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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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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
지하선 시집 / 미네르바시선 34 / 미네르바(2016.03.0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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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1일
지하선
달력을 넘긴다 순간, 내 몸의 우주가 빙글 돌더니 갑자기 빅뱅이 인다
3072년의 낯선 행성, 지구상에 없는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한다
속도를 버린다 어둠을 해엄쳐 무중력으로 미끄러진다 어떤 현체도 빛도 보이지 않는다 현실과 내세의 모호한 경계에서 허공을 좁히며 부딪쳐오는 맞물림, ‘위험은 항상 네 곁에 존재하지만 두려움은 선택이다’* 우레의 말 바싹바싹 조여온다 두려움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무의식 밑바닥으로 잠입한다 한 생애의 울음이 술렁이는 스틱스강가, 쭈그리고 앉아 물에 잠긴 외로움을 들여다본다 바람의 흰손이 물속을 휘저으며 져낸 슬픔 한 덩이에 박힌 앵두 한 알, 첫사랑에게 선물로 준 나의 처음 입술이다 새콤한 풋내에 떨기만 하던 환영 속 촉각으로만 감지되는 붉은 도시, 사방으로 뻗어나간 길들이 타프롬사원의 나무뿌리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길들이 내 첫 몸의 대륙을 다 돌아 다녔는지,**,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원시의 숲으로 발정난 숨소리 뜨겁게 스며든다
나의 시간은 지워지고 오직 마흔아홉 너의 시계만 도는 태초의 행성에서 세상에 없는 단 한 번의 천년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 걸까
소금 눈썹처럼 버석거리는 그 시간의 한 끝을 잡고 허둥지둥 속도를 잡아당기려는 네가 보이는데
*‘After Earth’ 영화의 주인공 대사 인용
** 김경주의 시「워크맨속의 갠지스」에서 인용
하울링howling
지하선
마음을 깨뜨리는 혼란한 의문들이 허공을 떠다녀요
심해어의 아득한 울음같이
뼈와 뼈들이 어긋나고
소리와 소리가 체위를 바꾸면서
슬픔보다 더 짙게
종잇장보다 더 얇고 팽팽해지는 심장이 스며들면요
태초의 깊은 고요에도 금이 간다네요
바람 가득 찬 골목이
그믐밤으로 휘어질 때
조금씩 벌어지던 시간의 틈새로
말이 나오기도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이
투두둑
바위 같은 함묵을 부서뜨리면요
세상은 요란한 불협화음에 귀를 잃고
나도 그 위태로운 그늘에 걸려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요
편애偏愛와 부재不在 사이
지하선
깁스한 왼팔, 통증의 농담濃淡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급경사로 쏠리는 왼쪽 해구 밑바닥으로부터
섬 하나 올라온다
시간과 공간이 압축되고
어떤 상황에도 철저하게 단절되는 그곳
섬이란 역할을 하기엔 이름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거기엔 상처 깊은 고요가 산다
게으른 시간의 그물에 걸려, 빈둥빈둥
외곬으로 흐르다가도
얼기설기 징거맨 몸 부딪쳐오면
통증의 칼, 미친 말 날뛰듯 휘두르기도 한다
섬 끝자락에서 튕겨져 나간 균열의 조각들
뒤틀린 암벽으로 점점 굳어져 간다
신음이 도달하는 육지와
아픔을 걷어내는 시간의 크레바스
점점 벌어지며 멀어진다
흉터
지하선
배꼽아래 몸부림치는 핏빛 각인,
어미의 목숨대신에 엄지손톱만한 생명을
묻어야 했던 참담한 무덤이다
가끔씩 날궂이 하듯
허연 달빛을 들이키는 들고양이 소리에도
저릿저릿 감전되는 명치끝이 바스슥 타들어가는
날이면, 쿵쿵 대못 박히는 심장소리에
무덤이 깨어나고
주술처럼 맴도는 옹알이가
컴컴한 기억을 후벼판다
뒤틀리고 뭉개진 비문碑文에
꿈속에서나 귀를 대보기도 하는데
텅 빈 밤을 빨아대는 아기 울음이 들리는 듯
처절한 침묵에 짓눌린 피투성이가 보이는 듯
사라진 과거를 돌이키려고 허우적거리다가
허궁으로 빠져든다
지구 바깥
무의식의 경계 저 편
어디선가
살이 찢기는 시간의
날카로운 흐느낌이 들린다
지독한 공생
- 곤두기침
지하선
광풍을 만난 배, 몸통을 흔들며 뒤틀린다
선적한 짐들 한꺼번에 던져 보려야 하나 보다
성난 파고 치솟듯 온몸이 목구멍을 향해 쏠린다
비좁은 출구가 용틀림을 한다
밖으로 통하는 구멍이란 구멍, 일시에 터진다
눈 부라리며 볼꼴 못 볼꼴 헤매던 눈알, 붉으락푸르락
엽기그림을 그리는 안면근육을 뚫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간다
알게 모르게 찢긴 상처들이 부글대다가 곪아 터지나 보다
