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무애(理事無碍)
이사무애는 화엄경에 나오는 네 가지 법계 중 하나다.
그 뜻은 진리의 세계(理)와 세속의 일(事)이 서로 장애가 되지 않고, 서로 방해가 되지 않고, 서로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 해탈, 열반의 세계의 세계다.
세속의 일이란 일상의 삶, 개인, 가정, 사회와 같은 관념의 세계다.
두 세계가 서로 어울리고, 함께하고, 동전의 양면과 같고, 결국 하나이고, 나아가 현상계는 진리의 세계가 밖으로 나타난 것(顯現)이라고 그럴듯한 설명들을 한다.
이렇게 이사무애를 뭔가 심오한 이론처럼 그럴듯한 교리를 설파하는데, 사실 이것은 어리석은 관념주의자들의 해석이다.
그럼 이사무애의 진전한 의미는 뭔가?
쉽게 설명하면,
깨달음 사람, 진리의 세계에 든 사람, 해탈 열반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는 현상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깨달은 사람은 자아의 소멸, 개체성의 소멸, 무아에 도달한 사람인데, 그럼 그는 어떻게 행위하는가?
개체성이 소멸했는데 그도 여전히 밥먹고, 똥싸고, 잠자고, 나와 똑같이 행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깨달은 그의 행위와 못 깨달은 나의 행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기에 대해 주로 거울의 비유를 든다.
어떤 현상이 거울에 비추더라도 거울은 외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반응하지도 않는다.
현상이 비추면 그대로 비추고, 현상이 사라지면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은 텅 빈 공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은 세속에서 도피하여 깊은 명상에 들어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깨달은 사람은 지금 여기(now and hear)에 산다.
그에게는 과거에 대한 회한도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다.
그에게는 자신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한 줌의 에고도 없다.
만약 그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건 타인에 대한 자애와 연민과 같은 순수한 욕심이다.
그도 세속을 살아가지만 세상이 티끌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아비담마 첫 장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실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관념적 실재(sammuti)와 궁극적 실재(paramattha)이다.
궁극적 실재에는 나, 너, 개아, 개체적 자아가 소멸한 열반의 세계다.
관념적 실재는 나, 너, 개아, 자신, 타인, 남자, 여자, 아들, 딸, 가정, 화폐의 가치, 코인, 명예, 지위, 가격, 경제와 같은 세속의 모든 관념의 세계다.
그럼 모든 관념이 소멸한 궁극적 실재에 도달한 사람은 세속의 모든 관념을 부정하는가?
깨달은 이는 관념의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는 성관계와 같은 세속적 행위가 가능할까?
여기에 대해 대승 화엄경에서는 가능하다고, 두 가지 일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남방불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남방불교에서는 사다함까지는 욕망의 세계에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아나함은 세속에서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라한은 세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이도 여전히 밥먹고, 똥싸고, 잠자지 않는가?
여전히 이런 저런 의도가 일어나 행위하고 있지 않는가?
내면의 행위자가 소멸했는데 어떻게 행위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여기에 이사무애의 교리를 들먹여 설명한다면,
구경의 진리에 들었지만 세속의 관습적인 행위를 거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일어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관습적인 일은 그대로 따르지만 내면은 항상 텅 빈 열반의 세계에 들어있다.
어떤 사람이 대주혜해 선사에게 물었다.
"존자님 께서는 깨달은 도인이신데, 그러면 무아를 성취하신 분인데, 그러면 어떻게 행위를 하십니까?"
"배 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첫댓글 _()_()_()_
고맙습니다 스님
사두ㅡ사두ㅡ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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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사두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