것은 이해를 돕는 이야기일 뿐이며, 사실은 배를 타고 와서 처음 안착한 곳이 망성면 화산리였다고 알면 될 것이다. 망금정의 바위가 밧줄로 묶이면서 닳아서 움푹 패인 자국이 있다고 하는게 그것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산꼭대기에서 금강을 바라보면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고, 강과 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 건물 옆에서 나무 사이로 바라보면 강물이 보인다. 물론 나무에 가려져 넓은 조망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저기가 금강이라는 것을 알고 쳐다보면 금강의 하얀 물결이 보이는 곳이다.
성당의 내부는 예전에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에 지어진 것이므로, 중앙에 기둥열이 있고 좌우로 배치된 좌석이 있다. 이른바 남자석과 여자석이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는 양쪽에 복도가 놓여있다. 이 복도는 한쪽은 성당의 건물에 의지하고, 한 쪽은 그냥 벽이 없이 바람을 맞고 있는 형태다. 이 성당은 전주전동성당을 설계한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중국인 기술자가 공사를 하고 한국인이 노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는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었다는 반증이다. 하긴 오래된 성당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낯선 것과도 상통한다.
한때는 이 성당의 관할 교인이 3,000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인구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현재와 견주어도 아주 대단한 숫자로써 망성은 물론 인근 지역 대다수가 화산천주교회 소속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익산시를 비롯하여 인근 강건너의 강경과 금산, 완주를 넘어 무주까지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자료를 연구하지 않은 나 혼자의 생각이지만, 조선시대에 여산천주교성지에서 순교한 사람 중에 무주지역 신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성당 뒤의 언덕에 오르면 망금정이 있다. 글자 그대로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망금정을 주춧돌처럼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는 세 부처를 음각하고 있다. 이른바 3존마애불이다. 가운데 부처는 비교적 뚜렷한데 양 옆의 부처는 잘 보아야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말하자면 성당 울타리 안에 마애불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마애불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내용이 별로 없다. 그냥 그렇게 있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 바위의 소유는 나바위성당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