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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 전후 복구에 나서다
hanjy9713
2024.03.04. 18:08조회 1
전후 복구에 나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을 대신한 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니었다. 정전협정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 당사국들이 일시 휴전을 한 것에 불과했고, 북한은 이제 최대강국인 미국의 적대국가로서 국제적인 봉쇄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한 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과 군사동맹을 굳건히 한 채 미국의 원조 아래 재건을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은 남북대치의 조건 속에서 일단 남한을 제외한 북한 지역에서 전후 복구를 통해 ‘민주기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남한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밖으로 소련을 비롯한 이른바 ‘국제 민주 진영’의 원조를 받아내고 안으로 인력과 자재 원천을 최대한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은 제6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전쟁 과정을 총결산하고 흐트러진 당을 재편하며 전후 경제 복구의 기본 방향을 세우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내려진 중요한 결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전후 경제 복구의 기본 방침을 결정했으며, 둘째 박헌영 ·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에 대한 투쟁 경험을 총정리하고 자살한 허가이를 출당시키는 등 당을 재정비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 권력이 명실상부하게 강화되었다. 그를 중심으로 김두봉 · 박정애 · 박창옥 · 김일 등 5명이 당의 중심을 이루는 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 중 박정애와 김일은 김일성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 계열의 대표로, 박창옥은 소련 출신 한인 대표로 참여했을 뿐이었다.
제6차 전원회의는 경제 복구의 기본 방향으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위한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 · 농업의 동시 발전’ 방침을 정한 회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제 자립을 위해서는 기계공업 등 중공업 발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스탈린식 경제 발전 모델을 따르되, 피폐한 인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농업과 경공업에도 투자한다는 북한식 경제 건설 노선이었다.
다만, 이 회의에서 당초에 ‘자립적 민족경제’라든가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 · 농업의 동시 발전’ 노선이라는 식의 명쾌한 방침이 표명되지는 않았다. 이런 용어는 1950년대의 중소대립과 내부 노선갈등을 거치면서 북한이 사후적으로 독자적 경제 건설 노선을 명확하게 표현할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옛 소련에서 입수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집』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결정된 전후 공업 복구 건설 방향은 ① 국가 공업화를 위한 기초 수립, ② 전쟁 행정에서 나타난 결함 퇴치, ③ 일제가 만들어놓은 공업 발전의 편파성 퇴치, ④ 군수공업 확장, ⑤ 인민의 물질 문화생활 개선 등 다섯 가지였다. 이를 위해 우선 발전시켜야 할 공업 분야는 기계공업이었다. 기계공업의 발전은 군수공업 발전에 중요하며 공업화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병기공업, 조선공업, 광업, 전기공업, 화학공업, 건재공업 등을 발전시킬 공업 분야로 열거했다.
인민생활과 직결되는 경공업 분야로는 방직, 펄프-제지, 고무신공장 건설 등을 중시했고 식료품공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회의에서 전후 복구 건설의 방향을 중공업에 둔 점은 확실하다. 『근로자』 1953년 8호는 “전후 인민경제를 복구 건설함에 있어서 그 선후차를 규정함이 없이는 인민경제의 전반적 복구 발전을 지연시키며, 막대한 재정상 투자의 소모와 자재, 원료, 로력의 랑비를 초대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복구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는 ‘기본 공업 시설’부터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기본 공업 시설 건설을 중시하긴 했지만, 인민생활 관련 산업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전후 폐허 속에서 인민의 생활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으며, 당내에 다양한 의견이 경쟁하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스탈린 사후 중공업 우선의 스탈린주의적 경제 건설 노선 대신 인민생활을 중시하는 경공업과 농업 및 중공업의 균형 발전에 초점을 둔 말렌코프 노선이 대두하고 있었다는 당시의 사정을 반영한다.
이 회의에서는 인민경제의 복구, 건설을 위한 3단계 방안이 결정되었다. 6개월에서 1년에 걸친 1단계에 경제 복구를 위한 준비를 하고, 2단계에서는 전쟁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하기 위한 3개년 계획을 시행하며, 3단계에서는 공업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것은 9년 내에 전후 복구를 완료하고 공업화의 토대까지 마련하겠다는 목표였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 지도부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전원회의에서 「모든 것은 전후 인민경제 복구 발전을 위하여」(『근로자』 1953년 9호)라는 제목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이 과업을 승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했다.