오장육부와 폐부를 관통하며 목젖 뚫고 흘러내린다
심장이 천둥치듯 울어대더니 급기야는 기억의 숨통을 거머쥔다
쉼 없이 내다 버리고 지워도 여전히 과적인 선체, 가리산지리산
감각 잃은 몇 겁의 시간이 고통을 건너가려고 사투死鬪를 벌인다
열에 들끓는 회전조류, 빙빙 향방 잃은 돛대를 부러뜨린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구 쪽으로 기울어지는
난파 직전의 배 한 척
뱃전에 부서지는 절규, 처절하다
詩를 앓다
지하선
엎드린 개처럼* 배를 깔고 턱을 괴고
정오를 지나 오후의 햇살이 어둑발에 쫓겨갈 때까지
시공이 망망한 우주 어디쯤 서있을 그의 그림자를 따라가요
가까이 다가갔다고 여겼을 때 훅 끼치는 진한 독기에
현기증 어찔하게 빠져버렸어요
길도 없고 쉼터도 없는 땅도 아니고 허방도 아닌
보이지 않는 바닥을 찾다가 현실도 끼니도 지워졌고
짹깍거리는 초침소리만 남았어요
꽉 조인 나사처럼 두통으로 잠겨진 빡빡한
머릿속을 조금씩 풀어 봐요
가슴 깊이 녹아 있던 갈등을 졸이고 졸이다
까맣게 탄 재 프시시 날아요
무덤 속을 드나들던 창백한 꽃무늬 보여요
어둠에 물든 불빛이 창문을 두드리는 손끝에서
찰나로 스치는 그의 뒷자락 가늘게 떨려요
복통 앓듯 배배틀던 하루가 온새미로
몸통 잘린 지렁이 꿈틀거리듯 해요
으스스 한기가 돌아요 명치끝이 시려와요
*문태준의 시제목에서 인용
미이라 놀이
지하선
몇 천 년 개켜 놓았던 죽음을 한 꺼플씩 벗기며
게임을 해요
두터운 어둠이 감춰놓은 전생의 한 컷씩 이승으로
전송될 때마다 이집트 왕조였다는 스펙은 공주로
부풀려지고 뜨겁게 돌아가는 눈빛들의 지폐가
게임상자에 쌓여가죠
눈부신 햇살이 환생의 미로를 더듬어가요
원시벽화처럼 길 잃은 발자국을 긁어내고
허방이 된 몸으로 잃어버린 계절을 들여다보내요
그의 목줄을 잡고 있던 침묵의 껍질을 벗기니
보일락 말락 달싹이는 입술을 비집고
신음로 드러나는 속살의 기억이 질질 끌려 나와요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에서 허벅지까지 죽음이 흘러내려요
불안하게 일렁이는 사타구니의 주름살이 보여요
팽팽해지는 긴장감이 공주라는 마지막 자존심 한 장을
들춰내는 순간,
게임은 끝나고
긴긴 그늘 속에서 숨죽였던 남근男根이
신열을 앓듯 소용돌이치며 지구 최초의 성기인양
태양을 향해 불을 지펴요
충격 먹은 지폐들은 허공으로 마구 날아오르고
강한 독성의 주검냄새 어디선가 몰려와요
당신이 죽은, 5분후
지하선
오다가 머뭇거리는 시공이 어스름하게 보일 때
어둠과 빛의 이중 커튼이 열리네요
뒤돌아보지 마세요
지금 마악 당신의 뒷모습이 포장되고 있어요
이제 당신은 낯선 무대에서 재연再演돠는
당신의 또 다른 연기를 보게 될 거예요
겉치례에 연연했던 당신의 거추장스런
꺼풀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군요
깡마른 뼈들이 부딪치면서 상처 깊은 인연을 찌르네요
당신이 놓친 것들의 후회와 버린 것들의 미련이
풀다 팽개친 문제들처럼 너덜거리는군요
당신의 마지막 오후는 햇살 꺾인 골목에서
흥뚱항뚱하다 고삭부리로 곤두박질치고 있어요
시간의 크럭스*에서는 창백한 계절의 숨결이 들려요
당신의 길에 찍혀있는 발자국마다
언걸먹은 이승의 그림자
흐릿하게 보여요
아직은
*등산용어로 루트 등반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지점
신발의 엘리지elegie
지하선
길의 자궁이 된 그녀, 수많은 길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면서
깎여지고 헐거워질수록 더욱 더 밀착되는 매력이 드러난다
좌우로 번갈아 몸을 풀 때마다
탯줄을 자르기도 전애 또 다른 길을
잉태하는 다산의 그녀
힘겨운 생계의 비탈에서
퉁퉁 불은 발자국의 허리를 잡고
똬리를 튼 기형의 길을 난산하기도 한다
비딱하게 닳아버린 기억을 되짚어 방황하다가
캄캄하게 얼어버린 어둠의 발길질에
팽글,
뒤집혀지는 시공이 밤의 발톱에 찍힐 때
그녀의 굽은 등이 쩌억쩍 갈라지는 소리
시간의 벼랄 끝에서 요동치며 비틀거린다
검은 심장 위독해 진다
버려진 거울
지하선
쨍, 그녀의 전신으로 햇살은 수없이 금을 긋는다
누군가의 한 생애가 햇살 한줌으로 부서지고 있는 걸까
눈빛이 깨어지는 순간, 스쳐가는 기억의 발자국을 읽었는지
무심히 지나치려는 나의 발목을 그녀의 시간이 잡아당긴다
평생 가슴앓이로 숨겨온 그녀의 슬픈 가계가 적힌
나선의 길이 종아리를 감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뭐라 중얼거리며 찰싹 달라붙는 살 냄새에서
저승의 냉기로 오싹 소름이 돋는다
죽어서야 입을 여는 조개처럼 그녀의 입안에서
홀로 감당했던 처절한 밤이 빠져 나온다
한 발씩 생의 가장자리로 끌려가는 헐떡거림이
황량한 허공을 가로지르며 폐부를 찢는다
전전긍긍, 고요의 깊이를 견디지 못하고
등 뒤의 유혹에 무너져 버린 오르페우스처럼
깨진 영혼의 파편들이 저승의 나락으로 내리 닫는다
상형문자로 얽혀있던 핏줄의 마지막 유음遺陰이
끊임없이 몸속을 돌고 도는 영원한 미완성의
네바엔딩 스토리
기다림은 다시 발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나보다
*never ending story 영화 제목에서 차용.
