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계간 시평
항구와 바다의 마주침, 새로운 배치의 아장스망
- 에세이문예 가을호 시를 읽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산업사회의 현대는 독자를 감동시키는 강렬한 흡인력과 공감대를 지닌 시를 요청한다. 좋은 시는 편중적인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틸 타이가 상상을 ‘소재를 변형시켜 새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한 것은 소재의 확장이 시 영역의 확대와 직결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새로운 마주침을 통한 아장스망의 구축도 소재의 변형으로써 새로운 배치를 의미한다. 여기서 한국시는 그동안 멀리 해온 ‘항구’ 소재의 접근성을 요구받는다고 하겠다. 위의 측면에서 이 시대의 많은 문인들 ‘항구’나 ‘바다’ ‘항해’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바다’ ‘항구’ ‘섬’ 등의 질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 해양수도다. 부산 시인들이 항구나 바다에 관심을 갖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인간에게 있어 바다를 낀 항구는 환경인 동시에 문화다. 바다를 함께 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일부분이고 도전과 응전 속에서도 경외와 적응 속에서 삶의 순리를 따르기도 하였다. 미래로 가고 있는 시 속에서 바다와 항구는 중대한 화두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물의 총합으로 표징되는 바다, 생명의 원천으로 화합과 끌어안음의 그 바다를 배경으로 하거나 주요 대상물로 하는 시에는 사람도 등장하지만, 주역을 담당한 바다를 안은 항구라는 무대에 내포된다. 일찍이 문덕수는 “삶의 무대로서의 바다를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번에 계간 시평 대상작으로 선정된 두 편의 시는 남해 미조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편은 탁영완 시인이 쓴 ‘스페이스 미조’이고, 부제로 ‘권대근 문학세미나 문학 속의 과학’이다. 다른 한 편은 장정애 시인의 ‘미조항’에서다. 미조항이 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오인태 시인이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사람의 마음은 따뜻한 곳으로/고여듦을 알겠네./ 미조포구/여기에는 사람뿐만 아니라/새섬, 범섬, 매섬, 뱀섬..../그 올망졸망한 섬들과/바다를 떠돌던 고단한 배들/또한 제 집 들듯 찾아와/마음을 풀어놓고/밤이면 불빛 환하니/참 따뜻해라. 거기/미륵이 아직 머물러 계시더라.’라는 시를 썼고, 공광규 시인이 미조항을 방문하고 ‘새들의 빵’이란 시를, 권대근이 ‘미조 바다’ ‘미조 생각’ 등 미조항과 관련된 시를 쓴 바 있다.
자연이라는 관점에서 바다를 낀 항구는 공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 중 하나다. 그만큼 항구는 그 공간성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항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모성 혹은 생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원형적인 관점에서 그럴 뿐 실제의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바다를 낀 항구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박상철 ‘항구의 남자’는 항구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경쾌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낸 곡이다. 바다와 등대, 그리고 항구라는 상징적인 배경 속에서 사랑과 의리를 노래하며,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전달한다. 노래 ‘항구의 남자’ 속 화자, 그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원양어선의 마도로스일까 상선의 선장, 선원일까. 항구는 이별과 상봉의 서정을 묵시하는 곳이다. 2016년 박상철이 부른 이 노래는 항구, 갈매기, 바다, 사랑 네 단어가 키워드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외국에 항구를 개방한 시기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1876년이다. 그해 부산항을 시작으로 1880년 원산항, 1883년 인천항이 차차로 남해 미조항으로 개항된다. 미조항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항구로 어업전진기지다. 그로부터 1945년까지가 우리의 근대사이고, 서글픈 민족의 환희이던 1945년 해방·광복부터 현대사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유행가 중에선 항구를 이별의 서정으로 얽은 노래들이 많다. 이 노래들을 펼쳐보면 민초들의 삶이 파노라마로 연상된다. 1930년대 박향림 ‘항구에서 항구로’에서부터 1940년대 이난영 ‘목포는 항구다’, 1950년대 박경원 ‘이별의 인천항’, 1960년대 은방울자매 ‘쌍고동 우는 항구’, 1970년대 박형진의 ‘항구의 밤’, 1980년대 김상진 ‘항구의 이별’, 2016년 박상철이 ‘항구의 남자’로 잇는다.