첫째, 그는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경제를 복구한 5년간의 경험과, 전시하에 “땅굴 속에서까지도 군수공업을 창설”하며 투쟁한 경험이 있고, 단련된 일꾼과 기술자, 기능자, 노동자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둘째, 풍부한 자재 원천과 철, 석탄, 전력 등 지하자원이 있으며, 셋째, ‘국제 민주 진영’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열거했다. 안으로 경제 건설의 경험과 인력, 물질자원이 있으며, 밖으로 소련 등의 원조를 받을 수 있으므로 급속한 경제 건설의 조건은 충분하며, 다만 문제는 “우리들이 국가의 주인답게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었다.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 등 외국의 지원으로 전쟁에서 패배를 모면했고, 경제 건설에서도 외국의 원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우리 자체의 힘, 즉 우리 당과 우리 인민과 우리 정권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의 지원은 하나의 조건일 뿐, 그 조건을 현실로 전환시킬 주체는 북한 정권, 당, 인민 자신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소련 등 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한편으로 하고, 전시에 ‘모든 것은 전선에로’라는 구호 아래 인민을 동원했던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을 민주기지 강화를 위한 인민경제 복구에로’라는 구호 아래 인민을 총동원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이 회의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경제 복구와 건설의 속도를 무리할 정도로 빠르게 잡았으면서도 농업 협동화 등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다. 농업의 경우 개인 농촌경리가 “장구한 시간으로 계속될 것이 예견”된다는 전제 아래 토지 많은 곳으로 빈농들을 이전시킬 것, 부업생산 합작사 조직, 국영농업 증진, 관개 시설 사업 등을 제시했다.
농업 협동화와 관련해서는 사유 토지와 사유 생산도구를 보유하게 한다는 원칙 아래 광범하게 ‘협동적 농업생산 합작사’를 조직하고 1954년부터 일부 ‘경험적으로 운영’하는 정도로 결정했다. 적어도 이 시점에는 급속한 농업 협동화와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계획은 없었다.
이처럼 8월 전원회의에서는 기본 공업 시설인 중공업의 복구 · 건설에 중점을 두되 인민생활의 향상을 위한 경공업 · 농업 투자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이행은 점진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북한의 문헌들에 의하면 이런 노선 결정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조선로동당 력사 교재』(1964.)에는 전후 복구 노선을 정하는 과정에서 반발이 있었음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만들겠다는 전망에 대한 반발이 컸다. “최창익 등 종파분자”들은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만드는 데 주력하기보다 형제 나라들에서 소비품 위주로 원조를 받아 소비에 쓰자고 주장했고, “현대 수정주의자”들도 경제 건설의 기본 노선에 반대했다고 한다.
이 교재에 등장하는 ‘종파분자’나 ‘현대 수정주의자’ 같은 용어들은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사후 규정된 표현이다. ‘최창익 등 종파분자’들은 연안계와 소련계 중에서 김일성에게 반대하게 되는 인물들에 해당한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개조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송예정 등 ‘신설정 그루빠’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전후 복구 사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53년 8월부터 시작된 전후 복구 준비 단계 사업은 6개월 만에 끝났다. 뒤이어 1954년부터 실시된 인민경제 복구 발전 3개년 계획(1954.~1956.)은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도되었다. 공업생산은 1953년에 비해 2.8배(생산수단은 4배, 소비재 2.1배) 증가하여 전쟁 전인 1949년과 비교하면 1.8배 증가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공업성장률은 무려 42%였다. 농업생산도 1.4배 증가하여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그리하여 1956년에는 전쟁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전후 경제 복구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벗어나 잘살아보고자 하는 인민의 밑으로부터의 열망과, 그 열망을 복구 사업에 동원하는 데 성공한 당 · 정부의 지도력에서 내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폐허 상태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오로지 인민의 살고자 하는 의지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민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전후 복구 사업의 경험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후 경제 복구의 성공 요인이 단지 내부에만 있지는 않았다. 또 다른 성공 요인은 외부의 원조였다. 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사이에는 본격적인 체제 경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무기로는 상대방을 누를 수 없음을 알게 된 미국과 소련은, 이제 경제적으로 상대방을 누르기 위해 무기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한반도는 체제 경쟁의 시험장이 되었다.