삼계탕蔘鷄湯 끓이기
지하선
그녀의 풍만한 몸통, 그의 손안에 있다
발가벗겨진 그녀의 온몸을
감상하듯, 애무하듯 어루만지다
살과 살의 날선 마찰
품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섬세한 손끝에서
최면에 걸린 그녀
무감각, 무아경에 호흡이 멎는다
그녀의 텅 빈 가슴에서
어둠을 쓸어내며 속삭이는 그 사내
내가 네 안을 채워줄 거야
그녀의 몸 안에 수상한 씨앗을 심고
깊고 오랜 상처를 징거맨다
희고 붉은 씨앗들
뜨겁게 달아오르는 수액 속에서
싹 틔우고 꽃 피우며 환해진다
달덩이 떠오르듯 부풀어 오르며
불빛의 하얀 무늬를 입고
그의 앞에
살신공양殺身供養하는, 그녀
사이비 교주 앞에 무릎 꿇듯
고즈넉하다
상생의 날개 1
- 수영장에서
지하선
엎치락뒤차락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내게 누군가 소리친다
물을 꽉 잡아야 해요
매끄럽게 빠져나가기만 하는 검푸른 얼굴
훤히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의 솔직한 속내는 읽을 수 없다
뜨거운 밀어도 그에게 닿자마자 튕겨져 나간다
투명한 절정을 향해 그의 몸속을 겨냥하지만 번번이 허탕이다
관절 구석구석 달아오르는 몸의 언어가 발광을 한다
점점 충혈되는 눈, 아래로 아래로 깊어진다
풀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 예리한 한마디가 경련을 일으킨다
조급한 마음의 물살이 소용돌이친다
예민해지는 가랑이 사이로 그를 힘껏 밀어본다
휘익, 급회전하며 그의 중심부로 돌진해 들어간다
거친 숨결이 피를 토하듯 솟구치며 온몸을 덮친다
뭉클, 내 손 가득 잡히는 그의 심장을 느낀다
그가 내 안으로 내가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둘의 삶이 하나로 시작되나 보다
서로에게 격렬했던 시간이 바닥에서 서성일 때
거꾸로 걷는 그가 하얀 물꽃을 낳는다
상생의 날개 5
- 스킨스쿠버skin scuba
지하선
그는 물의 습성을 잘 다룰 줄 아는 노련한 해부 검시관이다
그의 최첨단 장비는 시간의 자루 끝에 달린 강인한 폐활량과 독특하고도 예리한 눈빛이다 비록 초점 없는 무영등이지만 뛰어난 감각의 초고속 메스로 수억 겹 물의 표피층을 수직으로 가르고 어둠의 고통 덩어리들을 꺼낸다
물은 원래 잡식성이며 위하수증이라는 고질병이 있어 닥치는 대로 마구 삼켜도 위장은 그 크기만큼씩 늘어난다 또한 태초부터 진화해온 위장의 소화액은 성능이 무척 강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내용물 분석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빠른 시간 내에 해부를 하고 검시를 하여 원인규명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바다는 달이라는 연인이 있어 한 달에 두 번은 바다의 몸을 바짝 끌어안기 때문에 그때마다 흥분하는 바다, 몸을 뒤틀고 뱃가죽을 오므렸다 폈다 용틀임을 하는데 위장의 유동운동이 폭풍치듯 함으로 검시관들의 해부작업이 늦어지기도 하고 갈팡질팡 방황하기도 한다 심해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해야 하는 고달픈 나날들, 발버둥이는 바다를 안고 가위눌리는 밤에도 자살일까 타살일까 우발적일까 계획적일까 길고 긴 사인 규명을 쓴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전말은 미궁에 빠지기도 하고 바다의 항문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검시관들, 괴로워하는 바다의 내심內心으로 내려*갈수록 상복 입은 검은 한숨만 명치끝을 꾹국 누른다고 한다
*황지우의 시「연혁」에서 차용
넬라판타시아Nella Fantasie
지하선
털있어요?