시에서 항구는 대체로 세 가지 공간으로 제시된다. 첫째 외적 공간, 둘째 내적 공간, 셋째 관념적 공간이다. 외적 공간이란 문자 그대로 우리의 감각적 세계가 인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적 공간이란 시인에 의하여 주관화된 공간 그리하여 시인의 내면 의식에 의하여 다시 창조된 공간이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고 오직 인간의 의식에만 있는 정신적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념적 공간이란 실제로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신념을 통해 가상할 수 있는 혹은 소원 성취의 대상으로 설정된 그러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감각적 세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외적 공간과 구분되며 인간 의식을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내적 공간과 다르다. 우리 문학에 투영된 항구의 모습이 한결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론이다. 이 글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제 필자는 이 장에서 미조포구가 부산 시인들에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바다와 항구는 자연계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공간이다. 일찍이 융은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영적 신비이며 영원성이요, 죽음과 재생을 나타낸다”고 하였고, 프라이도 바다는 겨울, 밤, 죽음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면서 죽음의 표상인 동시에 죽음의 승화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통로로 보고 있다. 또한 엘리아데도 바다는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 이들 모두가 소멸과 창조, 죽음과 삶의 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즉 바다를 침몰과 외경과 동경의 양가치적 의미로 표상된다고 할 때, 바다와 관련된 시를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 나아가서는 소재주의의 편협성으로 제한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의 환경문제가 문명사회의 삶을 위협하는 위기의식으로 다가오는 현대는 물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으로도 ‘바다’와 ‘항구’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상을 가져다준다. 인문학의 대상으로서 바다와 항구가 지닌 진정한 의의는 상상의 모태일 것이다. 항구는 자기 변화를 부단하게 추구하면서도 원래의 정체성을 지켜 가는 존재이고, 닫힘에서 열림으로, 맺힘에서 풀림으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떠남과 벗음의 자유를 가르쳐주는 역동적인 언어이다. 항구와 바다가 문학의 소재가 되는 이유도 생존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실존이 바다와 관련되어서다. 시에 표현된 바다와 그 정체성을 살펴보면, 흄은 ‘한 밤 중의 고요한 부두 위/ 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 달이 걸려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와 멜빌은 ‘항구는 정 깊은 곳/ 항구에는 안전과 휴식과 난로와 만찬/ 따뜻힌 도포와 친구/ 그리고 우리들 인간들에 온갖 것이 있는 곳이다.’라고 노래했다.
전재수는 ‘여기는 친구가 그리운 항구/ 동해의 한끝에서 어두운 해조음에 전신이 젖어/ 밤바다의 끝없는 이야길 듣는다.’고 했고, 정비석은 ‘항구에서 오늘도 푸른 파도가 이랑이랑 넘실거리고 있고, 푸른 파도 위에서는 흰 갈매기가 너훌너훌 날개를 치고 있고 또 그 위에는 남빛 하늘이 훤출하니 개어 있는 하늘과 바다 사이의 창창한 공간을 어선들은 아득한 수평선을 향하여 바다로 바다로 기운차게 달려나가고 있다.’고 썼다. 항구를 그리되 ‘바다’, ‘배’, ‘항해’의 삼 요소를 갖추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그 내용이 바다 위의 배에서 전개되는 승선 체험을 다루고 있으면 문학은 더욱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항구 관련 바다시는 항해 체험이 녹아 있는 그런 바다공간 시로 가야 할 것이다.
녹슨 철벽도 잿빛 콘크리트 과거도 단단한 예술작품이다.
단순한 기계 차가운 금속이 아니라 세월을 입은 예술이다
‘냉동창고의 기억, 예술이 되다’
떨어지던 얼음 알갱이로 채우던 고픈 배 시린 기억,
냉철한 학문이 되다
미조항을 끌어 통유리벽에 걸어놓고
저만치 남해 바닷물도 몰려와 듣고 간다
얼음 알갱이 같은 과학 깨물어 먹는다
문학이 녹아 다시 물이 되는 시간이다
이 공간에 머물렀던 오감이 풀어내는 이야기
‘건들건들 비릿한 바람과 잠깐’ 연애한 게 아니라
매운 마늘로 맺힌 삶이다 섬초 앗아 푸르게 키워낸 바라이다
문학기행 속 세미나, 축적된 강인한 섬의 기질
펜PEN에 새기는 기억의 일부 학구로 도드라진 마늘주먹이다
-탁영완, <스페이스 미조> 전문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회장 송명화)는 25년 문학기행으로 남해 미조항으로 떠난다. 남해는 유배문학의 고장으로 노도라는 문학의 섬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로 유배문학관이 있는 곳이다. 김만중, 자암 김구 등 많은 문인이 남해로 유배로 와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미조항에는 권대근작은문학관도 세워졌다. 미조항에 와서 냉동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변모시킨 ‘스페이스 미조’라는 공간 관람은 문학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문학기행의 압권은 세미나다. 이번 세미나는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권대근 교수가 ‘잘못 아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라는 주제로 ‘문학 속의 과학’에 대해 논했다.
