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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난 가족과 함께 정읍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와보니까 영 내키지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소개할 때 난 혼자 있었다.
자기소개와 가족 소개가 끝나고 점심밥을 먹을 때는 나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시간이 지나자 부모님이 가려고 하였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싫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난 부보님과 떨어져있게 되었다.
그 때는 절망스러웠다.
그날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아침 운동이 있었고 난 그 아침운동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짐을 메고 가는 길이 보이면 가려고 짐을 메고 아침 운동을 갔다.
그런데 길이 애매하고 시골길이라 가는 것을 포기하고 무리 안에 있었다.
그때도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있었다.
잠을 결코 많이 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난 하반하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정말 부럽고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 다음 날도 아침 운동, 일기, 밥, 단어 외우기, 북 치기, 대사 외우기 등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에는 아침 운동을 안 하고 30km 걷기를 한 적도 있다.
내 기준에 30km를 걷는다는 것은 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 된다.
30km 걷기가 끝난 날에는 일정이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일 뒤 마장에 가서 잎을 땄다.
이것도 아침운동 대신에 한 것이었다.
잎을 딸 때 난 처음에는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좀 적게 땄다.
그러나 갈수록 잎과 야채 따는 것이 속도가 비슷해지기 시작하였다.
정읍에서 엄마가 치킨을 사오셨다.
그 날에는 내가 1박 2일 동안 집에 가는 날이었는데 그때는 내가 약속을 잘 지켰다.
또 정읍에서 터미네이터 영화 몇 개를 보았는데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서로 팔씨름 대결도 하였고 자기소개도 하였다.
나는 몇몇 학생들과 쉬는 시간에 테니스를 쳤는데 시설이 적합하지 않아 얼마 치지 않았다.
갈수록 아침운동 양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할 때는 운동 1~2개 정도하고 끝이 났는데 갈수록 피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축구도 하고 그러자 2주가 거의 다 되었을 때는 운동 시간이 지금과 거의 동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체력 소모가 더욱 커졌다.
경찰서에 간 적도 있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다시 써니쌤이 따라가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집에 가는 날이 되었다.
집 가는 당일에는 기분이 조금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아침을 먹고 차를 타고 터미널에 갔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만나야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2주 동안 있는 것은 끝이 나게 되었다.
느낀 점은 운동을 잘해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문제나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해야한다.
걷는 것은 힘든 것을 하는 것이라고 봐도 된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힘들고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
5월
집에 있다가 어느덧 다음 주가 되었고 부모님은 나에게 영월 중에 써니쌤이 있는 곳에 가자고 하였다.
난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차에 탔다.
차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하였다.
몇 시간 후면 오랜 이별이 되는 생각을 하니 재밌는 얘기를 해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영월 기숙사에 도착하였다.
처음에 부모님이 내리라고 했으나 난 그때 내리지 않았다.
그때 부모님은 슬퍼하셨고 난 그 때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생깍해도 그때 난 참는 힘이 부족하였다.
지금은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부모님은 내가 강제로 하기 전에 제 발로 나가는 것을 원하셨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난 제 발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가시고 난 학교기숙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4~5시간 후 난 자믈 자게 되었다.
그때 너무 서러웠다.
다음날부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참는 것이 잘 안돼가지고 버스 정류장에 갔다.
버스를 타려고 하였다.
30분쯤 후 윤쌤이 나무막대기를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난 안으로 갔고 일정들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잤다.
이 때가 초반이었는데 초반에는 2주하고 조금 넘게 있다가 주말에 1박 2일 동안 집에 있게 해줬다.
그리고 집에 가는 날 예정 시간보다 늦게 오자 그 다음 주말은 집에 가지 못하였다.
나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과 동일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3주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5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무렵 영월에 있는 전시관과 거기서 차를 타고 이동해서 산을 갔다,
산을 오르는 것은 역시 힘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 일정을 끝을 내었고 그로부터 몇일 후 에는 경주 95km 걷기를 하였다.
하루에 30km를 무거운 짐을 메고 걸었다.
이 공지가 나왔을 때 난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난 가게 되었다.