옷가게 주인이 모피 손질하는 빗을 사은품으로 주면서 불쑥 전진 한 마디, 갑자기 원시림이 열리고 오랑우탕 한 마리 멀리서 걸어온다
나의 전생에 뜬금없이 뛰어 들어온 털부숭이의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예고 없이 날아든 부음訃音처럼 우울한 날, 적막 한 자락 잡아 주었지 그의 시선 끝에 매달려 있던 내 옷의 체취를 어루만지며 잿빛 아픔을 달래주었지 꼬실꼬실 억센 하루가 곱게 빗겨져 그의 무릎 아래 살며시 뉘어졌지 두려움이 마비될 만큼 황홀한 저녁이 그리워질 무렵, 내 몸에서 하늘가지 그려진 지도를 따라 사라진 시간을 찾아 나섰지 지상에서의 날을 벗고, 샛노랗게 이글거리는 서쪽하늘 주름진 구름의 키를 돋우며 신비로 가득한 소행성으로 가는 길, 영혼의 한 끝을 잡고 은하를 건넜지 가슴 졸이는 바람의 시간 접었다 폈다 하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챠르르 밀려오는 첫 키스의 버거움, 나의 뒷면에 새겨놓았지
아직도 아물지 못하는 생채기, 내 아린 기억의 자드락길에 긴 그림자 드리우고 바르르 온몸에 전율이 이는 환상보다 더 에로틱한
아슬아슬한
지하선
지하철 안, 여백을 휘감는 가냘픈 멜로디
힘겹게 흐느끼며 기어가는 긴 소리는 그의 눈이며 길이 된다
소리를 만난 사람들
그 길을 따라 흘깃 시선을 보냈다가 이내 거두어 들인다
굴신한 그의 몸은 이제 냉정에 익숙해진 바닥이 된다
그의 생계를 이어주는 바닥과 소리가 미치는 통로에서
하루치 살아가야 할 길이 불규칙하게 흔들린다
동면에서 뽀도시 눈 뜬 뱀인가, 허가를 뒤집애 쓴 채
불투명한 그림자가 지나온 흔적을 지우듯 꿈틀거린다
갈 길을 밝히 보이시는* 주님이 함께 가건만
그의 길은
흐느적대다 무릎과 무릎을 돌며 굽이치는 시간의 갈림길에서
다시, 머뭇거리고 있다
* 찬송가의 한 구절
오독誤讀
지하선
흰색의 껍질을 벗겼네
잡다한 빛깔들이 뒤엉켜 있는
그의 정체가 드러났네
빛의 파정과 속도가 깨어진
태양과 망막의 미로에서
머뭇거리며 방황하기 시작했네
나는 우주 밖 어디쯤 서 있는 걸까
내가 왔던 길과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잃었네
기억에 붙어 있던 빛깔들을 하나씩 떼어내서
퍼즐을 맞추듯 재구성해보네
깨진 유리조각보다 더 날카로운 빛의 조각들
까맣게 타 버린
어제와 오늘이, 해와 달과 별들이
정수리로 쏟아지며
어지럽게 빙글 도네
흰빛의 뒷면, 태초의 혼돈이
벌거벗은 밤의 긴 통로를 긁고 있네
불확실한 거리距離
지하선
정전으로 불편한 날, 계단을 짊어지고 숨 가쁘게 올라가요 십 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무릎 꺾이는 한층 한층이 오지奧地에 첫발 딛는 것처럼 생경하네요 당신도 나를 처음 본다는 듯 통로 한쪽을 터주며 힐끗거리네요 수직하강으로 빠르게 왕래하는 편리함이 높은 담장으로 군림하고 있음을, 계단과 계단으로 이어지는 수직선상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도 오랜 세월 잊고 있었군요 내 욕심껏 쌓아놓은 무게들이 힘을 과시하며 당신을 딛고 즐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한 컷씩 드러나네요 내가 엎드려 있는 그 아래서 당신도 엎드리고 엎드리고 겹치고 포개어진 두께로, 소리와 소리로 연결된 하나임을 알았어요 나의 비밀이 당신의 귀를 타고 흐르고, 나 역시 당신의 비밀을 슬쩍 빼내어 보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주치면서도 만난 적 없는
두터운 벽속의 당신
밀착되어 있지만 마주 닿을 수 없는
당신의 문 앞과 나의 현관
항상 나의 반대편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늦가을 연인의 헤어짐처럼
영원한 남의 편
당신
사랑의 느와르noir
-수컷 바우어새
지하선
빵빵한 재력에 화려한 스팩, 젊음의 킹카로 군림한다는 그 남자
사랑의 건축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요.
당신을 위한 집은 친환경 태양의 빛만 모았어요.
맑게 갠 하늘의 늑골로 기둥을 세웠고
구름의 깃털을 뽑아 최신형 침대를 엮었지요.
당신만의 입구에는 산딸기 즙이 뚝뚝 흐르는
나의 푸른 노래로 차임벨을 달았어요.
달콤한 그물에 걸려든 그녀, 한 밤의 절정에서
하니 문門이 터뜨리는 꽃들을 본 듯 했다지만
벌거벗은 그의 심장에선 냉혈이 흐르고 있었지요
몇 줄의 기억마저 싹둑 잘라 버리는
그 잔인한 손으로
철저하게 은폐한 바람의 한 소절이었다네요
캄캄한 침묵 속에서 환상방향* 하던 그녀
나의 반대편에 온통 거짓만 산다고
미친 광대처럼 허기진 웃음만 흘리더니
버림받은 상처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어지는 불확실한 내일
불안한 무릎이 꺾일 때마다 동굴을 만들고 동굴을 뒤집어쓰고...