“과학적인 사고는 우리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사고방식이다. 문학, 음악과 같은 예술이나 사랑과 같은 감정에도 똑같이 과학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실들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릴 때, 나아가서 문학 속에서 자연과 과학기술, 사회현상들을 다룰 때 과학적 사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된다. 특히 물리적 사실을 적시할 때는 더욱 그렇다.
작품 속에 오류를 남기는 일은 무슨 큰 죄악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면서 일생동안 불명예를 안고 사는 것과 같다. 아니 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수는 사람이 죽고 나면 자연히 잊혀지지만 글로써 남겨놓은 오류는 그 글이 실린 책이 멸실 되지 않은 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들이 지면에 작품을 발표해 놓은 글들을 보면 이러한 오류가 더러 발견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병기 선생도 이러한 우(愚)를 따끔하게 지적했다.
즉 '동촌에서 뜨는 초사흘 달' '부엌 문설주에 걸터앉으며' '벌건 앵두밭에 기러기 내린다'를 예로 들면서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서편에서 잠깐 떴다가 지는 초승달이 어떻게 동편에서 뜨며, 문지방이면 모를까 가로로 새워져 있는 문설주에 어찌 걸터앉을 수가 있느냐는 거다. 그리고 앵두는 봄에 익는 과일인데, 겨울에 찾아오는 철새 기러기가 어떻게 그런 곳에 내려앉느냐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하길남은 과학적 연구가 문학적 선택이 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문학과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다. 과학이론이 문학에 접목될 뿐 아니라, 과학적 존재 형식 자체가 수필의 구성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피천득의 <오월>에서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했는데, 이 문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과학적 지식을 알고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감동적 차이다. 작가는 왜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했을까. 아마도 작가는 찬물이 뇌에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그 작용으로 인한 호르몬 분비 양상도 알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찬물로 세수를 하면 뇌의 온도가 내려가서 세로토닌 행복 호르몬이 분비한다는 과학적 사실로 볼 때, 오월의 느낌과 이미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않는 경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충 권대근의 주제발표는 문학 속의 과학적 오류에 대해 예시를 들어가면서 밝히고, 상상력이 아닌 물리적 사실의 적시에서는 오류가 나서는 안 된다는 걸 말했다.
다시 탁영완의 시 분석으로 돌아가자. ‘녹슨 철벽도 잿빛 콘크리트 과거도 단단한 예술작품이다’ 이 시의 첫행이다. 시적 화자는 과거에 냉동창고였던 건물이 멋진 문화공간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녹슨 철벽’과 ‘잿빛 콘크리트’라는 공간적인 배경에 ‘과거’라는 시간을 입혀 감성적으로 접근하여 오래된 건물과 예술작품으로 동일시를 이루었다. 시에서 동일시는 흔한 기법인 셈이다. 그녀는 단순한 기계 차가운 금속이 아니라 세월을 입은 예술이라는 관점을 통해 과거의 냉동동장에서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현실을 신유물론적으로 읽어낸다. ‘세월을 입은 예술’이란 냉동건물의 변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산화되고 허물어져 부서진 모습에서 시간과 바람 습기도 이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떨어지는 얼음 알갱이로 채우던 고픈 배 시린 기억’은 권대근의 어린 시적이 투영되어 있다. 평자는 부산펜 회원들과 미조항을 돌면서 탁 시인에게 옛날 제빙공장을 가리키며 “제가 어릴 때 여기 공장에서 얼음을 배에 실어 나를 때,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주워 먹으며 배를 채웠습니다.”라는 아픈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겨우 보리밥으로 고구마로 배를 채우던 어린 시절에는 먹는 양에 비해 움직임이 많아서인지 배가 빨리 고팠다. 먹을 것이라곤 없는 상황에서 얼음 조각은 훌륭한 간식이 되었다. 시적 화자는 배 시린 기억 다음에 왜 ‘냉철한 학문이 되다’고 했을까. 나는 가난했기에 당시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만 간다는 국립인 부산기계공고를 나왔고, 미조항 출신 공고생 출신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국문학자가 되어, 고향에서 문학강의를 하는 걸 보고 그렇게 적었다. 스페이스 미조에 전시된 냉각 열교환기의 차가운 모습에서 ‘냉철한’을 불러 왔을 터이다.