이동할 때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서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이 엄청난 어려움이었다.
난 일정들을 마무리하였고 5월이 다 되었다.
6월
6월! 6월은 트라우마가 진짜 많았다.
6월 어느 날 내가 부모님이 양주로 가라고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전에 있었던 일 중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가슴 아픈 일이 참 많았다.
그러나 문집을 쓰려면 기억을 해야 한다,
5월에 있었던 맞은 일, 힘들고 고된 일을 생각하니까 이번에는 영월 간 것과 달리 양주 앞에 있는 것을 못하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죄송한 마음도 많이 들었으나 가기 싫은 생각도 많이 들었고 하반하에 안 가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쌤들이 집에 와서 날 죄수처럼 끌고 갔고 양주로 도착하자 난 가엾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장님한테 안 좋은 소리 듣고 맞고 갇혀있었다.
그 때 외부활동을 하였는데 난 도망칠까봐 항상 옆에 사람을 두고 다니거나 외출을 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코엑스에 갔을 때 거기서 도망쳤는데 당일에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또 끌려왔다.
죄수 신세가 된 나는 제주도에 갈 때도 안내원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윤쌤이 얘기해서 난 또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제주도 가기 전 공지를 듣고 일정이 험악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는데 완전히 일치하였다.
난 망했고 너무 힘들게 살았다.
내 처지가 안타깝고 하반하에 오지 않은 아이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2주가 지나고 제주도 여행이 끝났다.
그리고 김포 공항에서 흡연실에 숨었으나 하필이면 유민형님이 봐서 다시 영월 기숙사에 억지로 왔다.
와가지고 기숙사에 있었다.
그날 밤에 잠을 잤고 그 다음날에 일어나서 생활을 하는데 여행 보고서를 쓰라고 지시가 알려졌다.
힘들었지만 여행 보고서 쓰는 일도 마무리가 되어 복도에 붙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6월이 거의 끝나갔다.
6월이 끝날 무렵 시장에 갔다.
거기서 윤쌤이 도망가는 것은 안 좋은 방법이라고 오래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난 차를 타고 기숙사로 오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6월이 끝이 났다.
6월에는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7월에는 무엇을 할까 의문이 들었다.
제대로 열심히 바르게 인생을 살아야겠다.
7월
7월에는 기숙사 안에 있었다.
아직은 노작 시작을 하진 않았다.
이웃에 밭을 도와주자고 써니쌤이 하였다.
그리하여 밭으로 가 도왔다.
그리고 위에 있는 고추밭에 가서 고추를 따는 일도 하였다.
고추밭 일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하고 며칠이 지나고 교회 옆 고추밭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난 다른 아이들보다 쌤들보다 후반에 갈수록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난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8월 8일(로저 페더러 생일)에 부모님이 오시니 아이들과 나는 공연 연습 준비를 많이 하였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솔라티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고추밭도 그 후로 갔다.
그래서 고추를 땄는데 난 고추 따는 속도가 빠르지 않자 고추 나를 일을 맡았다.
그 때 나는 여러 가지 일 중에 어떤 일은 힘들고 어떤 일은 어렵다라는 것을 느꼈다.
또 간단하지만 많은 일, 어렵지만 적은 일을 사람들에게 선택하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떤 일을 선택할지 궁금하였다.
7월 중순에는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하려고 연습하였고 그 결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7월 말부터 농활이 많아져서 솔라티, 트럭을 타고 사과밭에 가는 아이, 더덕 캐러 가는 아이 등이 있었다.
난 일을 빨리 못해 많이 빠졌다.
이로부터 며칠 후 7월이 마무리 되었다.
느낀 점은 먼 여행을 안 가니까 공연 연습할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내 모습이 점점 나아지는 것, 발전이 있는 게 느껴졌다.
8월
8월 초에는 더욱 연습을 많이 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는 부모님들이 오실 시간이 매우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8월 8일 부모님이 오셨고 난 연습을 잘 하였고 8월 8일 한참 전부터 내가 집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하여서 8월 8일에 집에 갈 수가 있었다.