*Ringwonderung(링반데롱) 방향 감각을 잃고 한 지점을 맴도는 상태를 가리킨다.
요강나물꽃*
지하선
어릴 적, 고향집 바깥채에 살던 새색시의
엉거주춤 요강타고 떨어지는 붉은 꽃잎 보았었지
지층이 흔들리듯 놀랍고 무서워, 몇 날 밤 끙끙
남몰래 속 끓이며 앓았었지
사춘기 내게서도 그 비밀꽃이 점점이 피었지
소름 돋는 두려움에 뒤란 우물가 그믐달 그러쥐고 피울음 삼켰었지
처음으로 여자의 허기를 안, 그 공허의 밑바닥에서 꽃잎이 차오를 때면
긴긴 겨울밤, 냉랭한 윗목에서 찰싹 엉덩이를 받아주던
꽃무늬사기요강, 심심산천 어느 골짜기에 버려졌나
외로움도 슬픔도 오래 묵히면 깡마른 풀씨 같은 그리움이 된다지
달빛아래 희부옇게 엎질러진 그리움이 갈기를 세우고
내 몸의 골짜기 골짜기 헤매다가 꽃으로 환생했나봐
*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한 낙엽 소관목. 주로 설악산 이북에 분포함.
가시 돋친 어느 날
지하선
어느 시인의 평론을 읽는다
시인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는
울음 한 점을 조각조각 해체한 뒤에
늦가을 하늘보다 더 창백하고 더 팽팽해지는
아기 울음을 해석해 내듯이
시의 일생을 퀼트하는 솜씨
그 맛이 일품이다
달콤쌉쌀 새콤매콤
잘 발효된 말의 맛
때로는
출렁이는 바닷물이 혀를 타고 흘러드는 듯
미묘하고 짜릿한 그 마력
그러나 시간의 잇자국마다
가시가 씹힌다
혀끝이 쓰리고 아리다
오래도록
비릿한 선혈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소리의 내면으로
지하선
숲속 고요는 태초의 화폭
그 속으로 들어가 풍경을 연주하며
나는 계절의 줌렌즈 안에서 한 컷이 된다
아주 오래된 어제에서 너에게 이르고 싶은 내일까지
소리의 물결로 출렁이는 시간의 흔적을 음미한다
되짚어가는 오솔길엔 너라는 등이 켜지면서 가슴 뭉클하게 전율한다
층 층 층 돌층계 사이사이로 화음의 무늬 새겨지고
돋을새김으로 짜릿한 절벽에는 빼곡한 꽃의 노래들이
나를 밀고 간다
연보랏빛 너의 리듬이 한 음절씩 발끝을 건드릴 때마다
감미로운 숲으로 울울창창 자라가는 너와 나
가슴 가득 차오르던
고요가 부러지는지
천 길 벼랑 아래
유령으로 떠도는 너의 메아리가
숭어리진 꽃잎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흩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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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나는 늘 시의 등 뒤에서
점점 작아지는 나를 본다
사는 내 안에서 가슴 떨리게 하는
첫 사랑이며 또한 그 아픔이다
밀착되어 있으나 마주 닿을 수 없는
불확실한 거리에서 맴도는 당신이다
첫 번째 시집으로 침묵의 껍질을
깨고 나온 나의 소리
미지의 그 하루에 도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퍼득거려 본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의 힘을 의지하여
상생의 날개를 펼쳐본다
2016년
지 하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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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선 詩集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
[ 해설 ] -
주체의 확장과 스밈의 미학
황정산(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근대 사회는 주체의 형성과 함께 발전해왔다는 것이 역사나 철학에서는 정설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이후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서양의 사상과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현대 사회에서 이 주체는 “욕망하는 나”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근대적 주체에 강요되는 합리적 이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욕망의 해방이 자유를 확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는 타자를 항상 전제로 한다. 나를 강조할수록 나 아닌 객체와의 대비가 더욱 강화되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의 주체를 강조할 때는 모든 비이성적 미신과 광기를 타자화했다. 욕망의 주체에게는 욕망의 대상은 모두 타자화된다. 그런데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므로 내 속에 수많은 타자를 담고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바로 이 타자를 어떻게 나의 것으로 주체화하느냐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인간소외의 문제나 인종 간 이념 간 갈등과 대립의 문제도 사실 다 여기에 연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루카치가 지적한 바 있듯이 과거 “별을 보고 길을 찾던 행복한 시대”에 시인들은 이러한 주체와 타자와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예지력과 직관을 가진 시인은 세상의 보편적 원리와 변하지 않는 진리를 파악하고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행복한 시 쓰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사연하는 사기이거나 목가적인 과거 세계로의 퇴행에 불과하다. 시인은 이제 끊임없이 틈입해 들어오는 타자들을 어떻게 자기화시키는가 하는 큰 과제 앞에 놓여 있다.