‘미조항을 끌어 통유리벽에 걸어놓고/ 저만치 남해 바닷물도 몰려와 듣고 간다/얼음 알갱이 같은 과학 깨물어 먹는다/ 문학이 녹아 다시 물이 되는 시간이다’는 표현은 스페이스미조의 이층 세미나 좌석에 앉으면 미조항구가 훤히 내려다 보이도록 창을 아예 통유리로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통유리에 보이는 항구의 모습을 보며, ‘미조항을 끌어 통유리벽에 걸어놓고’라 묘사했다. ‘저만치 남해 바닷물도 몰려와 듣고 간다’는 표현은 통유리벽으로 드러낸 바다를 의미한 것이고, ‘얼음 알갱이 같은 과학을 깨물어 먹는다’는 것은 ‘문학 속의 과학’이란 주제로 강의로 열변을 토하는 강사의 논리에 공감한다는 말이겠다. 시적 화자는 드디어 ‘문학이 녹아 다시 물이 되는 시간’이라 한다. 물은 수용적인 이미지다. 항구와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고, 문학과 과학이 하나로 연결되고, 강사와 청중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공간에 머물렀던 오감이 풀어내는 이야기/‘건들건들 비릿한 바람과 잠깐’ 연애한 게 아니라/매운 마늘로 맺힌 삶이다 섬초 앗아 푸르게 키워낸 바람이다/문학기행 속 세미나, 축적된 강인한 섬의 기질/펜PEN에 새기는 기억의 일부 학구로 도드라진 마늘주먹이다”라는 묘사는 매운 마늘을 먹고 자란 권대근 교수의 남해사람의 기질, 고춧가루 세 말 먹고 물 속 30리를 헤엄친다거나, 남해사람은 바닷물에 빠졌을 때 그냥 올라오는 법이 없다. 반드시 입에 고기 한 마리 물어 올라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해는 시금치로 불리는 섬초로 유명한 곳이다. 아버지는 눈에 시금치 씨앗을 뿌려 시금치를 40 가마니나 수확해서 팔았다는 것이다. 이런 남해 사람의 근성과 기질을 이야기로 들은 데다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에 찍힌 내 사진의 주먹을 쥔 모습을 오버랩시키면, 고향 미조항에서 열강을 토하는 권대근은 ‘펜PEN에 새기는 기억의 일부’가 될 것이며, 권대근 교수는 어린 시절 마늘집 아들로 태어나 마늘을 먹고 강인하게 자라나 ‘다시는 지게를 지지 않으리라’는 맹세로 국문학자가 되었으니, 시적 화자는 나를 ‘학구로 도드라진 마늘주먹이다’라고 해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미륵의 손끝에서
쓱 그려낸 바다 보물섬 같은 마을
어젯밤
누가 하얀 엄마의 솜이불을
펼쳐놓았을까?
이른 아침부터 온몸을 감싸고 드는
목화꽃 같은 해무를 타고
느릿하게
시간의 노를 젖는다
잠든 배들 사이로
바람이 먼저 깨어
내 손을 잡는다
문우들과 웃던 시간은
물비늘처럼
어디론가 흩어지고
안개비에 젖은
작은 포구의 문을
조용히 연다
오늘도 이곳은
현실보다
조금 더 느린 세계다
-장정애 <미조항에서> 전문
하르트만은 공간을 삼분하고 있는데, 실제공간, 직관공간, 이념공간이다. 수필의 제재로서 ‘바다’의 존재는 실제 공간이다. 여기서 실제공간은 우주적 자연 공간으로서 경험적 가시 공간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 바다란 외적 공간에서 시적 화자가 맨 처음 본 것은 무엇보다도 교훈적, 계몽적인 성격이었다. 인간은 항구나 바다를 통해서 무엇인가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공간을 대상으로 한 바다 시의 첫 번째 유형은 바다로부터 얻은 교훈을 시로 쓴 것이다. 즉 바다는 시에서 교훈적, 계몽적 공간을 제공해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정애의 <미조항에서>가 항구와 바다를 소재로 하여 씌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는 문학과 자연의 반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시의 바다는 바로 미조 사람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열어주는 통로로서의 항구이고 바다였기 때문이다.
