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6일이면 고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31년이 되는 날이다 세인들은 그분이 우리들의 배고품을 면하게 한분이다 또 어떤분은 독재자다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 무결 할수는 없다 우리 역사에 위대한분으로 기록 될것은 틀림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분을 존경하는 분이 많기에 그분의 일화를 찾아 올립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관상과 사주에 얽힌 일화
박정희와 관상
1941년 가을의 어느 휴일, 박정희는 동기생 이병주(李炳胄)·이상진(李尙振)과 함께 신경(창춘)의 구 시가지를 거닐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관상을 보게 되었다. 박정희의 얼굴을 흘깃 본 60대의 중국인 관상쟁이는 “三軍叱咤之上將(삼군질타지상장) 治天下之大頭領(치천하지대두령)”이란 붓글씨를 써주어 함께 간 친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3군 호령의 상장에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의 상”이란 뜻이다.(정영진, <청년 박정희>, 1998) 봉황상이라 보는 이도 있고, 그의 목소리에 권(權)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물론 관상이니 사주니 하는 것은 허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당사자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의연함과 무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맥락에서 관상 이야기는 왜 그가 남로당의 조직명단을 순순히 털어놓았을까 하는 문제를 해석하는 데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만주군→독립군→국군→남로당→전향이라는 기회주의적 행보를 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노선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벗어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행보는 그가 나폴레옹을 숭배하고, 긴 칼을 차고 싶어 만주로 갔던 것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점에서 “가난을 비롯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그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엘리트주의적이며 하향식이었다”(전인권)는 지적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류적인 이념을 따른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쪽의 정치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심리의 기저에는 “3군을 호령하고 천하를 다스릴 우두머리가 될 팔자를 타고났다”는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와 사주
박정희는 1917년 9월 30일 인(寅)시 생이다. 이를 간지로 옮기면 정사(丁巳)년, 신해(辛亥)월, 경신(庚申)일, 무인(戊寅)시가 된다. 이 사주의 특징은 지지의 네 글자가 사주족보에 올라 있는 ‘인신사해(寅申巳亥)’를 다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주를 그쪽 전문용어로는 ‘사맹격(四孟格)’, 쉬운 말로는 ‘제왕격’이라고 한다.
일본의 평민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주가 바로 사맹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가 끝나고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그 해 말 미국 포병학교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2군단 포병사령관, 포병학교 교장, 제5사단장을 역임했고 1956년에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1958년 육군 소장에 진급한 박정희는 1군단 참모장, 6관구사령관을 거쳐 1960년 1월 21일에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했다. 여기에서 그는 경남 함양 출신의 박재현(朴宰顯)이란 젊은이를 만난다. 계급은 일등병이었다.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는 그는 거창농고를 졸업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그곳의 기인·달사들과 교유하면서 도룡(屠龍), 곧 용 잡는 기술을 익힌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나이가 되자 입대하여 부산군수기지에 배속되었다. 아직 20대였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속칭 ‘박 도사’를 부른 것이었는데 한 저서는 그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산(박재현)은 이때 박 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 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 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조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 2002)
제왕의 운세.. 박정희
지난날 만주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이 말은 거사에 대한 심리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5·16군사혁명사> 편찬간사였던 이낙선(李洛善) 중령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가 거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아직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발령이 나기 전인 6관구사령관 시절이었다.
그 계기는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콜론보고서’였는데,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가 요청하여 미국 콜론연구소가 작성했다는 이 보고서가 왜 그 시점에 한국의 <사상계>에 실리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왜냐하면 거사에 참가했던 한 장성이 회고한 것처럼 그 보고서는 한국의 “젊은 장교들을 분개시켜 결국 5·16 군사혁명을 태동케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김윤근, <해병대와 5·16>, 1987)
당시 군 안팎에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한국 군부의 궐기를 종용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민주주의가 부적절할지도 모르는” “한국에는 현재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군부지배가 발생할 것 같지 않다”는 요지의 이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도 분개했던 것 같다.
“없긴 왜 없나? 여기 한 사람 있는데!” 필시 그런 기분에서 그는 김동하(金東河) 해병대 소장을 신당동 자택으로 불러 거사를 의논했던 것 같다. 그 직후 부산군수기지로 전보되어 일등병 박 도사를 만났고, 그로부터 제왕의 운세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동래온천장 등지에서 이주일(李周一)·윤태일(尹泰日)·최주종(崔周鍾)·김윤근(金潤根) 등 뜻있는 장성들과 5월 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모의하는 가운데 4·19를 맞았다.
월간 중앙 2010년 7월호 중에서 발췌
첫댓글 서울용산에 사는 맹호부대참전자 입니다. 싱가폴 리콴류자서전에는 근혜아버님 이야기 있음.2013년에 즈음하여 나라운은 ???하얀머리