내가 자세가 좋지 않아 좀 더 있다 온다고 엄마가 말하였다.
그러나 난 예정 시간에 오지 않았다.
그 때 나의 기분은 긴장이 되고 그러하였다.
할머니댁에 간다고 하였는데 좀 의심이 되긴 하였으나 계속 진짜라고 하자 차에 탔다.
할머니댁에 일단 가긴 하였다.
그런데 올 때가 문제였다.
집에 간다고 하였는데 자꾸 전주 시내를 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심장이 두글거렸다.
그런데 역시 길가 골목에서 쌤과 아이들이 와서 날 끌고 갔다.
그리고 난 써니쌤 방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나쁜 취급을 받고 죄수처럼 있게 되었다.
이동을 해서 김치게스트하우스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산책할 때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숙소들도 가고 국내여행이 끝났다.
그 다음 영월기숙사에서는 수업을 하였다.
어느새 8월이 거의 끝이 났다.
영월 기숙사에서 그 때 뭐 특별한 일은 없었고 아침 운동, 수업, 농활등이 있었다.
그리고 8얼이 끝나게 되었다.
느낀 점은 코로나가 있는데 이렇게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있어도 활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
9월
9월에는 영월 기숙사에 있게 되었다.
멀리 여행을 가지는 않았다.
농활을 하러 가는 아이들이 꽤 되었고 나 같이 자주 가지 않는 아이들은 워켜, 영월기숙사 청소를 맡게 되었다.
또 이 때 어려움이 닥쳤으니 그 어려움이란 것은 여행 보고서란 것이었다.
난 솔직히 여행 보고서 쓰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 뜻은 여행 보고서 쓰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겠지만 반대로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반하에선 모두가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행 때 있었던 일들을 쓰게 되었다.
그 작업이 끝나고 주말이 되었다.
주말이 지나고 9월 15일이 되자 난 집에 갈 수 있었다.
9월 15일에 집에 갔으나 예정시간에 안 와서 또 끌려오게 되었다.
영월 기숙사에 늦은 밤에 도착을 하였고 집에 중간에 못 가게 하였다.
기분은 당연히 나빴고 사람들은 내가 없어지면 나를 찾으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9월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때부터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나의 생일 파티를 하게 되었고 9월 말부터 스키장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느낀 점은 영월이 엄청 춥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전거 여행을 어떻게 하게 될지 고민이 되었다.
9얼 말에는 쿠우쿠우에 가게 되었는데 초밥이 매우 맛있었다.
10월에는 자유시간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9월 말부터 농활에 많이 참가하게 되었다.
10월
10월에는 10월 초에는 농활을 가고 가지 않는 날에는 공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농활을 가는 날에는 일기, 독후감 빼고는 일정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중순에는 거대 여행이 그만 시작되고 말았다.
자전거로 800km정도 간 것이다.
김치게스트하우스에서 판문점까지 꾸불꾸불 길을 따라 갔다.
발목, 다리, 무릎이 아팠으나 계속 타게 되었고 차는 딱 2번 탔다.
한번은 그린토피아에서 양주까지 타게 되었고 다른 한 번은 얼마 안 탔다.
2주가 지나서 여행은 끝이 났고 영월까지 솔라티를 타고 오게 되었다.
그 때 바닥에 앉았는데 많이 불편하였다.
영월기숙사에 오게 되었고 자전거는 반납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10월도 끝이 나게 되었다.
11월에는 무슨 활동을 하게 될지 알고 싶었다.
자전거로 옇애할 때 잠도 조금 자서 진짜 힘들었다.
그러니까 멀리 여행 갈 때가 힘들다는 것이다.
10월에 잘한 것은 노작을 할 때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을 많이 준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발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날씨는 매우 추워졌다.
패딩을 입을 때가 벌써 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도 느꼈으나 영월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춥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은 아직 오지 않았다.
두 달 아니 한 달 안에 눈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11월
11월 초에 프리위크가 있었다.
그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게 되었는데 1을 보고 2를 보려다가 헝거게임으로 영화가 바뀐 것이 아쉬웠다.
이유는 영화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 변화가 크진 않았다.
