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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2
시는 진실과의 우연한 만남이에요. 시를 쓸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시는 무지(無知)가 주는 기쁨의 약속이에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 <무한화서>(이성복)
(잎이 바람에 잘 흔들리는) 은사시나무
(버드나무과/갈잎큰키나무/꽃 4월/열매 5월)
산에서 자라는 사시나무는 긴 잎자루가 납작해서 약한 바람에도 잘 흔들린다. 그래서 ‘사시나무 떨듯 떤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근래에 중앙아시아가 원산인 은백양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심으면서 사시나무와 은백양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잡종이 났다. 잎 모양은 사시나무를 닮았고 뒷면은 은백양처럼 흰빛을 띤 은사시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은사시나무는 매우 빨리 자라는 나무라서 1970년대에 많이 심어졌다. 그 결과 산에 조림된 은사시나무 숲을 쉽게 볼 수 있으며 가로수나 개울가에 심어진 나무도 흔히 만날 수 있다. 목재는 펄프, 성냥개비, 상자 등을 만드는 재료로 쓰는데 재질이 좋지 않아서 지금은 잘 심지 않는다.
사시나무속에는 사시나무와 은백양, 은사시나무를 비롯해 외국에서 들여온 이태리 포플러와 양버들, 그리고 중북부의 산에서 자라는 황철나무가 있다.
-<나무해설도감>(윤주복)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오늘부터 나의 바람직한 생존을 위해 두 개의 책을 동시에 필사한다. 그 바람직함에 돈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본래 그것과는 너무도 인연이 없다. 죽을 맛이다. 그래서 언어에서 희망이라도 얻고자 또 필사를 이어가고 내 생각을 풀어간다. 3년이 넘어가니 습관이 된 것 같다. 이렇게 나는 내 길을 간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는 두 번 읽었다. 시를 쓸 때마다 이 책이 떠올랐다. 시 이론 관련 책을 더러 보았는데 이만한 책이 없다. 그래서 필사를 하기로 했다.
윤주복 님의 <나무해설도감>은 숲해설가 공부를 하면서 집에 들인 책이다. 눈으로 볼까 하다가 나무 설명 글을 필사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이름을 입에 찰싹 달라붙게 하기 위해서다. 나무의 생명 과정에 대한 전반적 이해는 그 다음 일로 넘긴다. 일단 통성명부터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나무 설명이 깔끔하고 나무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실어 놓았다.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
먼저 <무한화서>에서 나오는 세 문장만 보자.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구체는 실용의 세계이고, 추상은 느낌의 세계이다. 시는 느낌일 것이다.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현재 나는 이 말에 동의 못한다. 풀과 나무와 마주하면서 그 이름을 몰라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경계를 언젠가 넘어서려면 역시 이름을 알고 가야 한다. 나와 세상은 언어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성복 시인도 바로 다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은사시나무 설명에 ‘사시나무 떨 듯 떤다’가 나온다. 관습이 된 은유다. 이것을 안 쓰는 방법은 하나다. 몇 번 써보면 안 쓰게 된다. 진부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본래 은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이 자연과의 연결 속에서 만들어진 은유다. 그런 자연을 대충 보고 글을 쓴 지난날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자연 속으로 스미듯 들어간다. 그 느낌이 언어로 잘 뿜어져 나오길 희망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이성복 시인과 윤주복 님에게 감사드린다. 당분간 즐거운 공부가 될 책을 남겨주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