공산 진영에서 북한 전후 복구 원조에 앞장선 나라는 소련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9월에 소련과 북한 양국의 정부대표단은 회담을 열어 북한의 복구 건설을 위해 소련이 10억 루블의 무상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소련은 1956년에 2차로 4억 7천만 루블을 원조하고 북한에 대해 차관 상환을 면제해주기로 결정했다. 1950년대 전후 복구 시기에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무상원조의 실제 총액이 얼마인지는 불투명하다. 북한은 자신이 받은 무상원조액의 정확한 통계수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소련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가 편찬한 『한국통사』 하권에는 당시 무상원조액이 총 13억 루블이라고 밝혀져 있다. 한편 동독 4억 6,200만 루블, 체코슬로바키아 1억 1,300만 루블, 루마니아 6,500만 루블, 불가리아 2천만 루블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1차 무상원조액은 총 8억 6천만 루블에 달했다. 또한 불가리아 3천만 루블, 루마니아 2,500만 루블, 헝가리 1,500만 루블 등 추가 무상원조도 이루어졌다.
소련의 원조는 중공업 · 경공업을 망라한 대규모 산업 단지 및 산업 시설의 복구 건설에 주안점을 두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 역시 주로 북한의 공업 기반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물자원조 외에 전문가들을 직접 파견해 북한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은 1,7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을 파견해서 1,200명의 북한 전문가를 양성했다. 이 국가들의 150개 기획기관이 북한의 기간산업을 복구 · 확장 · 신축하는 데 동원되었다. 이들은 북한의 함흥 등 전후 도시 건설 사업에도 참여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 건축양식이 북한에 직접 도입되었고, 그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소련 다음으로 북한에 많은 원조를 제공한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8만억 원(구인민폐. 신인민폐로는 8억 원)을 무상원조했다. 원화와 루블화의 정확한 환율을 파악하기 어려워 두 나라의 원조 규모를 직접 비교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련 자료에서 중국 원조액을 루블로 환산한 수치가 확인되는데, 소련의 무상원조액이 2억 9,250만 루블이었을 때 중국의 원조액은 2억 5,840만 루블이었다. 당시 중국의 경제 수준을 고려할 때 중국이 소련에 버금가는 지원을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전시에 군사력을 직접 지원한 중국은 무상원조에도 적극 나섬으로써 북한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해나갔다.
김일성은 1953년 11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에 감사를 표하며, 전후 복구 건설에 중국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에 따라 ‘조 · 중 경제 및 문화합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중국은 1953년 말 이전에 북한에 제공하는 원조는 일체 무상으로 하고, 여기에 다시 북한 경제 부흥을 위해 새로 8만억 원(구인민폐)을 원조하기로 합의했다. 북한 주둔 중국 인민지원군도 건설 현장 · 농촌 등에서 전후 복구 건설 지원에 적극 참여했다.
그 결과 지원군이 개수한 공공건물이 881채, 각종 민가 개축이 45,412간, 교량 복구 · 신축이 4,263개, 제방 개축이 4,096곳(430km), 수로 보수가 2,295곳(1,200km)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1954년에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일부 조선족을 전후 복구 건설에 참가시켰다. 1958년경에는 조선족 일부를 아예 북한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1954년부터 1956년 사이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북한에 제공한 원조액은 당시 북한 전체 예산의 23%에 이르렀다.
북한이 경제 복구 과정에서 외부 원조에 크게 의존한 것처럼, 남한도 전후 경제 복구를 위해 많은 외부 원조를 받았다. 다만 남북이 받은 외부 원조는 두 가지 점에서 성격의 차이가 있었다. 첫째, 남한은 전적으로 미국 한 나라의 원조에 의존했지만, 북한은 소련 외에도 중국과 동유럽 국가의 원조를 받았다. 둘째, 남한에 대한 원조는 경제 안정에 초점이 있었지만 북한에 대한 원조는 경제 자립의 기초를 만드는 데 초점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남한은 원조를 받으면서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성을 심화시켰지만 북한은 외부 원조에 의존하면서도 어느 한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경제의 자립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남북의 경제는 대외 의존 대 자립으로 선명하게 대비된다. 다만 남한 경제는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성을 심화시키면서도 이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점차 적응해갔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후 복구에 나서다 (북한의 역사, 2014. 3. 3.(1권), 2011. 10. 17.(2권), 김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