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83. 하늘에 닿는 길 -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 정령치(지방도 737호선)
깊고 넓은 어머니의 품, ‘산의 나라’ 지리산
지리산은 깊고 넓다. 어미가 아이를 낳듯 산이 봉우리를 낳고 계곡과 고개를 키웠다.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지리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 부른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로부터 연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위에선 백두산이 아래에선 지리산이 각각 부모가 되어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을 받치는 형상. 그래서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80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지기에 지리산은 하나의 산이라기보다 산국(山國), 즉 ‘산의 나라’로 통한다. 전남·북, 경남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 면에 걸쳐 있으니 삼남 땅을 감싸는 큰 지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엔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현대엔 빨치산 전투가 벌어졌다. 영험한 산으로 추앙 받아 천년고찰도 많다. 여러 봉우리를 함께 밟는 지리산 종주 능선 산행은 등산객에게는 성지 순례와도 같다. 징검다리처럼 봉우리를 옮겨 다니는 등산로는 지리산밖에 없기 때문이다. 깊은 만큼 넓어 산행코스만 20여 개에 달한다. 지리산 권역은 경남 진주·하동·함양의 동부권, 전남 구례의 서부권, 전북 남원의 북부권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구분한다.
1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를 오르는 길은 산 능선을 빙 둘러 나 있다.
2 지리산 횡단도로인 지방도 737호선은 급경사가 이어지는 운전 난코스다.
둘러가는 길 vs. 횡단하는 길
“오늘 이 길이 3일째 코스예요.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이렇게 지리산을 둘러 걷고 있죠.” 5~6명의 지리산 둘레길 순례객이 황금 들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리산 정령치에 가기 위해 남원 운봉읍을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것. 정령치 가는 길을 묻자 지리산 지도까지 펼쳐보이며 조리 있게 설명해준다. 알려준 길 그대로 차를 몰고 나서며 걷는 이들이 문득 부러워진다. 가파른 급경사 구간 덕분에 천천히 운전해야 하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은은하게 불이 붙은 지리산 능선을 조금 더 마음에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부터 정령치를 잇는 지방도 737호선은 1988년 완공됐다.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부터 전남 구례군 천은사 구간의 지방도 861호와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에서 고기리를 잇는 지방도 60호 등 지리산 횡단도로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통됐다. 남원시, 구례군, 함양군, 산청군 등 인접 시, 군은 관광개발을 위해 각 지방도로를 연결했다. 많은 시간이 걸리던 산행이 훨씬 수월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지리산 코스는 반나절, 하루, 1박 2일 코스 등으로 다양해졌고 평범한 사람도 지리산 종주를 꿈꾸게 됐다. 그리고 지리산 횡단도로는 연간 110만 명이 찾는 인기도로가 됐다.
정령치와 지리산, 변화와 보존의 갈림길
지리산 횡단도로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정령치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중간에 해발 1,172m 높이로 솟아있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을 이곳에 두었다 하여 ‘정령치(鄭嶺峙)’라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지리산의 명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정령치 정상 구간에는 휴게소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바래봉까지 약 5시간 코스의 등산로가 연결된다. 간혹 등산복 차림의 사람이 눈에 띄지만 더 자주 이곳을 들르는 건 대형 관광버스다. 지리산 횡단도로를 타고 정령치 정상에 들러 숨 고르기를 하고 내려간다. 땀은 흘리지 않고 지리산의 절경은 담아가니 편리하긴 한데 왠지 말끔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연간 80만 대의 차량이 횡단도로를 지나가니 대기오염은 물론 야생동물 로드킬(동물이 도로에 나왔다가 자동차 등에 치여 사망하는 것)이 심각하다는 주장도 여기저기서 제기된다.
최근 지리산은 케이블 설치와 지리산댐 설치로 찬반논란이 뜨겁다. 구례군이 지리산 온천에서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까지 4.5km 구간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고 나서자 환경단체에서 지리산 훼손을 우려해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부가 ‘4대 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지리산댐은 경남지역 식수원 보충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댐 예정지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 휴천면 일대는 칠선계곡, 백무동, 뱀사골의 물이 합쳐지는 생태계의 보고이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빨리 오르는 지리산은 편리한 만큼 깊이 담아가지 못한다. 횡단한 지리산을 다시 둘러가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듯 말이다. 편리와 이익을 목적으로 지리산을 바꾼다면 깊고 넓은 지리산이 언젠가는 얕고 좁아질지도 모르겠다.
걷는 길 vs. 달리는 길
정령치까지 도로를 따라 차를 운전하고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서일까. 정령치 휴게소는 지리산 바래봉까지 등산로가 연결돼있다. 본격적인 등산로로 들어가기 전에 가뿐히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펼쳐진다. 아래로는 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도로가 펼쳐지고 양옆으로는 억새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정령치~바래봉 산행 코스는 약 5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등산을 하려면 채비를 따로 하는 것이 좋다. 바래봉까지는 아니어도 산책길을 따라 조금이라도 걷는다면 지리산을 밟는 즐거움을 짧게라도 맛볼 수 있다.
지역정보
가는 길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남원 IC에서 나와 구례방면 국도19호선에 오른다. 함양방면 지방도 60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정령치에 다다르는 지방도 737호선을 만날 수 있다. 정령치휴게소에서 팔랑치 및 바래봉까지 등산로가 연결되기 때문에 산행을 계획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