왜냐하면 헝거게임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또 아는 형님 예능, 히든싱어도 봤는데 써니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tv보는 시간을 줄이게 되었다.
매일 3시간 이상씩 보지 않고 1주일에 2~3번 하루 2시간 정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1주의 프리위크가 끝이 나고 프리위크 마지막 날 저녁이 되었따.
난 하반하에서 일요일 마지막 저녁이 긴장이 된다.
이유는 알다시피 다음 나링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월요일부터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일요일 저녁 공지는 다음부터 단어 10개 추가 외우기였고 평일 그대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힘들게 뻔하지만 일정을 나는 소화해내었고 30개 외우기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어 수가 20개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개를 외우고 빡세게 살자 11월이 끝이 나게 되었다.
느낀 점은 단어를 열심히 외워서 단어량을 늘려야 겠다는 생각이 둘었다.
또 tv보는 것은 재미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재미있게 알았다.
12월
12월에는 월, 수, 금에 스키를 많이 갔고 월, 화, 목, 금에 테니스장에 가서 레슨을 받았다.
스키를 난 잘 타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키 레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월요일과 금요일은 스키장에서 바로 테니스장으로 가게 되었따.
스키가 1시에 끝나고 테니스가 2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그랬던 것은 전혀 아니다.
스케줄로 인해 스키라던지 테니스라던지 쉬는 날이 있기 마련이었다.
스키는 업 다운 그러니까 내리막길에선 무릎을 피고 평지에서는 무릎을 굽히고 그런 것이 어려웠고 한 가지 더 더 어려운 것은 11자로 S자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처음 쓴 것은 할 수 있는데 두 번째 것은 현재로는 어렵다.
더욱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많이 든다.
주말에는 축구 시합으로 주말 워커를 정했는데 진 팀이 워커를 하게 도이ᅟᅥᆻ다.
12월 중순이 되자 난 축구 경기를 ㅎ아ᅟᅧᆻ고 성실히 참여하였으나 져서 워커를 하게 되었다.
그 다음 주에는 방 맴버 일부가 벌을 바다서 워커가 벌 받는 아이들로 바뀌었다.
12월 말이 되자 문집 쓰고 연극하고 북 치는 등 할 일이 많아 매우 힘들었으나 패밀리맨 작품이 재미있었다.
패밀리맨은 12/31에 보았고 이로서 12월이 끝났다.
느낀 점은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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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승우야
수고 많았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승우를 위해
수고 많으셨을것 같다
참 감사하다
지나온 시간들이ㆍ
그리고 열심시 성실히 노력해야겠다는
승우의 다짐이 정말 반갑구
문집도 차분히 잘 썼구
고맙다^^
우리는 정읍에서 처음 봤을 때의 승우의 절망이 하반하를 마칠 때 희망으로 바뀌길 기도했단다.
매월 매순간이 승우에겐 힘겨운 도전이었고 극복의 과정이었구나. 정말 애 많이 썼고 네가 끝까지 함께 해서 기뻐.
10개월동안 승우가 승우 자신을 발견한 것도 제법 있을거 같아.
집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는 거, 운동을 꾸준히 하면 체력이 붙어서 좀더 멋있어 진다는 거,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일머리가 좋아진다는 거, 공연도 할 수 있다는 거, 승우의 재능을 살려서 영화수업에 도전한 거,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는 게 좀더 자유로워진 거 등등
하반하에서 한 도전들과 그것을 하고 난 후 네가 느꼈던 감정안에는 불편함, 실망, 괴로움도 있었겠지만 즐거움, 재미, 뿌듯함도 함께 있지 않았을까 싶구나.
네가 발견한 너의 모습뿐만 아니라 네가 보지 못했던 모습까지 그냥 다 너로 보고 싶은 욕심이 들어서...
승우의 하반하 생활은
미래에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궁금하다
힘들었던 만큼 보람이 있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는 강의도 하고 말이야
그 자리를 마련해주신 선생님께도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
사랑으로 승우를 지도하시는 것을
승우도 알았겠지?
올해 부모님과 함께
더욱 발전하는 승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