2. 주체의 확대와 시적 언어
이런 관점에서 지하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의 시적 언어와 거기에서 간취되는 인식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선 시인의 시는 시인이라는 주체의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와 그것의 성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의 자궁이 된 그녀, 수많은 길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면서
깎여지고 헐거워질수록 더욱더 밀착되는 매력이 드러난다
좌우로 번갈아가며 몸을 풀 때마다
탯줄을 자르기도 전에 또 다른 길을
잉태하는 다산의 그녀
힘겨운 생계의 비탈에서
퉁퉁 불은 발자국의 허리를 잡고
똬리를 튼 기형의 길을 난산하기도 한다
비딱하게 닳아버린 기억을 되짚어 방황하다가
캄캄하게 얼어버린 어둠의 발길질에
팽글
뒤집혀지는 시공이 밤의 발톱에 찍힐 때
그녀의 굽은 등이 쩌억쩍 갈라지는 소리
시간의 벼랑 끝에서 요동치며 비틀거린다
검은 심장 위독해 진다
-「신발의 엘레지」전문
주체에 의한 대상의 폭력성을 신발의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시이다. 시인의 신발을 보면서 위독해지는 심장과 굽은 등을 염려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항상 대상을 학대한다. 대상들은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본의 노예, 이윤의 수단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갑질의 횡포에 시달리는 을이 되는 현상이 바로 이것을 가장 잘 대변해보여준다. 지하선 시인의 시는 바로 내 인식 속에 들어와 나와 관계를 맺는 이 대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음을 깨뜨리는 혼란한 의문들이 허공을 떠다녀요
심해어의 아득한 울음같이
뼈와 뼈들이 어긋나고
소리와 소리가 체위를 바꾸면서
슬픔보다 더 짙게
종잇장보다 더 얇고 팽팽해지는 심장이 스며들면요
태초의 깊은 고요에도 금이 간다네요
바람 가득 찬 골목이
그믐밤으로 휘어질 때
조금씩 벌어지던 시간의 틈새로
말이 나오기도 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이
투두둑
바위 같은 함묵을 부서뜨리면요
세상은 요란한 불협화음이 귀를 잃고
나도 그 위태로운 그늘에 걸려
갑자기 목소리를 잃어요
-「하울링」전문
시인이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바로 시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가 다시 마이크로 들어가 잡음을 만들어내는 하울링처럼 내 목소리로 내가 말한 말들이 타자의 목소리가 다시 되어 들릴 때 내 말은 내 말이 아닌 낯선 것이 되고 만다. 현대를 사는 시인들의 고통을 지하선 시인은 아주 예리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나의 욕망 속에 타인들의 욕망이 끼어들고 내 욕망을 표현하는 말 속에 결국 타인들의 욕망이 자리잡아 무엇이 나의 언어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공포를 이 시는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들은 이제 “태초의 깊은 고요”나 안온하고 완전한 세계가 들려주는 위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요란한 불협화음에 귀를 잃고” 마는 지경에 놓여 있다. 바로 이 혼란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나가는 것 그것이 지하선 시인을 비롯한 현대를 살아가는 시인들 앞에 놓인 큰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인은 소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자이다. 그런데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그 안에 섞여 있는 타인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파악해낼 때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슬한 우주 끝에서 당신의 혀에 안겨요
당신은 고요롭게 쉬어 가라지만 첫날밤 신부처럼 떨려요
내 안 깊숙이 촉수를 뻗어 불온한 내면까지 속속들이 파헤치려는 당신, 잠깐만
착각으로 살아가는 내 마지막 한 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요
내가 곧 자연이며 태초의 순수 DNA라고 누대에 전하고 싶거든요
나만의 독특한 그 형용할 수 없는 달콤 짜릿한 내안에서는
당신이 탄생시킨 신비한 별이 소멸되기도 하지요
나의 흔적이 당신의 혀에 잠시만 찍혀 있어도
당신은 나의 영향권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것 아시나요
나는 계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니까요
나를 넘어서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정의 내리기 위해
성급한 시간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제발, 내 이름 안에서 나를 가두려 하지 마세요
나의 전생은 위대한 힘을 흠모하는 열렬한 빛이거든요
-「워터 소믈리에게2」전문
워터 소믈리에는 물맛을 감정하는 사람이다. 물론 특별한 맛도 일정한 형체나 색깔도 없다. 그것을 맛보고 감별하여 물맛의 차이를 알아낸다는 것은 대단한 감각을 요구한다. 시인에게 요구되는 감각도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우리가 쓰는 언어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도 따지고 보면 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는 그야말로 기표에 불과하다. 그 기표가 가지는 미묘한 기의를 찾아 감별해내는 능력은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그 능력으로 시인은 타인을 받아들인다. 물맛을 감상하듯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의 흔적을 추적해내고 나와 타인을 구별하고 나의 감각과 나의 실체를 확인하고 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언어를 가질 수 있다.