장정애 시인은 골 깊은 고독을 해독할 수 있는 청량의 작가다. 얼굴은 밝고 목소리는 잔잔하고 성격은 온유하다. 인용 시는 미조항 바다의 역동적인 모습, 흰 포말로 몰아치는 파도의 움직임을 ‘어젯밤/ 누가 하얀 엄마의 솜이불을/펼쳐놓았을까?’라고 파도가 연출하는 외적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다의 파도로부터 어떤 낭만적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느림과 투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산책이며 사색으로 일상의 바쁨이나 빠름으로부터 이탈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와 같은 인생길의 방향을 이 시에서 항상 푸른 바다를 감싸고 도는 안개비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신비의 광경을 장정애는 인간의 삶과 접속시켜, 그 느림을 흥건한 평화스러움의 의미와 접속시켜 느림의 미학으로 응축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이곳은/현실보다/조금 더 느린 세계다’라고 말하고 있다.
외적 공간으로 자연에 관심을 가진 시는 미학적 관심으로 씌어진 것이다. ‘목화꽃 같은 해무를 타고/느릿하게/시간의 노를 젖는다’하거나 ‘잠든 배들 사이로/바람이 먼저 깨어/ 내 손을 잡는다’ ‘안개비에 젖은/작은 포구의 문을/조용히 연다’ 등의 묘사의 기능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작가의 사상과 감정 혹은 체험의 모두를 표현할 때 숨결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말의 진정한 암시는 언어가 언어로 조립된 전체적인 맥락의 행간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감동의 요소는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로 조립된 분위기요, 거기서 나온 조화의 묘미라는 점이다. 시에서 표현된 외적 공간으로서의 바다는 다양한 성격을 지니지만 그 중에서도 지배적인 것이 미학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예술의 한 장르인 까닭에 시인이 이처럼 그 외적 공간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이 작품은 바다의 외적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해무, 해풍, 안개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작가가 직접 항구에서 나누는 교감의 운치를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물비늘’ ‘안개비’ ‘목화꽃 같은 해무’ 등의 어휘는 감각적인 영상미를 제공한다.
Ⅲ.
탁영완 시인과 장정애 시인이찾아간 곳은 외적 공간인 남해 미조항은 섬이다. 이 작품에서 ‘남해섬’은 바다의 중앙에 놓인 인간의 희구를 안고 있는 꿈의 상징이다. 이 시 안에서 인상적인 것은 어느 정도 연령에 이르면 모든 일에서 떠나 한적한 바다가 있는 곳을 찾아 혼을 일구며 살고 싶어한다. 그런 곳이 미조항이 아닐까. 지금까지 필자는 시에서 항구의 바다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생태주의 시와 마찬가지로 생태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직접 노래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부각하고, 생태 파괴나 환경 오염 문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로 인해 당면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함으로써 생명 보존의 필요성을 노래하고 있지는 않고, 이들 시에서 바다는 다양한 의미와 형태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생태시와 바다와의 관계를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몇 가지 현상이 드러난다. 대체로 근대 초기에서 바다라는 자연은 외적 공간 그 중에서도 계몽적 공간과 미학적 공간이 지배적이었다. 식민지 중기를 넘기면서 바다시들은 주로 관념적 공간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도 암울하고 절망적이었던 까닭에 낭만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의 바다가 아닌 이상화된 관념세계를 꿈꾸었다. 해방 후에는 바다시가 다수 씌어졌고, 작품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해방 이전의 시에 비한다면 내적인 공간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잠재의식을 반영한 공간으로서 바다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 볼 수 있겠다. 즉 물질문명으로 훼손되고 있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본래적인 것으로 복원하려는 우리 시인의 몸부림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시가 다루는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삶의 절대적인 명제는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변화하는 것이다. 바다가 모성과 생명을 상징한다는 명제는 더더욱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체험 결과에 따라 그 의미의 파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시가 의식한 바다가 생명과 모성을 주로 상징했다면, 현대시에 나타난 바다의 얼굴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도시의 일상에서 탈피해 보고자 하는 자연 동경 의식에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문학은 그런 삶을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시도 새로운 형상화와 의미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시인은 외적 관찰력과 내적 해석력을 조화시켜 항구와 바다라는 소제가 한 편의 시로 완성되도록 하였다. 바다의 황폐화나 오염 상태의 고발이 아니라 실은 더 무서운 정신의 황폐화를 경계하는 치열하고 진지한 꿈을 계속 생산해 내라는 주문도 좋을 것이다. 삶의 진실은 반전이고 시의 출발점은 ‘인식’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바다를 새로운 것으로, 낯선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항구와 바다 관련 시도 새로운 마주침이란 아장스망 속에서 한국시문학사에 큰 주름을 만들 것으로 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