기의는 확정되지 않고 그것에 의해 파악되고 규정되는 나의 존재마저 불투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물맛에 수많은 광물들이 섞여들듯 기표의 수많은 연쇄 속에서만 기기의는 어렴풋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러한 의미의 연쇄 속에 헤매면서 주체의 감각으로 대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주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대상 즉 객체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의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바로 물이 워터 소몰리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대상을 주체화하여 그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인의 노력을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처럼 주체의 사고와 욕망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대상은 타자화된다. 그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거나 내 바깥에 존재하는 의미 없는 사물이 된다. 대상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의식 밖의 사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대상이 내 의식에서 소외될 때 그 대상으로 채워지는 나의 욕망이나 의식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데리다가 언어의 의미를 욕망의 환유적 연쇄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환유적 연쇄에서 오는 의미의 긴장을 끊임없이 밀고 나갈 때 우리가 파악하는 대상은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라는 확실한 주체의 입장에서 대상을 객체화하여 규정하면 대상과 나 사이는 분명해지지만 그 대상은 타자로 밀려나게 된다. 물이 소몰리에에게 “내 이름 안에 나를 가두려 하지 마세요”라고 애원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 지하선 시인의 시들 속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감각되어지는 모든 느낌과 생각들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인식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한정하지 않고 그 대상의 관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그렇게 해서 시적 주체는 무한한 확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초원을 달리면서, 먹고 낳고 존재하다가 사라졌던 쥬라기 공룡 알
언어의 온도를 높이며 다시 부화의 시기를 기다린다
팔딱거리는 심장이 그림자만 덮어놓고 엉덩이를 들고 떠난 그 곳
부화를 꿈꾸게 될 또 다른 공룡 알들, 서로의 관계는 항상 미지의
볼모지로 남는다
-「야릇한 소통」부분
위의 인용한 시구 “서로의 관계는 항상 미지의 볼모지로 남는다”라는 구절에서처럼 주체와 대상과의 끊임없는 상호 관계를 통해 시인의 상상력은 구획되고 확정된 영토를 넘어 끊임없이 탈영토화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지하선 시인의 언어들이 이룩해 놓은 가장 중요한 시적 성과가 아닐까 한다.
3. 스밈의 미학
대상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확산은 지하선 시인의 시적 언어를 통해 좀 더 감각적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을 보도록 하자.
당신의 진한 빛깔로 서서히 물들고 싶어요
햇살이 검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
당신의 외진 길이 주저앉아 피식 웃고 있어요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갈 길 그리고 지금 머무르고 있는
그 경계가 모호한 당신의 옆
모퉁이가 감추어 놓은 뒤쪽이 너무도 궁금해
접혀진 관절을 한껏 펴고 발 끝에 힘을 주어 뛰어오르며
가파른 상승기류에 편승했지요
옆을 밀치고 위로만 솟구치려는 욕망의 틈에서
당신과 나의 색상으로 넓게 채색된
둥글고 따뜻한 시간이 지워지고 있어요
더 나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수직의 끝에서
한 발짝 아차 하는 순간, 휘청
허공은 나를 바닥에 내던졌어요
이마에서 비린내가 쨍 콧속으로 몰려들었죠
막새바람이 휘어지는 캄캄한 그루터기 아래
망연히 서있는 슬픔에 기대어 세미한 울음에 귀 기울여 보며
잃어버린 방향을 가늠해 보았죠
우주 저편, 당신의 검은 행성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빛들의 함성
소낙비처럼 내게로 쏟아지고 있어요
-「그라데이션」전문
그라데이션은 색채가 농담의 점층적 스펙트럼을 이루며 배어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대상과 내가 스며드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 주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지난한 과정과 우여곡절을 거친다. 위 시에서는 그것을 “옆을 밀치고 위로만 솟구치려는 욕망의 틈에서/당신과 나의 색상으로 넓게 채색된/둥글고 따뜻한 시간이 지워지고 있어요”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체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처럼 충격적인 일이다. 때로 나의 안정감을 뒤흔들고 나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작에서 그것은 미학적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 발짝 아차 하는 순간, 휘청/허공은 나를 바닥에 내던졌어요/이마에서 비린내가 쨍 콧속으로 몰려들었죠”라는 구절은 바로 이런 미학적 모험의 아찔함을 표현하고 있다. 대상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스미게 만든다는 것은 자기만의 감각으로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대상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도 갱신하게 된다. 이러한 갱신 속에서 기존의 인식과 감각은 거부된다. 기존의 이름으로 불리워진 대상과 자신 모두 허공에 내던져진 위험한 상태로 비린내 나는 상처의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전략)…
나를 치장하는 말의 빛, 그 허리를 검은 쉼표로 자르도록 하는
배후엔 뱀파이어 같은 음흉함이 도사리고 있지요
이따금 그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치며
가던 길을 뚝 끊고 숨으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너털웃음 섞인 천의 얼굴로 저만치 앞장서서
기다리는 그를 끝내 버리지도 못해요
대낮에도 어룽지는 그늘을 끌고
침묵의 마디마디 먹물로 덧칠하는 그의 뒷면에는
시간을 갉아먹는 삐딱한 이빨이 숨겨져 있어요
신산한 등 뒤로 찍히는 말자국마다 신열이 돌아요
-「말 그림자」부분
스밈의 미학은 희미한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짙은 것, 분명한 것에는 항상 억압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질서와 규율과 종교적 교의는 간명하고 뚜렷하다. 그래야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할 수 있다. 그 틀과 계율로 인간을 억압하고 우리의 인식을 고정화시킨다. 질서와 규율이 시와 동떨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뱀파이어 같은 음흉함”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시간을 갉아먹는 삐딱한 이빨”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시인의 언어는 우리의 의식 속에 스며드는 미묘하고 흐릿한 그림자를 잡아나가는 무력하고 어설픈 언어이다.
바로 다음 시에서 말하고 있는 다뉴세문경이 바로 이와 같은 시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거울 속, 태양계 저편의 아득한 시간을 들여다 본다
희미한 반만년이 손 끝에 걸린다
겹겹으로 녹슨 시간을 끌어당겨 스윽슥 문질러 본다
침묵의 안쪽 깊은 심저에서 푸른 문양으로 떠돌던 그가
두터운 시공을 걷어내며 어른거린다
빗살무늬 세월이 내 귀를 더듬자 그의 발자국 소리 들린다
사랑이라는 말 그 알맹이를 찾아 수천 년 헤집어대던
12궁 별자리 열리고 그의 전생과 후생이 출렁거린다
동심원을 그리며 나와 맞닿는 순간
내 몸속에서도 예리하게 벼린 연민의 정이
나의 전생을 데리고 그를 향해 가는 것이다
이승의 뒤편에서 어둠을 휘감는 숨결 낯설지 않다
죽은 이름을 부르는 금속성의 울음이 시리게 파고 든다
내 삶 어느 구석에 화석으로 굳어있던 이별의 무늬 설핏한데
한 소절 부르다만 마지막 그의 노래가 비명처럼 목젖에 걸린다
몇 만년 전
그날의 해후가 재생되는 소리
무덤을 흔들며 따갑게 등골을 쑤셔대는데
나는 비몽사몽
그의 주술 속에서 헤매는 중
-「다뉴세문경」전문
다뉴세문경은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 거울이다. 뒷면에는 아주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양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한다. 녹슨 동판에 새겨진 문양은 어른거리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우리의 말은 노래가 되지 못하고 “비명처럼 목젖에 걸린다.” 그 곳속에 비친 내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명한 유리 거울처럼 내 외면을 그대로 반사시키지 못하고 구리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나의 내면이 비춰진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끝없는 주술 속을 헤매게 만든다. 그것은 세상을 칼로 자르듯 구분짓고 분명한 의미로 고정된 관념을 만들지 않고 무한한 꿈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로 우리 시대 시가 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체와 대상, 수많은 타자들의 언어가 서로 스며들어 흐리고 희미한 의미로 번져나가는 이 마법 같은 변용이 바로 시의 언어이다. 지하선 시인의 시는 바로 이 미학에 근거하고 있다.
4. 맺으며
시인이 끊임없는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주체를 확대하고 스밈의 미학을 이루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현실이 주는 압박과 상투성에의 매몰을 두려워하고 사물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시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상으로의 현실 그리고 세상의 언어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영원한 여행에서의 잠시의 휴식일지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이라는 멋진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 한 편에서 바로 이 구절을 따와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달력을 넘긴다 순간, 내 몸의 우주가 빙글 돌더니 갑자기 빅뱅이 인다
3072년의 낯선 행성, 지구상에 없는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한다
…(중략)…
나의 시간은 지워지고 오직 마흔아홉 너의 시계만 도는 태초의
행성에서 세상에 없는 단 한 번의 천년 사랑을 시작해도 되는 걸까
소금 눈썹처럼 비석거리는 그 시간의 한 끝을 잡고 허둥지둥 속도를 잡아당기려는 네가 보이는데
-「4월 31일」부분
4월 31일은 존재하지 않는 날이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주 저편 어딘가에 흘러가는 시간 속에 존재할 수도 있고 우리가 인식하거나 찾지 못한 시간의 한 부분이 바로 그날일 수도 있다. 시인은 이 미지의 시간을 찾아가는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를 주체라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대상을 타자화해서 자신의 영토 안에 가두거나 또는 반대로 배제시키지 않고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여 주체와 대상 모두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러한 지하선 시인의 미지 탐험이 이 시집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쭉 그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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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그녀의 시읽기의 재미는 참신한 발상에서 온다. 평범한 사물에서 끄집어내는 특별한 세계가 읽는 이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세상 곳곳에 임자 없이 떠도는 시어들을 포획해내는 감각과 포획한 시어들을 구성하고 조직하여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솜씨가 장관이다.
그의 상상력이 원정하여 영지로 개쳑해내는 종횡무진의 세계에 지하선은 결국 따뜻한 인간의 채취를 심고 있는 것이다.
― 문효치 시인.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시인이 끊임없이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주체를 확대하고 스밈의 미학을 이루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현실이 주는 압박과 상투성에의 매몰을 두려워하고 사물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시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상으로의 현실, 그리고 세상의 언어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영원한 여행에서의 잠시의 휴식일지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이라는 멋진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 황정산 시문학평론가. 시인
지하선의 시는 시인이 호명한 사물과 한 몸이 되어 미지의 세계를 새롭게 살려내는 예리함에 있다. 수록된 시편들은 지극히 절제된 언어와 명징한 이미지로 잘 다듬어진 틀에 우주의 혼까지 불어넣어 만든 마법상자를 보는 듯하다.
올곧은 시선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초심을 잃지 않는 시인의 뜨거운 열정이 빚어낸 놀라운 시의 궤적이다.
― 이금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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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선 시인∥
∙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고,
∙ 2004년『수필춘추』로 수필 등단,
∙ 2008년 계간『미네르바』신인상 시 등단
∙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도서관,「내 생애 첫 작가 수업」선정문학작가 창작기금 수혜
∙ 성동문인협회 회장
∙ 미네르바 문학회 부회장
∙ 한국문인협회 서울지부 이사
∙ 시립 개포도서관 ‘문예창작’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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